조선왕조실록 품은 무주 적성산에 오르다

김해에서 선술집을 하는 동갑내기 '라이더' 친구가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모터사이클 뒷자리에 태우고 유럽을 향해 출발했다. 그는 6월 11일 강원도 동해항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여객선에 모터사이클과 함께 올라탔고, 블라디보스톡에 잘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그의 '대장정' 출발 소식을 기사로 썼고 그 기사를 내 페이스북 페이지에 링크했다. 그 기사는 <경남도민일보> 홈페이지에서 '이 주의 가장 많이 읽은 기사'에도 랭크됐고, 내 페이스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주고 응원 메시지를 남길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것을 보면서 "나도 언제가 꼭 가야지"하는 다짐을 되새겼다. 우스갯소리지만, 빨라도 6년은 기다려야 한다. 내 아들은 지금 일곱 살인데 5학년이 되려면 6년이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큰아이인 딸은 지금 중학교 3학년인데 키도, 덩치도 크다. 그래서 오토바이에 둘이 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하다. 내년에 딸과 함께 차를 타고 훌쩍 떠나는 상상도 해봤다. 그러려면 회사에 사표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다.(웃음) 어쨌든 김해에서 스페인까지 2만5000km 대장정에 오른 친구 라이더와 아이가 무사히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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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 적상산 전망대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덕유산 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정면 가장 높은 봉우리가 덕유산 향적봉이다. 그 아래로 무주스키장 슬로프가 여러 갈래로 선명하게 보인다. / 조재영 기자

 

무주 라제통문

모토캠핑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매달 한 차례씩 지인들과 모토캠핑을 나서는 것이 미리 정해놓은 이벤트처럼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전북 무주와 진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번 토요일과 일요일 모토캠핑을 위해 나는 회사에 일요일 하루짜리 휴가를 냈다. 신문사에서 일요일은 평일과 같이 정상 근무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첫 번째 목적지를 무주 라제통문으로 정했다. 창원에서 무주 쪽으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산청, 함양을 지나 거창 빼재로 넘어가는 길이다. 또 하나는 창녕, 고령, 성주, 김천을 거쳐 무주로 넘어가는 길이다. 우리 일행은 토요일 오전 창녕 5번 국도변 화왕산휴게소에서 4명이 만나 출발했다. 함께 가야 할 라이더 1명이 더 있었지만, 그는 오후에 따로 출발하기로 했다.

현풍을 지나 고령으로 빠진 뒤 성주 쪽으로 달렸다. 김천 대덕면 쪽으로 가는 중간에 성주호를 끼고 도는 코스가 있었는데 시원한 호수 풍경과 적당한 꼬불길이 달리는 재미를 더했다. 해가 머리 위에 뜨자 햇볕이 따가웠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메시 자켓을 입었지만 헬멧을 쓰고 있는 데다 투어링 모터사이클은 방풍 성능이 뛰어나 더웠다. 이렇게 더울 때 짜증을 내거나 덥다고 게으름을 피우게 되면 사고가 나기 십상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라이딩에 집중해야 한다. 방어운전을 하고 전후좌우 상황을 읽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항상 사고는 "별일 있겠어?" 하는 방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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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제통문. 삼국시대 때 이쪽은 백제 땅이었고 그 너머는 신라 땅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경인 셈이다. / 조재영 기자

 

라제통문은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신두마을과 소천리 이남마을 사이에 있는 작은 산 능선 아래 암벽을 뚫어 만든 통행로다. 암벽을 뚫은 터널은 아주 짧다. 길이가 긴 화물차라면 머리는 이쪽에, 꼬리는 저쪽에 있을 정도의 길이다. 라제통문은 설천면에서 무풍면으로 가는 길에 있는데, 삼국시대 때 설천면은 백제 땅이었고 무풍면은 신라 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신라의 '라'와 백제의 '제'를 따서 라제통문인 모양이다. 지금도 같은 무주군 안이지만 설천면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무풍면 사람들의 말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섞여 있다고 한다. 무풍면은 경북 김천시 대덕면과 접하고 있다.

라제통문 앞에 설천교라는 다리가 있고, 그 옆에는 현대식으로 지은 정자와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설천교 앞을 옛날 관원 복장을 한 사람이 항상 지키고 있다. 관광객들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면 두말하지 않고 포즈를 취해주신다. 귀찮을 만도 한데,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분이다 싶다.

무주 적상산

다음 목적지는 라제통문에서 20분쯤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적상산이다.

무주 적상산은 높이 1034m로 덕유산국립공원 지역에 속한다. 산을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돌아보면 바위 암벽이 층층이 산을 둘러싸고 있다. 이 바위 암벽이 붉은색 치마를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적상(赤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상 부근은 분지였는데 양수발전소 건설을 위해 낮은 쪽을 막아 댐을 만들었다. 적상호다. 산 아래에는 무주호가 있다. 정상호(상부댐)에서 무주호(하부댐)로 물을 흘려보낼 때 생기는 수압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한다.

정상에는 적상산성(사적 146)이 있고 그 너머에 안국사라는 절이 있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산정상 부근에 있는 적상호까지 오르는 길은 고도가 급격히 높아지면서 굴곡도 심하다. 모터사이클 운전이 익숙한 라이더도 방심하면 중앙선을 넘어가거나 미끄러질 수 있는 길이여서 조심해야 한다. 오르는 길 중간에 국립공원관리공단 적상분소가 있고 이 곳을 지나 더 오르면 와인동굴이 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시기에는 이곳에서 교통정체가 생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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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상산 정상부근 댐 옆에 있는 전망대.라이더들은 ‘적상산 물통’이라고 부른다. 양수발전을 할 때 수압을 조절하는 시설인데, 관광객들에게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 조재영 기자

 

우리는 단숨에 적상호까지 올랐다. 정상호 둘레를 따라 돌아 들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막다른 곳에 이르는데, 그곳에 전망대가 있다. 라이더들끼리는 '적상산 물통'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큰 물탱크처럼 생겨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물통은 안쪽이 비어있는 커다란 굴뚝과 같다. 상부댐에서 하부댐으로 물을 흘려보내 전기를 생산하는 중에 갑자기 터빈이 멈춰섰을 때 생기는 엄청난 압력을 빼내려고 만든 것이 물통이다.

물통 외부에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물통 꼭대기 닿는데, 그곳이 360도 전망대로 꾸며져 있다. 남쪽으로는 덕유산·지리산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충남 금산, 충북 영동이 시야에 들어온다. 산 아래 무주호도 보인다. 날씨가 흐려 구름이 낀 날에는 산 중턱 아래로 구름이 흐르면서 무주호가 보일 듯 말 듯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복원된 적상산 사고

적상호 입구에서 둘레길을 따라 물통에 닿기 전의 큰 주차장이 바로 옆에 자세히 보면 예스럽게 지은 건물 두 채가 보인다. 두 채의 건물은 도로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어서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바로 적상산 사고다. 정확하게는, 복원된 적상산 사고다. 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이다. 지금으로 치면 '국가기록원'쯤으로 보면 되겠다. 이곳에는 자원봉사를 하는 문화해설사가 항상 있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가면 많은 역사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싶었다.

원래 적상산 사고는 지금 적상호 물속에 잠겨있다. 그것도 실제 건물은 없고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주춧돌 크기와 간격, 원래 건물 사진 등을 토대로 지금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한전이 양수발전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사고는 안국사, 호국사와 함께 있었는데 사고는 지금 자리로 옮기고 안국사는 산정상 너머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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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상산 사고 선원전쪽에서 적상호를 바라보는 풍경. 왼쪽에 일부가 보이는 건물이 실록전이다. 이곳에 가면 문화해설사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 조재영 기자

 

적상산 사고 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고는 고려 말기 이후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왕조의 실록을 보관하던 곳으로 선원전, 실록전을 두었다. 1439년(세종21년)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신설하여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내사고인 춘추관(한양)과 외사고인 충주, 성주, 전주 사고 등 4곳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사고가 불에 타버렸다. 이때 전주 사고의 실록은 1593년(선조26년) 내장산, 해주 등을 거쳐 평안도로 옮겨 난을 피함으로써 임진왜란 중 멸실되지 않은 유일한 사고본으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조정에서는 1603~1606년에 실록을 다시 편찬하였는데 인쇄된 실록은 전주사고본을 정본으로 정본 3부와 초본인 교정본 1부를 인쇄, 모두 5부로 만들었다. 전화를 피할 수 있도록 깊은 산중이나 섬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원본인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의 마니산에 두었다가 정족산 사고로 옮겼다. 새로 인쇄한 정본 가운데 1본은 예전처럼 서울의 춘추관에 두고 나머지는 태백산(경북 봉화) 사고와 묘향산(평북 영변) 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초본인 교정본은 오대산(강원도 평창) 사고에 보관하였다. 그 시기 묘향산 사고가 있는 북방에서는 후금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이에 대비하여 묘향산 사고의 실록을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다. 1610년(광해군 2년) 조정에서는 사관을 보내 적상산의 지형을 살피게 하고 산성을 수축하였다. 그 뒤 1614년 천혜의 요새로 이름난 적상산에 실록전을 창건하고 1618년(광해군10년)에 <선조실록>을 봉안하였다. 1634년(인조12년)에는 묘항산에 보관하던 실록을 적상산 사고로 옮겼다. 또한 1641년(인조19년)에 선원전을 세우고 그해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을 봉안함으로써 적상산 사고가 완전한 사고가 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병탄된 후 조선왕조실록등이 서울의 규장각으로 옮겨지면서 사고는 황폐화되었다. 사고가 있던 본래 자리가 1992년 댐(양수발전소상부댐) 축조로 물에 잠기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유구가 옮겨졌으며 1997년 선원각 복원을 시작으로 1998년 실록각까지 복원되었다.

적상산 사고에는 실록 824책을 비롯해 국가중요서적 총 5541책이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보태졌다.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사고 중 서울 춘추관 사고는 이괄의 난(1624) 때 소실됐다. 나머지 정족산 본은 서울대학 규장각에, 태백산 본은 국가기록원(부산지소)에, 적상산 본은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돼있다.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일본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됐다가 2006년 7월에 47책을 반환받았다.

사관은 전임사관과 겸임사관이 있었는데, 전임사관은 항상 왕의 곁에서 국정에 관한 모든 일을 기록했고 겸임사관은 각 관청에서 사관을 겸임하는 관리다. 이들은 해당관청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업무처리 내용을 기록하였다.

전임사관이 작성하는 사초에는, 매일 작성해 춘추관에 제출한 입시사초와 비밀사항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를 기록한 뒤 집에 보관하다 실록청이 열리면 제출하는 가장사초가 있다. 가장사초 제도는 비밀을 보장하고 그 내용의 첨삭 등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왕도 이 사초를 볼 수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편찬된 실록도 볼 수 없었다. 실록의 편찬은 역사의 기록이면서 한편으로는 최고통치자와 위정자들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기능을 했다.

사고 수호는 사찰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적상산 사고는 바로 옆에 안국사와 호국사가 있어 승려들이 군사와 함께 사고를 지켰다. 사고의 전반적인 관리는 참봉이 하였다.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사고 주변에 돌담장을 방화벽으로 쌓았고, 방습시설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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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행을 함께한 라이더들이 적상산 전망대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곳 전망대에서는 동서남북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 조재영 기자

 

3년에 한 번씩 실록을 포쇄했다고 한다. 포쇄는 책의 습기를 제거하고 충해를 막기 위한 것으로 바람을 쐬고 햇빛에 말리는 것이다. 이때 사고 건물, 실록의 보관 상태 등도 점검하고 보수하였다. 중앙에서 파견된 사관이 지휘해 3년에 한 번 정도 포쇄가 이뤄졌으며 포쇄에 필요한 인원은 각 읍에서 차출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1935년에 총 200부가 간행되었다. 고종·순종실록 편찬위원에 한국인도 있지만, 위원장과 실질적인 편찬 총책임자를 일본인이 맡아 일제의 의도에 부합되게 편찬되었다. 이런 연유로 고종·순종실록은 우리 학계의 외면을 받고 있으며, 보통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할 때 고종, 순종 실록은 제외된다고 한다.

사고는 어디나 실록전과 선원전이 있는데 실록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선원전에는 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다.

왕실족보는 종부시와 돈녕부에서 작성하였다. 종부시에서는 선원계보기략, 선원록 등을 작성하였으며 이 족보들은 국가의 족보로 인식되어 실록과 함께 사고 선원각에 보관되었다. 돈녕부에서는 왕실의 친인척을 망라한 돈녕보첩을 작성하였다. 이 족보는 돈녕부에 보관하였다. 현재 장서각과 규장각에 왕실족보가 1만 권 가까이 소장되어 있다.

선원계보기략은 종친록(왕의 남계 후손 9대까지 수록)과 유부록(왕의 여계 후손 6대까지 수록)을 종합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왕실족보다. 왕의 내외손 6대까지 수록했다. 1681년에 처음 간행되어 1931년까지 발간되었다. 막대한 양이 발간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왕실족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적상산 사고 덕분에 이곳을 관할하던 현이 도호부로 승격됐다는 기록도 있다. 무주군은 무풍현과 주계현이 합쳐졌는데, 삼국시대 때 무풍현은 신라 땅이고 주계현은 백제 땅이었다. 조선건국 후 1414년(태종14년) 무풍현과 주계현을 병합해 무주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후 적상산성에 사고가 설치되면서, 1647년(현종15년) 무주현에서 무주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무주도호부사는 적산산성 수성장과 도적을 잡는 토포사를 겸했다고 한다.

진안 운일암반일암

길 따라 여행을 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 중 하나가 하룻밤 묵을 곳이다. 우리는 무주에서 서북쪽으로 더 나아가 진안 운일암반일암 계곡에서 캠핑을 하기로 했다. 이곳은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서 주양리까지 약 5km 이르는 계곡이다. 계곡은 운장산(1126m)과 명덕봉(845m), 명도봉(863m) 사이에 걸쳐 흐른다. 이름이 특이하다. 운일암반일암은, 옛날 이곳은 계곡은 깊고 길은 없어서 보이는 것이 하늘에 해와 흘러다니는 구름뿐이라고 해서 운일암, 계곡이 너무 좁고 깊어 햇빛 비치는 시간이 반나절뿐이라고 해서 반일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이곳 캠핑장에 자리를 펴고, 준비한 음식과 함께 마음의 문도 열어 놓았다. 운일암반일암 계곡의 밤의 깊이만큼이나 여행을 함께 한 이들의 우정도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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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진안 운일암반일암 계곡을 지나는 라이더들. 따로 도로를 낼 수 없어서 이렇게 다리를 놓을 정도로 계곡이 좁고 깊은 구간이다. / 조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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