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을 18개월 세계일주로, 배운 걸 이젠 실천해야죠"

거창은 군 단위 시골 지역이지만 사회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그런 만큼 나름대로 '뜻'을 세우고 거창에 들어온 이도 많다. 특히 최근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와 교도소 반대 집회를 취재하면서 거창이 굉장히 역동적인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거창에 '특별한 부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듣기로는 신혼여행을 1년간 갔으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아가씨, 커피에 심취했던 청년

12월 2일은 마침 거창군청 앞에서 '정청래와 함께 하는 박근혜 퇴진 촉구 시국집회'가 예고돼 있었다.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거창읍내가 부산해 보였다. 전효민(32)·장무궁(34)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아이스크림 가게 '뿌에블로'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게에 들어서자 젊은 부부가 기자를 맞았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인상이었다.

우선 두 사람의 인생 궤적부터 간단히 정리해봤다. 부인 전효민 씨는 부산에서 태어나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진주에 온 뒤 진주에서 살다 대구에서 대학을 나와 2008년부터 지금까지, 9년째 거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편 장무궁 씨는 거창 출신으로 대학까지 거창에서 나온 토박이다. 거창을 벗어난 적은 20대 초반 해군에서 근무할 때뿐이라고 한다. 부인은 사회복지학과, 남편은 전자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뚜렷한 접점은 없어 보였다. 어린 시절 어땠는지 부부에게 물어봤다.

123.jpg
▲ 18개월 간의 신혼여행을 떠난 전효민·장무궁 부부. 쿠바에서.

장무궁: 저는 내성적이고 화도 잘 안 내는 편이었어요. 저 스스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착한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컴퓨터실 열쇠를 저에게 맡길 정도니까요. 착해 보였나 봅니다. 컴퓨터실을 관리하면서 게임도 하고 컴퓨터와 친해졌습니다. 그 덕분에 고등학교 때부터 컴퓨터 가게에서 AS 아르바이트도 하고, 대학 등록금도 제가 받은 실습비로 댔으니 생활력도 약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효민: 저희 아버지는 현재 경남협동조합협의회 이사장(전점석)으로 계십니다. 제가 어릴 때는 진주YMCA사무총장을 하셨습니다. 아버지 주변에서 어른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란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진주에서 뵀던 분 가운데 여기 거창에서 저를 알아보시는 분이 제법 됩니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나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고민하니 부모님이 '사회복지학과에 가면 그와 관련된 것을 배운다'고 하셨습니다. 주저 없이 경북대 사회복지학과로 갔습니다. 사실 부모님이 시민단체 활동을 하시니 집이 넉넉하지 않아 '서울대, 연고대 아니면 지방국립대'로 일찌감치 가이드라인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경북대를 나오셨고 저보다 4살 많은 오빠가 경북대 신방과를 다니고 있어서 경북대학교를 갔습니다.

Q. 대학 때 인생이 많이 갈리는데, 두 분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장무궁: 저는 군대에서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가야 할 군대라면 재정적으로 독립하고 싶어서 하사관으로 임관했습니다. 한데 군대에서 겪어보니 계급 간의 격차나 권위의식이 너무 큰 겁니다. 저는 그렇게 못 살겠더라고요. 힘이나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배우거나 못 배운 사람 모두 격의 없이 편하게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화이트칼라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차라리 장사를 해보자, 장사를 하면 사람들을 고루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07년에 커피 트럭을 인수해서 노점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커피 트럭이 별로 없을 땝니다. 커피 트럭을 하면서 사람을 마주하면서 느낀 따뜻한 감정이 좋았습니다. '아, 내가 커피 장사를 계속해야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기계를 사서 커피를 볶아보기도 하고 2007년 겨울부터는 서울에 가서 물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커피 선생님에게 커피를 배웠습니다. 서울 압구정에 있는 허영만 선생 커피 가게에서 기초를 배웠고, 기술을 가르쳐 주신 분은 '로스팅 마스터즈' 대표로 계신 분에게서 배웠습니다.

Q. 저는 커피를 거의 못 마시는데, 지금 커피가 굉장히 다양하지 않습니까? 이게 잘 된 건가요?

장무궁: 지금은 커피가 너무 고급화·다양화 되어 트렌드가 빨리 바뀌고 있는데, 거기에 사람들이 지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전의 저는 그 흐름에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09년부터 커피 가게를 차렸는데 비싼 고급 커피도 팔았습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제가 특별히 커피를 매우 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거부감 없는 편안한 커피 한 잔을 사람들에게 드리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운 커피 모토가 '소박하지만 힘이 있는 커피, 마지막 한 모금까지 편안한 커피,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사람살이가 있는 커피'입니다.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사람들이 편안하게 마실 수 있는 커피를 팔고 싶습니다.

Q. 제 느낌에 전효민 씨는 대학에서도 일관성 있게 나가신 것 같습니다.

전효민: 경북대 사회복지학과 슬로건이 '민중승리 사회복지학과'입니다. 저희 학과는 한 학년에 34명밖에 안 되는 작은 학과입니다. 작으니 분위기도 좋고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선배들 덕분에 좋은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예를 들면 방학 때마다 전국에 있는 사회복지학과 대학생들이 만나는 큰 모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이 현장도 들여다보고 현장에서 일하시는 선생님들도 보면서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때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대가'라는 분을 많이 뵀습니다. 사회복지사무소 '구슬'을 운영하시는 김세진 선생님, '웰펌'을 운영하는 표경흠 같은 분들입니다. 각지를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히 시골생활에 동경이 생겼습니다. 저희 집안 식구 중에 시골과 관련된 분이 한 분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2007년부터 부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시골로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은 엄청 놀라시는 겁니다. 그래서 1년 동안 부모님과 저 사이에 지난한 토론이 시작됩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결국 부모님이 반 포기 상태로 '그럼 가더라도 나는 경남 사람들에게 빚이 있다. 경남에 있는 시골에 가라'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저는 군 지역 중에서도 농촌 사회활동이 잘 된 거창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게다가 제 오빠가 거창고 출신이라 어릴 때도 몇 번 와봤고, 대학 선배들도 몇 분이 거창에서 활동하고 계셨고 대학 시절에도 경험이 있어 졸업하자마자 2008년 거창YMCA 간사로 왔습니다.

258.jpg
▲ 18개월 간의 신혼여행을 떠난 전효민·장무궁 부부. 이태리에서.

부부의 시야를 넓혀준 18개월 신혼여행

사실 두 사람 모두 거창군 안에서도 거창읍에 터전을 잡고 있었고, 범상치 않았기 때문에 결국엔 서로를 알게 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했다.

장무궁: 2008년에 이런 저런 일들을 거들다가 거창국제연극제에 커피 만드는 부스를 만들게 됐습니다. 그 부스에서 손님으로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사실 당시만 하더라도 거창에서는 커피 마실 만한 곳이 없었고 제가 하던 커피 공방이 있었는데 연극제 때문에 안 하게 된 거죠.

전효민: 그래서 저는 민원(?)을 하러 간 겁니다. 왜 공방 문을 안 열어요? 그러니 남편이 명함 한 장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그 명함을 들고 YMCA에 가서 이런 일이 있어서 이런 남자에게 명함을 받았다고 하니까 주변 평이 좋은 겁니다. 어쨌든 첫 만남은 그러고는 끝이었습니다. 그러다 길을 가는데 남편이 간판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인사를 잘 하는 편입니다. '안녕하세요? 지금 뭐하세요?'라고 물으니 '네, 저기 커피 가게 준비하고 있으니 놀러 오세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개업도 안 한 가게에 커피를 마시러 주 5일, 2주일을 가니까 그제서야 말을 걸더라고요.

Q.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전효민: 2014년 3월 1일에 했습니다. 마산·창원 지역은 바닷가라서 음력 2월에는 거의 결혼을 안 합니다. 그래서 결혼식장을 전세 낸 것처럼 결혼했습니다.

Q. 듣기로 신혼여행을 근 1년간 가셨다는데 처음부터 계획된 것인가요?

장무궁: 결혼 전에 처가 해보고 싶은 것을 말하는데 세계일주도 해보고 싶다고 흘리는 겁니다. 또 신혼여행을 좀 길게 가야겠다고 생각한 게 당시 커피 가게에 매너리즘이 생겨 접을 생각이었습니다. 기왕 가게 접고 가는 거 여유 있게 다녀오자 싶어서 스케쥴을 짜다 보니 점점 길어지면서 1년이 넘더라고요.

전효민: 부모님께는 1년 정도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일정이 안 맞을 때면 현지에서 틈틈이 스케쥴을 변경했습니다. 큰 틀은 한국을 기점으로 계속 서쪽으로 가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18개월 동안 40개국을 돌았습니다.

장무궁: 지금 저희 가게 이름이 '뿌에블로' 인데요. 이게 스페인어로 '시골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40개국을 돌아다녔는데 스페인어를 쓰는 곳이 매우 많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귀에는 스페인어가 친숙해져서 가게 이름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18개월 동안 돌아본 40개국 가운데 인상 깊은 곳을 몇 곳 추려 달라고 부탁했다.

456.jpg
▲ 뿌에블로 입구. /임종금 기자

전효민: 파키스탄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국제뉴스로 탈레반이니 테러집단과 관련된 나라로 알고 있는데, 저희가 보고 느낀 점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이 많은 나라입니다. 남자들끼리 서로 만날 때마다 팔을 벌려 안아 줍니다. 저 멀리서 이미 팔을 버리고 걸어 옵니다. 파키스탄에 보면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배경이 되는 '훈자'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려면 버스를 24시간 동안 타고 가야 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2~3시간마다 한 번씩 쉽니다. 그때 기사님이 '밥은 먹었냐', '차 한 잔 하시라'며 알뜰하게 챙겨주곤 합니다. 호의를 굉장히 많이 베푸는 나라입니다. '훈자'에서 묵었던 숙소에서 정산을 할 때는 주인이 셈을 하는 게 아니라, 거래내역서 같은 곳에 손님이 스스로 쓴 금액을 알아서 적고 셈을 해서 주는 곳입니다. 돈을 떼일 수도 있지만 파키스탄 사람들은 '다음에 언젠가 주겠지' 하면서 사람을 믿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장무궁: 스페인에 50일 정도 머물렀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이 '씨에스타(낮잠 시간)'이었습니다. 오후 2~4시에는 대형마트건 구멍가게건 모조리 문을 닫습니다. 돈 주고 사겠다고 해도 파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난처할 때도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게 소비자 중심이지만 스페인은 일하는 사람이 중심입니다. 일과 휴식의 밸런스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놀랐습니다. 저희가 가게를 낮 12시부터 저녁 8시까지만 엽니다. 그게 스페인 영향이 큽니다.

전효민: 쿠바도 인상 깊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라서 주거와 먹거리, 의료는 기본적으로 국가에서 보장해 줍니다. 그래서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고 사람들이 여유 있고 선합니다. 예를 들면 여행자니까 환전을 해야 하는데 환전꾼마다 환전액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자기 아닌 다른 환전꾼에게서 환전을 했다면 기분이 상해야 하는데, 환전금액을 물어보고 '잘했다. 축하한다'고 칭찬해 주는 겁니다. 쿠바에서 여행자 숙소를 '까사'라고 하는데 교수 월급 보다 까사 수입이 더 크다고 합니다. 인기 있는 까사라면 방을 늘이지 않고 다른 까사에 저희를 소개시켜서 보내주는 겁니다. 장삿속이 아니라는 거죠. 까사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도 의사입니다. 저희는 급여가 적어 의사나 교수에 대한 사명감이 약한 줄 알았는데 되레 사명감이 굉장히 강하더라고요. 지금 잠시 어려워서 까사를 하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병원에서 사람을 돌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부는 많은 것을 느끼고 2015년 10월 초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정확히 따져보면 19개월 만에 한국에 온 셈이었다.

789.jpg
▲ 전효민 장무궁 부부./임종금 기자

"믿을 만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앞서 얘기했듯이 부부는 지금 '뿌에블로'라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고 있다. 신혼여행과 관련이 있을 듯싶었다.

장무궁: 여행을 다니면서 아이스크림을 많이 사 먹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굉장히 맛있는 겁니다. 점점 느끼는 게 '지금까지 내가 한국에서 뭘 먹었던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화 충격이었습니다. 아이스크림으로 이런 맛도 낼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솔직히 말해 설탕 같은 이런 저런 첨가물 덩어리를 먹는 겁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젤라또를 먹었을 때의 충격은 잊지 못할 겁니다.

전효민: 과일이 60%에 이르고 전부 가공되지 않은 과일을 씁니다. 딸기향이 나는 딸기 아이스크림과 정말 딸기를 넣어 만든 아이스크림은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내츄럴 젤라또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자. 그때 생각한 것이 우리 거창에 농민들이 농사를 많이 지으시지 않습니까? 과일을 거창 것으로 하면 되겠네 싶은 겁니다. 아는 분에게 과일을 받아서 아이스크림을 만들면 그게 바로 로컬푸드 아닙니까? 저희는 그런 개념으로 시작했습니다.

Q. 아무래도 맛은 남다르겠지만 그래도 설탕에 길들여진 습관이 있는데 반응이 괜찮은가요?

장무궁: 반응은 좋습니다. 커피로 치면 믹스 커피 먹다가 원두커피 먹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물론 아직 예전 커피 가게를 할 때만큼 매출은 나지 않고 있습니다만 커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 여기 또 있습니다. 다양한 과일을 토대로 메뉴를 제 나름으로 구성할 수 있는 겁니다. 사계절에 따라 나는 과일이 다르니 거기 맞춰서 내놓습니다. 겨울에는 장사가 잘 안되는데도 벌벌 떨면서도 아이스크림 먹으러 오는 손님이 있어서 가게 문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159.jpg
▲ 전효민 장무궁 부부./임종금 기자

Q. 혹시 내츄럴 젤라또 아이스크림 가게가 경남에 많이 있나요?

장무궁: 제가 알기로 경남에는 저희 한 곳입니다. 전국적으로도 10곳이 안 됩니다. 하지만 천천히 고객은 늘 거라고 봅니다. 외국에서 아이스크림 맛을 보신 분은 결국 저희 가게를 찾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Q. 그럼 제가 아이스크림을 사서 창원에 가서 먹을 수는 없나요?

장무궁: 그게 어렵습니다. 방부 처리가 안 된 천연재료라 바로 드셔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웃음)

Q. 혹시 어떤 모습으로 거창에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전효민: 저는 이웃들이 서로 친하고 더불어 살도록 주선하고 거드는 사람으로 계속 기억되고 싶습니다.

장무궁: 저는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앞으로도 먹거리 관련 일을 할 것 같습니다. 뭘 만들어 팔더라도 거창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믿을 만한 것을 판다'는 평을 듣고 싶습니다. 욕심을 더 내자면 제가 할아버지가 되더라도 '전국에서 이 음식은 이 어르신이 알아준다'는 소문이 나서 매니아들이 일부러 찾아오게 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따뜻한 부부였다. 이 부부와 함께 있으면 인상 쓸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기자는 인터뷰가 끝난 후 장무궁 씨가 내놓은 작은 아이스크림을 접대(?)받았다. 분명 공장 아이스크림과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일정이 급해 뭘 어떻게 만든 아이스크림인지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참으로 소박하고 부드럽고 편안한 맛이었다. 마치 아이스크림에 두 사람의 마음이 묻어있는 것 마냥.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