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가슴 뛰는 일이다"

우연한 계기로 마산YWCA에서 강의할 일이 생겼다. 그때 강사 신분으로 초청된 기자보다 더 열성적으로 웅변을 토해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박현주 마산YWCA 사무총장이었다. 젊음과 열정이 흘러넘치는 사람이었다. 특히 시민단체 사무총장은 40대 후반은 되어야 하는데 그는 너무 젊어 보였다. 강의를 마치고 며칠 후 박현주 사무총장을 찾았다.

가슴 뛰는 일 찾다 마산YWCA로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나이부터 물었다. 박현주 사무총장은 1975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치면 42살이다.

Q.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시민단체에서 이렇게 젊은 사무총장이 있나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국 YWCA 52개 지부 사무총장 가운데 제가 나이 어린 축에 드는 건 사실입니다."

Q. 고향은 어디인가요?

"저는 마산 토박이입니다. 마산 진동면 신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인근에 있는 우산초등학교, 삼진중학교를 나왔습니다. 3녀 1남이었고 그냥 평범하게 농사짓는 집안이었습니다."

보통 이런 큰 시민단체를 총괄하려면 상당히 꼼꼼하거나 어릴 때부터 남을 돕는데 희열을 느끼는 기질이 있어야 한다. 그의 성격은 어땠을까?

"어머니 말씀이 '손댈 것 없는 딸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지 앞가림을 알아서 한다고 말이죠. 돌이켜보면 제가 그렇게 살려고 좀 애를 쓴 것 같기도 합니다. 사춘기도 착하게 지냈습니다. 되게 성격이 밝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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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주 마산YWCA 사무총장. / 임종금 기자

Q. 혹시 '리더십' 이런 건 없었나요?

"참 이상한 게, 저는 나서는 걸 싫어합니다. 그런데 항상 학창시절에 보면 앞에 나가 있었습니다. 반장이 되거나 대장이 되거나 그랬습니다. 주어진 임무야 그냥 하면 되는데 속으로는 '나는 싫은데 왜 이러나' 싶었습니다. 솔직히 스트레스도 좀 받았습니다. 남들은 쉬는 시간에 쉬는데 저는 뭔가 해야 하니 말입니다. 사실 저는 혼자 조용히 책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Q. 중학교를 졸업하신 다음엔 어디로 가셨나요?

"고등학교는 경남여상을 나왔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여자는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 잘 가면 된다' 이런 생각이셨습니다. 고등학교는 참 재밌게 다녔습니다. 친구랑 만화방도 다니고 야간학습도 빼먹고 영화 보러 다니고. 고등학교 때 방송부에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직장 다니다 창원대 무역학과 나오고 창원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를 받고 지금 경남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Q. 직장은 어디를 다니셨나요?

"경남여상을 졸업하고 1993년 효성에 들어갔습니다. 사무직으로 갔습니다. 정말 주변에 남자 직원들이 잘해줬습니다. 성추행이나 성희롱 이런 건 상상도 못 하고 뭐랄까요, 사무실에 막내딸이 온 느낌이랄까요? 되게 잘 챙겨주시고. 제가 신승훈 노래 좋아한다고 하니까 회식하고 나서 대리님이나 과장님이 신승훈 노래를 외워오더라고요. 거기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지금도 연락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한 사람에 대한 예의, 어른을 대하는 법도 배우고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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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주 마산YWCA 사무총장. /임종금 기자

Q. 그럼 계속 효성에 계셨나요?

"다 좋은데, 가슴 뛰는 게 없었습니다. 제가 무슨 회의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 발전을 위해 안건을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죠. 1년 정도 지나니까 시스템이 다 눈에 보이는데 발전적인 게 없었죠. 그래서 창원대학교 무역학과 야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997년 IMF 외환위기 직전에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구조조정 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효성 정직원이니 평생 먹고 살 수는 있겠지만 여기 나와도 살아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지금 세상이 어떤데 미쳤다고 대기업을 그만두냐고 그랬죠."

Q. 효성을 그만둔 이후 뭘 하셨나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무역회사나 가려 했는데 솔직히 안 땡겼습니다. 저는 성격이 그렇습니다. 그냥 직관적입니다. 치밀하게 계산해서 움직이는 것보다 감으로 느낌이 오면 행동합니다. 그러다 마산YWCA와 카톨릭여성회관 공채가 떴습니다. 바로 느낌이 와서 마산YWCA에 지원을 했는데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이후 학원에서 논술을 가르치다가 다음 해 다시 마산YWCA 공채가 떴습니다. 보통 떨어진 데 또 원서 내기 그런데 또 냈습니다. 그래서 합격을 하고 2005년 4월 1일부터 출근을 했습니다."

이주민 자녀 전화에 가슴이 철렁

Q. 마산YWCA에서 처음 배속된 부서는 어디였나요?

"사회문제부라고 있습니다. 제가 초기에 한 거는 이장님들 만나서 폐비닐 수거하는 일을 하고, 소비자 문제 상담을 했습니다."

Q.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비닐 수거 사업은 이런 겁니다. 시골 논밭에서 폐비닐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농민들이 예전에는 그걸 다 불에 태웠습니다. 그래서 자원순환연대하고 공모사업을 따서 폐비닐을 버리거나 태우지 말고 모아만 놓으면 치워줄 뿐 아니라 비닐값도 주는 겁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설명해도 처음엔 마을 이장님들도 반신반의하죠. 그래서 몇몇 마을에 했더니 실제 60만 원, 100만 원 이런 식으로 마을기금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점점 이웃 마을로 비닐 수거 사업이 퍼지는 겁니다. 이렇게 진전면 마을로 점점 퍼져나가는 게 너무 즐거웠습니다. 소비자 상담은 이런 겁니다. 소비자들이 기업들에게 온갖 피해를 봅니다. 당시 어린 손주가 휴대폰 소액결제로 500만 원을 결제해 할머니가 자살하거나, 이상한 건강식품을 어르신이 사서 엄청난 금액의 고지서가 날아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 네비게이션이 아직 대중화되기 전에 수백만 원을 했는데 엉망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내용증명을 해 드리고 대신 싸워드리기도 하면서 피해를 줄여나가는 겁니다. 사실 기업들과 싸울 때는 욕도 많이 했습니다. 협박을 받기도 했고요. 하지만 하나라도 문제가 해결되고 변하는 것을 보이면 정말 행복했습니다. 진짜 보람되고 존재감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YWCA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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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주 마산YWCA 사무총장. / 임종금 기자

Q. 사회문제부 다음엔 무슨 업무를 하셨습니까?

"2006년에 비영리민간단체 공익사업으로 '올자란 교실'을 했습니다. 여름방학 동안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 아이들을 모아서 공부 빼고 다하는 겁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지역 공부방에서 경제캠프, 물총 놀이 이런 걸 했습니다. 2008년에 마산YWCA가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를 수탁받았습니다. 일종의 다문화센터를 맡은 겁니다."

Q. 지금 다문화가정을 얼마나 도와드리고 있나요?

"저희가 관리하는 분들은 총 1000세대 이상입니다. 이 가운데 직접 행사나 이런 데 참석하시는 분은 400~500명 정도 됩니다."

Q. 해보시니까 지역 다문화가정 상황이 어떤가요?

"결혼이민을 하는 사람은 이미 바탕에 어려움이 내포된 경우가 많습니다. 자랄 때 형제 중에서 후순위로 밀렸거나 어려움을 극복하기 힘든 사람이 결혼이민자와 결혼을 많이 합니다. 애초에 다문화가정이라서 문제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내재된 문제입니다. 보통 정착 초기에 많은 도움이 필요로 하고, 이후 직장에 다니다가 자녀가 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면 다시 찾아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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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문화 아동 외갓집 방문 지원사업으로 베트남 하노이 방문 당시 모습. / 박현주 씨 제공

Q. 다문화가정 중에서 생각나는 분이 있으신가요?

"어머니가 필리핀 출신이시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버린 가정이 있습니다. 두 아이가 방임된 상태로 있어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어머니는 정신이 혼미해서 일단 동서병원에 입원시켜 드리고 아이들은 보육원에 맡겼습니다. 1년 반 후에 다시 가정이 꾸려지긴 했지만 이 아이들에게 부모는 기댈 언덕이 못 되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고작 중학생이 호주(戶主)입니다. 그래서 위기가 오면 우리에게 기대는 겁니다. 전화가 안 오면 잘 있는 거고 전화가 오면 무슨 문제가 생긴 겁니다.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선생님 아랫배가 너무 아파요' 가슴이 철렁하죠. 택시 타고 병원에 가라고 하고 외출 준비를 하는데 '선생님 똥 누고 나니까 이젠 괜찮아졌어요' 하는 겁니다. 이 아이들과 5~6년 같이 하다 보니 이 아이들도 서서히 살아나고 있습니다. 중학생 때 제가 '수급권이라는 게 있다. 그걸 받아내라. 학원비를 준단다 받아와라. 컴퓨터도 준단다 받아오고 모르는 게 있으면 주사님께 물어봐라'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기반을 닦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늘 이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지금은 견디자, 나중에 한스럽고 속상한 것은 그때 가서 하고 지금은 우야든동 살아남자'고 합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버텨나가는 걸 보는 게 또 하나의 보람입니다. 이런 가정에게서 전화가 오면 불안합니다.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요."

Q. 다문화가정에 대한 거부감도 심한데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도와줘야 한다, 불쌍하다 이렇게 보면 안 됩니다. 그건 우리가 이 사람들보다 위에 있다는 시선이죠. 그게 아니라 호기심으로 봐야 합니다. '너는 어때? 너네는 어떤 것 먹어?' 이런 식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앞으로 가정이라는 큰 틀에서 구분 짓지 않고 일반 가정과 다문화 가정을 함께 다루고 싶습니다. 다른 점을 찾는 게 아니라 호기심으로 보면서 인정해줘야 합니다."

대통령의 빛이나 아프리카 어린 생명의 빛이나 다 똑같아

어쨌든 열혈 실무자의 과정을 거쳐 지금은 사무총장이 됐다. 사무총장이 되자 어떤 점이 달라졌을까?

"사무총장이 되니까 가슴이 안 뜁니다. 자리에 연연하기보다는 그냥 놓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 무엇이든 내가 기쁜 일 좋은 일을 찾아서 나를 거기에 놓아지도록 던질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실무자들은 피곤할 겁니다. 제가 꼬치꼬치 캐물어 가는 스타일이라서 말입니다."

Q. 마산YWCA는 회원이 얼마나 됩니까?

"후원회원이 1300명입니다. 재정도 힘들고 간사들도 줄어서 일이 많습니다. 활동회원이 많아야 하는데 우리가 하는 일을 잘 못 알린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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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주 마산YWCA 사무총장. / 임종금 기자

Q. 잘 못 알렸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우리 현대사회 기저에 있는 흐름,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읽지 못하고 눈앞에 놓여 있는 프로젝트에만 집중한 것 같습니다. 기자님 불러서 근현대사 강의 같은 것도 듣게 한 게 바로 그런 차원입니다. 덧붙여 우리 스스로 우리를 알고 전투력을 확보하고 가슴이 뛰는 일, 심장이 두근두근하게 하는 일을 찾아가려 합니다."

Q. 경남대서 박사과정을 하고 계신데 어떤 것을 연구하고 계시나요?

"2가지 아이템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복지사에 대한 겁니다. 저는 사회복지사도 권력이라 생각합니다. 저소득층에 자금 배분율 이런 것도 사회복지사가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복지사가 스스로 '내가 시혜를 베풀어준다' 이런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사회복지사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직업입니다. 과연 스스로 객관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지, 사람 대 사람으로 상대를 소중하게 대하는지 성찰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소수자, 결혼이민자, 외국인, 동성애, 장애인 이런 분들을 인간 그대로 존중해 주는 문화가 서구에는 잘 구축돼 있습니다. 이런 걸 어떻게 우리 사회에서도 구축시킬 수 있을까? 어떤 정책과 시선, 이데올로기가 뒷받침돼야 우리도 서구처럼 가능할지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평소 아이들에게 그럽니다. 사람은 동등하다. 대통령의 생명 빛이나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의 생명 빛이나 똑같다고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전제가 바탕에 깔리지 않은 듯합니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 싶습니다."

Q. 이웃(?) 단체인 마산YMCA와 비교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저희를 조금 보수적으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저희는 시스템이 다릅니다. 전국 52개 YWCA가 모여서 하나의 비전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합니다. 그래서 연합회에서 하나의 안건을 하자고 결정 나면 52개 YWCA가 그야말로 똘똘 뭉쳐서 함께 합니다. 거기서 엄청난 파워가 나옵니다. 저희는 강력한 응집력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조금 답답해 보이더라도 하나하나 확실하게 바꿔나갑니다. 또한 올바른 기독 정신 아래서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를 끊임없이 점검합니다. 허투루 갔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곳입니다.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곳입니다."

Q. 제 느낌인데 사무총장님은 아무래도 진취적인데, 이사회는 어떤가요?

"이사회는 보수적인 분들이 있죠. 하지만 제가 올린 안건이 이사회에서 부결되지는 않습니다. 이사회에 부결되지 않도록 올리거든요(웃음). 저는 청년이사가 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어른들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변화와 혁신을 위해서는 20~30대 이사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걸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Q. 요즘 온라인에 보면 젊은 사람들이 여성, 호남, 외국인에 대한 비하가 심한데요.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사람이 궁색하고 여유가 없을 때 만만한 사람을 대상으로 타자화시키고 이방인화 시키는 기조가 있습니다. 나 스스로의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뭉겜으로써 상대적으로 존재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작은 이득을 잃어버릴까봐 아등바등하는 겁니다. 그런 점을 성찰할 만큼 한국사회가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입니다. 앞으로 더 하겠죠. 솔직히 우리나라에 자기 터전을 버리고 이민 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혼자 결혼하러 오거나 일하러 오는 것에 불과합니다. 남아공이나 멕시코 이런 나라에서도 우리나라에 이민을 오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못 살 나라입니다. 이민이 너무 많아서 골치 아픈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다. 일단 다른 것은 떠나서 나와 다른 사람과 집단을 봤을 때 선입견이 아니라 호기심으로 접근했으면 합니다."

그는 마산YWCA본부 외에도 마산YWCA어린이집, 마산YWCA가 수탁해서 운영 중인 마산여성인력개발센터, 경남여성인권지원센터, 창원시마산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들 기관 실무자들만 해도 근 100명에 달한다. 하지만 젊어서 그런지 아직도 열혈 실무자의 느낌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본질을 꿰뚫어 보려 굉장히 노력하고 있다. 몇 년 안에 우리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이 돼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마산YWCA를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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