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펜터스(Carpenters)의 'Yesterday Once More'

설날을 코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여유롭게 마무리를 준비하는 카페에 중년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는 순간 막 카펜터스의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곡을 다 감상한 후에야 자리 잡은 남자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어떻게 알고 틀어주었냐"고 말했다.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을 환대해주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짧지만 강렬한 인연은 시작됐다.

자신을 박 아무개로 소개한 아내에게 연애 시절 첫 만남 장소는 온데간데 없어졌지만, 카펜터스의 노래를 들으며 데이트를 즐겼던 추억의 카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고 아내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들 부부는 18년 전 미국으로 이민갔다고 한다. 지금의 기반을 잡기까지 여러 일이 있었지만, 아내의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고생 덕분에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그. 모든 공을 함께하지 못한 아내에게 돌렸다. 그는 지갑에서 빳빳한 백 달러 지폐를 꺼내 "치정아! 죽어도 사랑해"라고 쓰고는 눈앞에 보이는 벽면에 붙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늦어도 3년에서 5년 안으로 아내와 함께 이 자리에 앉아 추억의 노래를 듣겠노라고 다짐했다.

재즈와 컨트리풍의 선율로 듣기 편안하며 서정적인 호소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은 팝 그룹이 있다. 오빠인 리처드 린 카펜터(Richard Lynn Carpenter)와 카렌 앤 카펜터(Karen Anne Carpenter) 남매로 구성된 카펜터스가 그 주인공이다.

1963년 캘리포니아의 다우니로 이사한 후 리처드는 다우니 하이스쿨 3학년 때 밴드부에 들어가 피아노를 쳤다. 카렌 또한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밴드부에 들어가기를 자청했다. 악기를 연주해본 적이 없었던 그녀에게 글로켄스필이란 생소한 악기가 추천되었다. 하지만 금방 싫증을 느낀 그녀는 드럼에 관심을 보이며 연습했다. 이후 카렌은 작은 레코드사인 매직램프(Magic Lamp)와 계약하고 싱글 'I'll Be Yours'를 발표하기도 했다. 1964년 리처드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접어든다. 두 남매는 1965년 베이스와 튜바를 연주하던 리처드의 친구 웨스 제이콥스(Wes Jacobs)와 함께 재즈그룹 '리처드 카펜트 트리오(The Richard Carpenter Trio)'를 결성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6년 그들은 밴드경연대회에 출전해 우승하면서 RCA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지만 활동은 미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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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렌 카펜터(왼쪽)과 리처드 카펜터(오른쪽).

한편 오빠 리처드를 따라 오디션 장에 간 카렌은 우연한 기회에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때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던 조 오스본에게 발탁되어 계약을 맺고 리처드가 만든 곡들을 녹음했다. 이듬해인 1967년 남매는 기타리스트이자 작사가인 리처드의 친구 존 베티스(John Bettis) 등 네 명의 다른 멤버들과 6인조 밴드 '스펙트럼(Spectrum)'을 결성해 클럽에서 연주했다. 이때 만난 리처드 카펜터와 존 베티스는 카펜터스의 오리지널 히트곡을 많이 만들었다. 리처드가 주옥같은 멜로디를 만들면 가슴을 울리는 아름다운 노랫말을 입히는 것은 존 베티스의 몫이었다. 하지만 스펙트럼 밴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됐다. 또한 그해 웨스 제이콥스가 음악공부를 목적으로 리처드 카펜트 트리오를 그만두면서 모든 밴드 활동은 중단됐다.

이후 계속해서 조 오스본의 스튜디오에서 레코딩한 데모테이프를 각 레코드사에 배포했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69년 A&M 레코드사의 공동경영자이자 유명한 트럼펫 연주자인 허브 앨퍼트(Herb Alpert)에 의해 계약을 맺으며 카펜터스로 정식데뷔하게 됐다.

데뷔앨범 'Ticket To Ride'가 발매됐지만 큰 반응을 얻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물 작곡가인 버트 바카라(Burt Bacharach)가 A&M의 경영자 제리모스를 찾아와 라디오에서 누군가의 'Ticket To Ride'를 들었는데 무척 좋았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올드팝을 재편곡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여기서 찾아낸 곡은 대형 여가수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불렀다. 대중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한 '(The Long To Be) Close To You'란 곡이었다.

이 노래를 발표하자마자 대중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노래는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4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이는 카펜터스를 단숨에 스타덤에 올려놓으며 1971년에 열린 제13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신인가수로 선정되게 했다. 2집 앨범인 'Close To You'에 실린 또 다른 곡 'We've Only Just Begun' 역시 카펜터스의 대표곡이다. 카펜터스에 의해 발표된 이 노래는 그해 그래미상 '올해의 노래' 부문 후보에 올랐고, 빌보드 싱글차트 2위, 어덜트 컨템퍼러리 차트 1위를 차지하며 결혼 축하곡으로 많이 불렸다.

카펜터스의 오빠 리처드는 작곡과 편곡, 피아노 연주를 맡았으며, 동생 카렌은 콘트랄토(Contralto)의 음역대로 노래를 불렀다. 이는 성악에서 가장 낮은 소리를 내는 여성 음역을 가리키는 말인데, 카펜터스 이전의 팝계에서는 이런 저음의 여성 보컬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세 옥타브를 아우르는 소유자였지만 스스로도 지하실이라 불렀던 자신의 저음을 강점으로 삼았다. 그 저음 위에 멀티트랙으로 경쾌한 고음 하모니를 화음으로 입혀 곡의 풍성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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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카펜터스의 인기는 연이은 후속곡 'Top Of The World'로 두 번째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마블 레츠의 곡을 리메이크한 'Please Mr. Postman'을 불러 세 번째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는 기록도 세우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카펜터스가 활동하는 동안 빌보드 싱글차트에 세곡을 1위에 올렸고, 같은 차트에서 모두 10곡이 Top10에 기록했으며 15곡을 어덜트 컨템퍼러리 차트 1위에 올렸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카펜터스의 인기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1979년부터 프로듀스 필 라몬(Phil Ramone)과 함께 작업한 카렌은 1980년에 솔로 데뷔앨범 '카렌 카펜터'를 발표하려했지만, A&M레코드 간부들의 결정으로 발매가 취소되면서 결국 생전에 발표되지 못한 채 1996년에야 비로소 유작으로 정식 출시됐다.

1980년 여름, 그녀는 사업가인 남편을 만나 비버리힐스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며, 새로운 앨범 'Made In America'에 수록될 예정이던 신곡 'Because We Are In Love'를 부르는 등 행복한 모습을 보였지만 1년도 안 되어 이혼절차에 들어가게 된다. 이혼을 전후로 카렌은 약물 과다복용과 거식증에 기인한 심장마비로 1983년 2월 4일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보컬이었던 카렌의 사망 이후 카펜터스는 자연스레 해체되고 말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그해 가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카렌의 이름이 올랐다. 폴 메카트니는 그녀를 일러 "지구상 최고의 여성보컬"이라 평했으며, 같은 시기에 활동하며 카펜터스를 비난하였던 많은 록 그룹들이 1990년에 접어들며 "사실 겉으로는 욕했지만 우리는 카펜터스의 열성팬이었다"는 속내를 털어내 웃지 못할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9년 데뷔 40주년을 맞아 카펜터스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면서 리처드 카펜터가 직접 참여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됐으며, 일본의 방송사는 카펜터스 특집 TV, 라디오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리처드를 특별출연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유니버셜 뮤직은 카펜터스 데뷔 40주년 기념으로 그들의 명곡 40곡을 수록한 베스트앨범 '40/40'을 발매하였다.

카펜터스 노래를 좋아했던 중년의 남자가 전해준 백 달러 지폐를 눈에 띄는 자리에 걸어 놓으며, 약속의 증표가 그들 부부에게 꼭 전달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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