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산] (11) 산청군
산청에 얽힌 산 이야기(꽃봉산·내산·적벽산·백마산)

산청 산의 제일은 단연 지리산이다.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천왕봉(1915m)이 산청군 시천면에 속한다. 하루 만에 천왕봉을 다녀오려는 이들은 시천면 중산리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지리산 서북방향 끝자락인 웅석봉(熊石峰·1099m)과 왕산(王山·923m)은 산청군 중심 산청읍 바로 곁까지 다가와 있다. 지리산이야 사시사철 사람이 많지만, 산청에서도 유독 매년 5월이면 인파가 끊이지 않는 산이 있다. 산등성이를 철쭉으로 단장한 황매산(1108m )이다. 지리산을 빼면 이 황매산 산군(山群)이야말로 산청 산의 핵심이다. 경호강(남강)을 경계로 서쪽은 지리산이, 동쪽은 황매산이 우두머리를 차지한다고 보면 된다.

◇멋지다, 꽃봉산 전망대

1700년대까지 산청(山淸)의 이름은 산음(山陰)이었다. 산음이 산청이 된 사연은 앞서 함양 편에서 한 적이 있다. 영조 43년(1767년) 산음 고을에서 7살 된 아이가 아기를 낳았는데, 왕이 이를 불길하게 생각해 음 자를 청자로 고쳐 산청으로 했다는 이야기다. <광여도>나 <해동지도> 같은 지도에는 산음으로, <1872년 지방지도>에서는 산청으로 돼 있다.

꽃봉산 전망대에서 내려본 산청읍 전경. 꽃봉산 아래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옛 지도는 주로 황매산에서부터 시작해 산청 산맥을 그려내고 있다. 황매산에서 이어지는 정수산(淨水山·830m) 줄기가 산청 고을을 감싼다. 고을의 중심을 이루는 읍치(邑治)는 오늘날 산청읍 옥산리, 산청리 일대다.

조선시대 산청 고을의 진산(鎭山·나라에서 지정한 고을을 수호하는 산)은 읍치 동남쪽에 있는 동산(東山)이다. 오늘날 꽃봉산(236m)을 포함한 옥산리 산 일대로 추정된다. 꽃봉산은 따로 화봉산, 화점산, 삼봉이라고도 불렸다. 함양 덕유산에서부터 지맥이 이어진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 <대동여지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동산에서부터 산줄기를 거꾸로 따라가다 보면 결국 덕유산에 가 닿는다.

꽃봉산 오르는 숲길 신록이 눈부시다.

꽃봉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하지만, 옛 진산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정상에 오르면 탄성이 나올 만큼 산청읍 일대가 시원하게 보인다.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달리다 산청읍 주변을 지나다 보면 꽃봉산 정상에 환하게 조명을 한 누각을 볼 수 있다. 꽃봉산 전망대다. 이곳에서 산청읍은 물론 경호강과 그 주변을 둘러싼 명산을 두루 볼 수 있다. 남쪽으로는 강변으로 경지 정리가 잘 된 농지와 그 너머 웅석봉이 우뚝하다. 서남쪽으로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것으로 알려진 돌 무덤이 있는 왕산과 필봉산(858m)이 뾰족하다. 특히 해 질 녘 필봉산 뒤편으로 넘어가던 해가 비스듬히 햇살을 산청읍내로 비추는 모습은 장관이다. 북쪽으로는 고을을 휘감아 도는 경호강의 흐름이 선명하다. 동쪽으로 황매산이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지맥이 첩첩이 고을을 향해있는 게 잘 보인다.

◇적벽에 배를 띄우고, 백마를 바라보다

오늘날 산청군 단성면, 신등면, 신안면, 생비량면 일대는 조선시대 산청과 별도로 '단성'이란 고을이었다. 더러 산청과 합쳐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에 있었다.

고려말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숨겨와 우리 의생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문익점(1329~1398). 그가 장인 정재익에게 목화씨를 처음 키우게 한 곳이 단성 고을, 정확하게는 지금 단성면 사월리다. 현재 문익점 면화시배지 유적이 남아 있다.

경호강에서 바라본 백마산.

단성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내산(來山)이다. 지금 단성초교 뒷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야트막하고 그리 볼품이 없어 그런지 지금은 별다른 이름이 붙어 있지 않다. 단성초교 자리가 바로 옛 단성 고을 읍치에서도 중심이었다. 옛 문헌은 내산이 저 멀리 지리산에서부터 지맥을 끌어온다고 기록했다. 앞서 산청 고을에는 덕유산 정기가 이어진다고 했다. 단성 고을은 지리산 정기가 맺히는 곳이니 결국, 지금 산청은 지리산과 덕유산의 정기를 모두 받아 안는 지역이라고 하겠다.

대부분 옛 지도에서 읍치 동쪽 경호강(남강) 건너에 '적벽(赤壁)'과 '백마산(白馬山)'을 표시하고 있다. 지금 지명으로도 적벽산(166m)과 백마산(286m)이다. 적벽은 강변으로 붉은 바위 더미가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것 같아 붙은 이름이다. 사실 중국에 있는 적벽이란 지명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중국 적벽에서 놀며 <적벽부>를 지었다.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선비도 이를 따라하며 경호강에다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한다. 심지어 적벽산 바로 앞 경호강을 적벽강이라고도 불렀다. 그야말로 조선시대 선비의 명소가 되겠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주자학 대가인 우암 송시열이 바위에 새긴 '赤壁'이란 글자가 아직 남아 있다. 글자가 제법 크다 해도 절벽이 워낙 넓어 쉽게 보이지는 않는다.

적벽산에서 경호강 상류 방향으로 바로 이어져 있는 산이 백마산이다. 정상에 삼국시대 지은 산성이 있다. 그래서 강산성(江山城), 단성산성(丹城山城)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가 심리전으로 왜적을 물리친 곳이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면서 남해의 전세를 살피는 길에 이 산에 오르기도 했다.

◇산을 만들다, 조산(造山)

옛 산청 고을 지도 중 <해동지도>에는 읍치 남쪽으로 '조산(造山)'이란 산 이름이 나온다. 조산은 그야말로 산을 만드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산 문화의 독특한 부분이다. 주로 겨울의 찬 바람을 막거나, 흉한 모습을 가리거나, 풍수적으로 부족한 게 있으면 보충하려고 조산을 만든다. 산청 읍치에 있는 조산은 풍수적으로 허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만든 것이다. 현재 산청군청 뒤로 이어진 조산공원이 옛 지도에 나오는 조산이다.

산 정기가 빠져 나가지 않게 하고자 쌓은 산청읍 내수마을 입구 돌탑.

산이라 할 수는 없지만, 조산 개념으로 만든 것이 또 있다. 산청읍 내수마을 입구에 있는 돌탑 두 개다. 마을 입구 도로 양편으로 한 개씩 세워져 있다. 주민은 이를 할머니, 할아버지 당산이라고 부른다. 이 돌탑은 마을 입구를 막아 산줄기를 타고 마을로 내려온 정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려고 세운 것이다. 하지만, 마을 주민은 그저 좋은 일 생기라고 비는 곳,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예전에는 섣달 그믐 새벽에 당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월 대보름 새벽 5시에 지내고 있다고 한다. 내수마을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이 정수산이다. 옛 지도에는 척지산(尺旨山)이라 돼 있다. 이 산 속에 '개구리골'이라는 동굴 피난처가 있다. 공조판서를 지내던 달성 서 씨가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에 숨어들었다가 정착해 지금 내수마을을 이뤘다고 전한다.

[참고 문헌]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국토지리정보원, 2011)

<산천독법>(최원석, 한길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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