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의 지팡이, 영화 와호장룡, 냉전 시대 중국을 일컫던 '죽의 장막'. 공통점은 뭘까? 찰리 채플린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우선 콧수염과 코믹 연기가 생각난다. 하지만 찰리 채플린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대나무였다는 사실은 최근에 알게 되었다. 와호장룡은 중국 우이산에서 촬영된 영화다. 사천성 구채구에서 촬영된 장면은 주인공 저우룬파와 장츠이가 대나무 숲에서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흔들리는 대나무 가지에서도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며 싸우는 중국 영화다운 장면이다. 죽의 장막은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처럼 냉전시대 중국이 음침하고 폐쇄적인 나라였다는 사실을 '철의 장막'에 빗대 비유적으로 이른 말이다.

찰리 채플린의 지팡이, 와호장룡, 죽의 장막. 공통점은 대나무다. 대나무는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무척이나 사랑받는 존재였다. '고기 없이는 밥을 먹을 수 있으나 대나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말한 소동파의 말에서 대나무가 얼마나 소중히 여겨졌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나 우리 조상들은 대 속에서 여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 탯줄 끊는 도구가 예리한 대나무 칼이었고, 죽어서 장례식 치룰 때 자식들이 짚고 상여 뒤를 따르던 지팡이도 대나무였다. 대나무 가지로 엮어 세운 울타리 틈에 대나무로 세운 사립문 열고 집 안에 들어가면 대빗자루로 깨끗이 쓸어낸 마당이 나온다. 대로 엮은 병아리집도 눈에 들어온다. 흙벽에는 삼태기, 소쿠리, 채반, 키도 걸려있다. 댓살로 짠 문짝을 밀치고 방 안으로 들어갈라치면 방바닥엔 대자리, 뒷문엔 대발이 늘어져 있다. 대시렁도 보이고 고리짝도 보인다. 플라스틱 도구가 나오기 전에는 대나무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생활도구 대부분이 대나무였던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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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 마을 길. /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

대나무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대+나무의 합성어인데 대는 중국의 남방음 'Tek'에서 왔다고 한다. 즉, 죽(竹)의 남방 고음이 '덱(Tek)'이었는데, 끝소리 'ㄱ' 음이 약해지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대'로 변했다는 것이다.

대나무의 원산지는 동남아시아 지역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만파식적' 이야기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이미 신라 이전 신석기 무렵부터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에 의해 도입되었으며 벼농사가 전래된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나무는 현재 지구상에 약 120속 1,250종이 분포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자라는 종이 1,190종, 중국에 500여 종, 일본에 640종, 우리나라에는 19종 정도가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종으로는 왕대, 솜대, 맹종죽, 이대, 조릿대 등이 있다. 왕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자라는 대나무로 높이가 20m에 이른다. 왕대는 중부 이남의 해발 600m 이하 정도에서 자란다. 탄력성이 좋고 가공하기가 쉬워 용도가 다양하다. 대나무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쓰임새가 많아 왕대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왕대는 참대 또는 늦죽으로도 불리는데 죽순이 약간 쓴맛을 가진다.

솜대는 높이가 10m까지 자라는데 흰 얼룩무늬가 솜처럼 보여 솜대라고 부른다. 죽순 맛이 가장 좋은 대나무 종류다. 왕대에 비해 줄기가 가늘고 잎이 작으며 죽순 껍질에 털이 많다.

맹종죽은 중국이 원산지인데 1898년 일본에서 건너와 부산시 대신동에 처음으로 심었다고 한다. 맹종이란 사람이 병환 중의 어머니가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해 한겨울에 대나무밭에 가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슬피 울었는데 그 눈물방울이 떨어진 눈 속에서 죽순이 돋아났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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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순이 고개를 내밀고 생장을 시작하면 수십일 만에 다 자란 대나무가 된다. /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

대체로 맹종죽 죽순은 4월 상순에서 5월 초순 사이에 나오고, 솜대는 4월 하순에서 5월 하순. 왕대는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 사이에 나온다. 죽순이 고개를 내밀고 생장을 시작하면 수십 일 만에 다 자라게 된다. 다 자란 후에는 더 굵어지지는 않고 단지 굳어지기만 한다. 보통 맹종죽은 30일에서 40일 사이. 왕대는 20일에서 40일. 솜대는 25일에서 40일 만에 다 자라게 되는데 대체로 약 40일이면 다 자라게 된다. 죽순 껍질을 까보면 이미 모든 마디가 다 형성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약 한 달 만에 빠른 속도로 자라게 되는 비밀이 여기에 숨겨져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가장 왕성하게 자란다고 하는데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하루 동안 최고 생장량이 무려 120cm에 달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우후죽순이다. 그래서 대나무밭에서 쉴 때는 모자를 죽순 위에 걸어놓지 말라는 속담도 있다.

대나무는 잎에서 만든 영양분을 뿌리줄기로 내려보내 저장해 두는데, 4년이 지난 후 죽순 아기를 한 번에 올려보내는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이 무렵 대나무 숲은 누렇게 변해 시들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를 죽추(竹秋)라 이르는데 대나무 숲에 가을이 든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시기가 되면 대나무는 새로 솟아난 죽순에 자신의 양분과 수분을 다 내주어 죽순을 키우고, 그 자신은 양분과 수분이 없어 시드는 것이다. 죽순이 어느 정도 자라면 다시 수분과 양분을 자신에게 돌려 곧 생기를 되찾게 된다. 온갖 희생과 무한한 인내를 통해 자식을 키우는 부모 마음을 대나무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까지 화살 만드는 재료로 썼던 대나무가 바로 이대다. 이대는 키가 2m에서 5m 정도 자라는데 굵기도 적당하고 곧게 자라서 화살대로 쓰기에 안성맞춤인 대나무다. 우리나라 남부지방 해안 쪽에서 많이 자라는데 옛날 산성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이대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삼국지에 보면 조조가 거느린 백만 대군을 격파하는 적벽대전에 앞서 제갈량이 조조 군대로부터 화살 10만개를 공짜로 얻게 되는 내용이 묘사되어 있는데. 아마 대부분 이대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대나무가 나지 않는 북쪽 오랑캐들은 자작나무나 버드나무, 싸리나무를 화살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어릴 때 화살대 만드느라 이대 찾으러 이곳저곳 다녔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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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가 있는 마을. /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

등산길 숲속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산죽. 키 작은 대나무가 바로 조릿대다. 복조리 만드는 데 사용된다. 조리는 곡식에 들어있는 이물질을 걸러내는 기구로 쓰였다. 정월 초하룻날 1년 쓸 조리를 한꺼번에 사서 실이나 엿 등을 담아 벽에 걸어두었던 전래 풍습도 있었다. 1990년대까지 이어져 내려왔었는데 요즘엔 장식품 복조리 말고는 보기가 어려워졌다. 조릿대는 줄기가 가늘고 유연성이 좋아 쉽게 휘고 비틀 수 있어 조리 외에도 작은 상자나 키, 바구니 같은 각종 생활기구 재료로도 널리 쓰였던 대나무다.

대나무는 잎, 줄기, 죽순까지 쓰임새가 아주 많은 식물이다. 그래서 역사와 민속, 문화 속에도 빼놓을 수 없는 식물로 등장한다. 세한삼우, 사군자 중 하나로 칭송해서 그림의 소재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오랜 벗을 가리키는 죽마고우란 고사성어도 있다. 작은 대나무 막대기 위에 열을 지어 올라탄 후 신작로 길을 뛰어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별다른 의미도 없어 보이는데 왜 그렇게 대나무 막대기를 타고 놀았을까 싶기도 하다.

파죽지세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로 군사를 몰아가서 승리한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대나무는 처음 두세 마디만 쪼개면 그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진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아무래도 대나무와 관련된 이야기 중 가장 궁금한 부분은 대나무 꽃일 것 같다. 아직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여러 가지 설로 설명할 수 있다. 대나무는 일제히 꽃을 피우는 식물로 알려져 있는데 60년에서 120년 만에 한 번씩 피어난다는 설이 있다. 왜 꽃이 피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는데 외부 요인과는 상관없이 일정한 수명에 달하면 꽃이 핀다는 주기설이 있다. 또 영양분이 부족해서 꽃을 피운다는 설도 있다. 특이한 점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나무 숲은 모두 한 몸 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개체가 뿌리로 연결되어있다는 말이다. 숲 전체가 한 포기라는 의미다. 대나무 숲속에서 한두 그루를 캐내 다른 곳에 옮겨 심어도 같은 시기에 꽃이 피고, 이듬해 동시에 죽는다고 한다. 동일한 유전자 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77년 통계에는 우리나라 총 대나무 숲의 약 47%가 개화한 적도 있다고 한다. 대나무 열매를 죽실이라고 부르는데 <본초강목>에 의하면 '신명을 통하고 몸을 가볍게 하며 기운을 북돋아 주고 모양이 밀과 같아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오르니 그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비엇는가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학창 시절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다. 제일 인상 깊었던 구절은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란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름처럼 대나무는 나무일까? 풀일까? 식물 분류 측면에서 보면 대나무류는 이름과 달리 나무가 아니고 풀이다. 하지만 분류에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대나무는 우리나라 무속 신앙에서는 신과의 매개물로 이용되었다. 하늘 높이 곧게 자랄 뿐 아니라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어 인간과 신의 통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통 대나무를 잘라 꼭대기 잔가지는 그대로 두고 오방색 천 조각을 매달아 바람에 휘날리게 하여 신의 길목임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해가 바뀌는 정초에 마을마다 온통 폭죽을 터뜨리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새해를 맞아 한 해를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악귀를 쫓아내는 행사를 치루는 것인데 속이 비어있는 대나무가 불에 타는 순간 공기가 팽창하여 폭발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래서 폭죽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대나무는 신석기 무렵부터 인간과 함께한 식물이다. 대나무가 살기 힘든 추운 북쪽 지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 뒷산 숲정이에 대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참 고마운 존재다. 소나무와 더불어 가장 친근하게 다가오는 대나무. 삶이 번거롭게 느껴질 때쯤 소나무 숲, 대나무 숲에 들러 바람결에 들려오는 솔숲 소리, 대숲 소리 들으며 명상에 잠겨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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