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은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싶다"

마산을 사랑한 시인, 이광석

옛 마산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빠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원로 시인. 이광석(81) 시인이다. 예향 마산에서 마산의 문화예술인이 자긍심을 갖고 활동할 수 있도록 마산의 문화유산을 활용한 사업을 펼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최근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아트센터 마산예총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어깨, 무릎이 아파서 수술한 후 예전만큼은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여러 문화행사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마산문인협회, 경남문인협회 고문, 창원 '시의 거리' 추진위원, 창원문예부흥운동 추진 대표, 경남언론문화연구소 대표 등으로 활동 중이다.

시작(詩作) 활동도 멈추지 않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시인은 자신이 최근 쓴 시를 보여주기도 했다. '갈대'라는 시다.

가을이 속 깊으면/갈대가 운다/올해는 그 울음소리가 작다/내년에는 그 작은 소리도 가물거릴 것이다/제 소리를 내고도/그 소리 못 알아듣는 갈대는/참으로 외로운 짐승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외경심 등을 주제로 한 시를 주로 쓰고 있다고 했다. 무학산, 마산 바다 등 천혜의 자원이 있기에 마산에서 글을 쓰는 문인들이 많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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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석 시인. / 박일호 기자

60여 년 동안 써온 시

그는 언제부터 시를 썼을까. 의령에서 출생한 시인은 아버지가 일본 강제 징용으로 서너 살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 일본에서 지내다 광복 후에 마산으로 건너왔다. 1946년 마산 회원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하면서 마산과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국전쟁 후 마산상업학교(중·고교 6년제-현재 용마고)에 입학해서 졸업했다.

고3 때인 1956년 학생 중심 동인 <백치> 창립에 동참했다. 1957년 서울문리사범대학(현재 명지대) 국문과 입학했던 시인은 1∼2년 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중퇴를 하게 된다. 1958년 가곡 '산촌'(조두남 곡)의 노랫말을 짓기도 했던 그는 1959년 청마 유치환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고 밝혔다. 시를 쓴 시기를 등단을 기점으로 잡으면 무려 60년에 이른다. 1960년에는 <마산일보>(현재 <경남신문>)입사했고, 외교구락부에서 마산문학인협회 발족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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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석 시인. / 박일호 기자

1961년 마산문학인협회를 만들고 김춘수, 문덕수, 김세익, 김수돈, 정진업 시인 등이 활동하던 시절에 마산의 문학 인구는 10명 안팎에 불과했다고. 이들과 청년 학생들이 함께 문학 활동을 펼쳤다고 했다.

마산문인협회장(1980∼82년), 경남문인협회장(1983∼85년)을 지낸 시인은 경남신문 편집국장, 이사, 주필, 경남도보 편집실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글을 쓰는 일에 오랜 시간 관여했다.

60년 동안 시집, 산문집 등 10여 권을 냈다. 1974년 첫 시집 <겨울나무들>을 비롯해 겨울을 제목으로 한 시집을 잇달아 내놨다. 1980년 <겨울을 나는 흰 새>, 1987년 <겨울산행>이다. 이후 산문집 <향리에 내리는 첫눈>(1978년)을 냈고, 은퇴 후 창원 동읍에서 텃밭을 가꾸면서 지낸 10여 년의 세월을 시집으로 묶어내기도 했다. 1996년 <잡초가 어찌 낫을 두려워하랴>가 그렇게 나왔다. 1997년 <포켓 속의 작은 시집>을 냈고, 2000년대에 들어서 <삶, 그리고 버리기>(2006년), <바다 변주곡>(2010년), <달, 산문을 나서다>(2014년) 시집에서 자신의 시를 선보였다. 내년쯤 틈틈이 쓴 짧은 시를 모아서 새로운 시집을 낼 계획이다.

이광석 시인은 아직도 자신의 시를 '습작'이라며 좋은 시를 쓰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저는 아직도 제 시를 '습작'이라 하고 등단 60년을 넘긴 지금까지를 '습작기'라고 부릅니다. 오만도 겸손도 아닌 느낌 그대로예요. 더불어 '원로'라는 호칭도 부담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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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석 시인. / 박일호 기자

나만의 자유, 나만의 시 이바구, 나만의 문법

60년이라는 세월이면 1년에 15편 내외의 작품을 발표했다. 짧은 시작 노트 쓰는 일이 익숙할 법도 한데 여전히 쉽지 않은 작업이라고 했다. 지우개 달린 연필을 재킷 속에 넣어두고 완성한 시를 고치고 또 고친다고 했다. 시를 완성했더라도, 20∼30%는 쓰고 지우며 보완하는 작업을 꼭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하기에 연필과 지우개를 즐겨 사용한다고.

그는 자신만의 몇 가지 시론을 언급했다. 첫째, 이론적 잣대를 거부하고 기교에 억지로 매달리지 않으면서 '나만의 자유', '나만의 시 이바구', '나만의 문법'을 시적 성찰로 삼는다는 것. 둘째는 지나친 추상 비약은 삼간다는 것. 절제의 미학 면에서 떨어지더라도 담담한 산문체의 흐름을 유지하려고 한다고 했다. 셋째는 원고의 행간에 작은 감동 한 단어를 묻어둔다는 것. 언제 다시 꺼내 봐도 시적 여운이 울리는 시를 쓰고자 노력한다고.

뚜렷한 시론을 밝힌 시인이 스스로의 대표 시로 꼽은 시는 <바다변주곡> '들꽃이야기', '아버지의 지게', <잡초가 어찌 낫을 두려워하랴> '잡초 앞에서' 등이다. 잡초 앞에서를 들여다보면, 시인이 말한 시론이 읽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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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석 시인. / 박일호 기자

너는 언제나 태풍주의보가 내려진 막막한 바다였다./낫을 들면 성난 파도가 내 키를 넘어 발목까지 칙칙 감아 당겼다./무성한 잡초의 바다에 떠다니는 작은 뗏목 같은, 무기력한 낫 한 자루/차라리 너와 나 사이에 화해의 작은 섬 하나 만들고 싶었다./베어도 베어도 쓰러지지 않는 곧고 바른 당당한 是非 하나 키우고 싶었다./낫을 두려워하지 않는 잡초들 자존심 바다보다 깊다.

60년간 마산을 지키며 살아온 시인은 마산의 문화,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하는 작업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게 많습니다. 하지만, 마산 최초의 카니발, 백치 동인, 100회까지 이어진 시 낭송회 등 예사로 볼 수 있는 게 없어요. 최근에 마산 창동에 사랑방 '백랑'을 만들어 과거 문화 활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였다.

"마산을 얘기할 때 고운 최치원 선생을 빠트릴 수 없습니다. 그분이 마산에 와서 마산의 달 문화를 만든 주인공이에요. 그런 훌륭한 분을 모신 게 후학의 큰 자랑입니다. 선생을 위해 누각을 만들어 참배도 하고 글짓기도 했으면 합니다. 문향 마산의 상징성을 높일 수 있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삶의 상처를 치유하는 시 쓰고 싶다"

시인은 1990년부터 시비(詩碑)가 생기기 시작한 용마산 산호공원 '시의 거리'를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가고파', '고향의 봄', '귀천' 등의 시비를 매일 확인한다.

시인에게 시는 무엇일까.

"누구나 어려운 현실에 부닥치기 마련입니다. 젊은 시절의 사는 모습은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꿈을 가질 수 있게 한 것이 시예요. 헌책방에 들락날락하며 책은 안 사더라도, 눈치껏 서서 시, 소설을 읽으며 꿈을 키웠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나무하고, 조개를 캐면서 좌절하지 않고 꿈과 희망을 키운 것은 문학의 힘입니다."

앞으로 시인이 쓰고자 하는 시에 대해 물었다.

"삶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를 쓰고자 합니다. 삶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시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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