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계절 따라 변하는 자연현상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아련한 기억들이 무심코 뇌리를 스칠 때가 종종 있다. 특히 낙엽 떨어지는 요즘이 더 그런가 보다. 긴 생머리와 청바지, 청아한 목소리의 이미지를 지닌 청순한 여가수가 어느덧 노년의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요계를 떠난 지 어언 3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고운 소리는 예전의 박인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오래 만에 고국을 방문한 그녀는 팬들의 지나간 추억을 되살리는 콘서트를 개최하여,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 노래와 시낭송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던 시인과 그녀의 오누이설에 대한 오해를 말끔히 해소시키는 뒷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가수 박인희는 생애에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남아있는 박인환 시인이, 그동안 많은 대중들에게 오누이나 가까운 친척으로 알려진 부분에 대해 단호히 부정했다. 그러면서 시인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가 그냥 좋았고, 자신의 왕팬이었던 극작가 이진섭이 곡을 만들었기에 더욱 애착이 가는 노래였다고 한다. 가수 박인희를 대중들의 엄청난 인기와 유명세를 타게 했던 아름다운 노래 '세월이 가면'이 어느 허름한 선술집에서 시인의 즉흥으로 만들어 졌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읊은, 후기 모더니즘의 기수로 알려진 시인 박인환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에서 부친 박광선과 모친 함숙형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1939년 경기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41년에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

1948년 이정숙과 결혼하고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지금의 교보문고 뒤)에서 살았다. 시인은 <국제신보>에 시 '거리'(1946)를 발표해 등단하고, '남풍'(신천지, 1947. 7), '지하실'(민성, 1948. 3)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이후 <자유신문>과 <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하면서 김수영, 김경린, 양병식 등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합동시집(1949)을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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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가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가서 육군소속 종군 작가단에 참여해 종군기자로 활동하였다. 피난지인 부산에서 김규동, 이봉래 등과 모더니즘 시를 지향했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검은 강', '살아있는 것이 있다면', '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했다.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용모를 지닌 시인은, 몹시 쪼들리는 생활 속에서도 일류 양복점의 라벨이 붙은 외제 초콜릿색 싱글에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붉은 넥타이에 커피색양말, 검정색 박쥐우산을 들고 다녔다.

그는 월급의 대부분 옷을 장만하는 데 썼다. 계절에 맞추어 코트와 양복을 바꾸고 영국신사처럼 멋을 내며 명동을 돌아다니던 사람이 박인환이었다. 궁핍함을 드러내지 않으며 멋의 가면을 쓰고 명동을 누볐기에 '댄디', '명동백작', '명동신사'라는 별호가 항상 그를 따라 다녔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그의 이런 생활을 두고 겉멋이 들었다거나 가당치않은 허세라고 비난하였다.

전후 서울 명동을 배경으로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와 애환을 그린 '명동백작'이란 드라마가 2004년 EBS에서 방송되었다. 그 드라마에서 '명동샹송'이라 불리는 '세월이 가면'이 탄생하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56년 이른 봄 저녁 경상도 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처럼 부르지 않았다. 그때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를 넘겨다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목로주점과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러지고 있는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한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과 이봉구가 합석했다. 테너 임만섭이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부르자, 길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마른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 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으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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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환.

박인환이 죽기 3일 전인 3월 17일부터 천재시인 이상 추모의 밤 행사가 있었는데 이날부터 매일 술을 마셨다. 당시 경제적으로 많이 쪼들렸던 그는 끼니를 자주 걸렀는데, 빈속에 계속 술을 마신 것이 화근이 되어 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박인환의 가까운 선후배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그해 무덤 앞에 아담한 비석을 하나 세웠는데, 앞면에는 '시인 박인환 지 묘'라는 묘비명 아래에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세월이 가면'의 일부 구절인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를 새겼고, 뒷면에는 그의 짧은 행적을 적었다고 한다.

한편 노래 '세월이 가면'의 원곡을 알아보는데 가장 중요한 점인 첫 번째 음반녹음에 대하여 확실한 실물자료가 공개되지 않아 논란이 계속되었다. 처음 발표될 당시 테너 임만섭이나 배우 겸 가수인 나애심이 즉석에서 불렀다는 기록에 따라 나애심이 처음 녹음했다는 설도 있고, '신라의 달밤'으로 유명한 가수 현인이 처음 음반을 발표했다는 설도 있다. 현인의 경우 1959년에 '세월은 가고'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유성기 음반이 실제로 확인되면서, 지금까지는 현인 최초 녹음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인정되어 왔으나, 2015년에 그보다 시기가 훨씬 앞서는 나애심 유성기음반(신신레코드, 1956)이 발견되면서 그간의 논란에 대한 종지부를 찍었다.

나애심의 첫 음반 이후 여러 가수들이 각자의 스타일로 리메이크하였는데, 1959년 현인, 1968년 현미, 1972년 조용필, 1976년 박인희곡 등이 잘 알려져 있다. 1956년 6월 월간지에 실린 '세월이 가면'의 최초 악보는 6/8박자로 되어있으나, 나애심의 노래는 4/4박자로 되어있다. 기본적인 선율은 유사하지만 음표에 가사를 붙이는 방식이 훨씬 복잡하게 되어있어 최초 악보와는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반면 현인이후로 녹음된 곡들은 대체로 3박자로 편곡되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세월이 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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