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산] (4) 통영
구불구불 뱀 모양 사량도 통영 맨 서쪽 해역에 위치
섬 대표적 지위 '지리산' 398m·날카로운 바위
능선 앞으로 쏟아질 듯한 스릴

통영 사량도는 그 자체로 훌륭한 섬이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지리산(지리망산) 덕분이다.

지리산 명성은 '한국 100대 명산', '통영 8경', '매년 40만 명이 찾는 섬' 등의 수식어에서 대략 살필 수 있다.

고작 400m밖에 되지 않는 산이 사람을 불러 모으는 매력은 무엇일까.

기암괴석의 절경, 시원한 바다 전망, 짜릿한 산행의 묘미, 섬으로 떠나는 낭만, 하루면 적당한 일정, 산과 섬에 서린 역사와 전설 등 많은 조건과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백문이불여일견', 직접 올라 몸소 느껴야만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뱀 같은 해협이 흐르는 사량도 = 사량도는 통영시의 가장 서쪽 해역에 있는 섬으로 동강(桐江)이라는 1.5㎞의 잔잔한 해협을 사이에 두고 상도와 하도가 나란히 누워 있다. 모두 927가구 158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섬에는 패총이 발견된 것에서 미뤄보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풍에도 안전한 정박 여건과 영남과 호남을 잇는 수로에 위치한 까닭에 고려 때부터 수군이 주둔했다. 고려 말에는 왜구를 막고자 최영 장군이,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머무른 흔적과 기록도 남아 있다.

사량도의 옛 이름은 '박도'였지만 조선 초기 '사량'으로 바뀌어 쓰인다.

'사량'은 동강 물길이 뱀처럼 가늘고 구불구불하게 생겼다고 해서 뱀 사(蛇)에 해협을 뜻하는 들보 량(粱)을 사용해 불렀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밖에도 섬에 뱀이 많아서, 뱀처럼 생겨서, 옥녀봉 애절한 전설에서 '사랑(愛)'이 '사량'으로 바뀌었다는 설 등이 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상상 그 이상을 선사하는 지리산 = 상도에 있는 지리산(398m)은 육지 지리산(智異山) 명성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섬 중앙에는 더 높은 달바위봉(불모산·400m)이 있지만 지리산은 이를 제치고 사량도 대표 산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 이름 또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애초 지리산은 돈지(敦池)마을과 내지(內池)마을 중간에 있어 지리산(池里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외지 사람은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 해서 '지리망산(智異望山)'으로 바꿨고, 결국 최근에는 육지의 산과 한자까지 똑같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부르고 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사량도 지리산 바위 능선. /유은상 기자

산행은 돈지에서 시작해 지리산∼달바위∼가마봉∼옥녀봉∼면사무소로 이어지는 8㎞, 4시간 코스가 대표적이다.

숲길을 30분가량 올라 능선에 서면 하늘이 열리고 바다 전망이 펼쳐진다. 돈지항과 남해 창선도, 삼천포 화력발전소, 고성 상족암, 통영 오비도, 하도 등의 풍경이 고개를 돌리는 방향에 따라 순서대로 연속 촬영돼 머릿속에 각인된다. 지리산 정상에서는 멀리 눈 쌓인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높지 않다고 만만하게 보거나 풍경에 매료돼 경계심을 풀어서는 안 된다. 달바위를 거쳐 옥녀봉에 이르는 길은 또 다르다.

공룡 등뼈처럼 뾰족뾰족 일어선 바위능선은 네발로 기어서 오르내릴 수밖에 없다. 또 좌우로 날카로운 직벽 위를 걷자면 천길 바다 위에서 작두를 타는 듯 등골이 오싹하고 오금이 저린다. 밧줄을 잡고 내려서는 구간과 앞으로 쏟아질 듯한 경사진 계단을 몇 번 오르내리자면 마치 유격 훈련을 받는 느낌도 든다.

최근에는 출렁다리, 덱, 철계단, 로프, 우회 등산로가 만들어져 한결 수월해졌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면사무소∼옥녀봉의 2시간 코스도 괜찮다.

◇슬픈 전설 서린 옥녀봉 = 절경을 자랑하는 옥녀봉에는 슬픈 전설이 얽혀 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여읜 옥녀는 이웃 홀아비의 보살핌으로 자란다.

하지만 옥녀가 어여쁜 처녀로 성장하자 의붓아버지 눈에는 여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옥녀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옥녀는 뒷날 새벽 상복에 멍석을 쓰고 송아지 울음소리를 내면서 기어서 산에 올라오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설마 그럴까 싶어 꺼낸 이야기였다.

그러나 의붓아버지는 뒷날 산에 올랐고 그 모습을 보고 절망한 옥녀는 천륜을 지키고자 천 길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진다.

지금도 옥녀봉 밑 붉은 이끼는 옥녀의 피라고 전해진다. 이후 이곳 사람들은 옥녀봉이 보이는 곳에서는 신랑 신부 맞절을 하지 않았다. 신부가 가마를 타고 가다가도 옥녀봉 아래서는 걸어서 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20.jpg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