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산] (7) 창녕
동편 남북으로 뻗은 산줄기
서편 내려다보는 듯 웅장해
들판에 놓인 아담한 산들
신령처럼 영험하게 여겨져

위성지도를 보면 창녕은 명확하게 동서로 나뉜다. 동쪽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산맥이다. 서쪽은 창녕을 서남쪽으로 에도는 낙동강을 향해 부챗살처럼 펼쳐진 들판이다. 산과 들판의 경계가 선명해 칼로 잘라 놓은 것 같다.

동쪽산은 장수처럼 우뚝해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중부내륙고속도로나 5번 국도를 따라가면 그 웅장한 위세가 실감난다. 능선이다 싶으면 곧 아찔한 암벽이고, 암벽이다 싶으면 다시 능선이다. 산악인들은 이를 ‘화왕지맥’이라 부른다. 이 지맥을 거느린 것이 창녕을 대표하는 화왕산이다.

조선시대까지 창녕지역은 남북으로 독립된 두개의 고을이 있었다. 창녕현과 영산현이다. 창녕현은 창녕읍, 고암면, 대지면, 대합면, 이방면, 유어면을 포함하며 고을의 중심인 읍치(邑治)는 창녕읍 교상리, 말흘리 일대였다. 영산현은 남지읍 남부, 영산면, 계성면, 도천면, 길곡면, 부곡면, 장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산면 읍내리, 성내리 일대였다.

◇옛 지도로 본 창녕산 = 창녕현의 진산(鎭山·고을을 수호하는 산)은 화왕산(火旺山·756m)이다.

<1872년 지방지도>에 그려진 화왕산은 지나치게 기골이 장대하다. 고을의 진산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웅장하게 그린 것이다. 지도에는 화왕산성과 성문, 용담이란 연못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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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 정상 표석./유은상 기자

예로부터 화왕산을 상징하는 것은 불이었다. 화왕산성이 둘러싼 억새평원은 화산 분화구였다. 하여 화왕산은 불구덩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셈이다.

풍수에서도 화왕산을 불이 타오르는 모습이라 해 화산(火山·뾰족한 산)으로 해석한다. 그래서일까. <1872년 지방지도> 의 화왕산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인다.

신라시대에는 창녕 지역을 비사벌로 불렀는데, 이는 우리말 빛에서 나온 말이다. 비사벌은 한자로 화왕(火王)이라 적었다. 그야말로 불구덩이 산이다. 화왕(火王)을 언제부터 화왕(火旺)으로 적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설에는 19세기 이후 일제강점기에 왕(王)자를 쓰지 못하게 하면서 화왕산의 임금 왕(王)자를 성할 왕(旺)자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1750년에 제작한 <해동지도>에도 화왕산 (火旺山)으로 적혀 있어 정확한 근거는 아닌 것 같다.

화왕산 옆 관룡사가 있는 산은 대이산(大耳山)으로 돼 있는데, 오늘날 관룡산(觀龍山·754m)을 말한다. 19세기 전반에 만든 <광여도>는 화왕산을 대왕산(大旺山)이라 적고, 화왕산성을 고성(古城)이라고 표현했다. 또 <해동지도>는 관룡산을 구룡산(九龍山)으로 적어 다른 지도와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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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 드라마 <허준>세트장./유은상 기자

◇옛 지도로 본 영산산 = 영산현의 진산은 영취산(靈鷲山·681m)이다. 사람들에게는 영축산으로 불린다. 영축산의 옛 이름은 취산(鷲山) 즉 ‘수리 뫼(독수리 산)’다. 이는 고대인이 높고 신령스러운 산에 주로 붙이던 이름이다. 이후 불교가 전해지면서 취산이 영취산으로 바뀐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서역 승려 지공(指空)이 이 산이 천축(天竺·인도)의 영취산과 모양이 같다 해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라고 적혀 있다. 영취산(혹 은 영축산)은 부처가 마지막으로 죽을 때 까지 설법을 했다는 산이다. 설법하던 장소를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고 한다. 영산현의 ‘영산’도 여기서 비롯한 듯하다.

여러 조선지도가 읍치를 사이에 두고 영취산과 마주한 작약산(芍藥山)을 그려 놓았다. 오늘날 함박산(500m)이다. 지도에서는 멀리 떨어뜨려 놓았지만, 사실 영취산과 이어진 한 줄기다.

함박산의 옛 이름은 ‘크게 밝은 뫼’다. 산봉우리가 마치 해나 달처럼 둥글게 잘 생긴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여기서 ‘한밝 뫼’로, 다시 함박산으로 변한 것으로보인다. 한자로는 한밝과 음이 비슷한 함박꽃 작(芍)을 써서 작약산이라 옮겨 적은 듯 하다. 요즘에는 산에 함박꽃이 많다고 함박산이라 부른다는 말도 있다.

함박산 중턱에 있는 약수터는 위장병에 좋다 하여 예로부터 이름이 나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영산 약천(藥泉)’이라 하여 신라시대 효성 지극한 나무꾼이이 약수로 어머니 위장병을 낫게 했다는 전설이 적혀 있다.

영산 사람은 고을을 둘러싼 영축산과 함박산을 모두 신령스럽게 대했다. 영취산 정상에는 북악기우단(北嶽祈雨壇)을, 작약산 정상에는 남악기우단(南嶽祈雨 壇)을 만들어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는 옛 기록이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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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바위에서 본 화왕지맥./유은상 기자

◇태백산과 구룡산 = 창녕의 산세가 주로 동쪽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서쪽에도 유래가 깊은 산이 제법 있다. 대표적으로 대합면에 있는 태백산(太白山·285m)과 이방면에 있는 구룡산(九龍山·209m)을 살펴보자.

태백산은 벌판 한가운데 우뚝한 대합면 의 주산이다. 중턱에 삼국시대 고분이 있다. 옛 이름은 합산(合山).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해동지도>를 빼곤 대부분 태백산이나 태백산 봉수로 기록했다. 태백산이란 이름은 함박산과 같은 ‘한밝뫼’에서 나왔는데, 대합면 사람들이 산을 신령스럽게 생각하고 민족의 영산과 같은 이름을 붙인 게 아닌가 추정한다.

구룡산은 대합면과 이방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이름에서 보듯 용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까마득한 옛날, 이 산에서 10마리 용이 승천하려고 3000년간 수련을 했는데, 이 중 9마리(九龍)가 무사히 여의주를 얻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어쨌거나 용이 9마리나 승천한 산이라 그 기운이 남달랐나 보다. 이 산의 정기를 받은 주변 고을에 진사(進士)가 9명이 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왜병이 이 산에서 큰 장수가 태어날 것이라 하여 산허리 혈을 끊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왜병이 이 산에 훈련소를 지어 태백산에서 구룡산으로 연결되는 기운을 끊으려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하지만, 10마리 용 중 한 마리는 아직도 이 산을 떠돌며 승천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이 용이 여의주를 얻는날이 땅에 큰 인물이 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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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바위 웅덩이./유은상 기자

[참고문헌]

-창녕이야기(www.cng.go.kr/tour/community/00001380.web)

-<창녕의 설화>(창녕문화원, 2016)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국토지리정보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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