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다리를 이끌고 홀로 깨달음의 길을 걷다

오세브레이로에서 트리야카스텔라까지 20.7㎞

오늘은 안개가 자욱합니다. 이곳은 안개로 유명한 지역이라네요. 조금 길을 가다 어린 아가씨 한 명을 만나 같이 걷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10명이나 되어 괜찮지만 이 안개 낀 새벽이 무섭지 않은지 대단해 보였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공부를 한다는 러시아 아가씨 케이트였습니다. 그녀도 우리와 함께 걸으니 든든한가 봐요. 순례자 상으로 유명한 산로케 고개(Alto San Roque)도 안개에 덮여 있습니다. 시야가 가려 있어 좀 답답하지만 이런 분위기도 괜찮네요. 이 길에서 아직 비는 만나지 않았는데 한 번쯤 비가 오는 길을 걸어보고 싶은 건 배부른 소리일까요? 사실 날씨가 매일 쾌청해서 다행이었어요. 비가 오면 땅이 심하게 질퍽거리고 비가 오락가락하면 우비를 벗었다 입었다 몇 배 더 힘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곧 안개가 걷히고 해가 배시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합니다. 구름이 걷히자 멋진 풍경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수많은 소가 곁으로 지나가기도 하고요. 쇠똥을 피하느라 걷기는 힘이 들었지만 피레네 다음으로 멋지게 펼쳐지는 풍경이 모든 것을 잊게 합니다.

이제 내리막, 저 밑에 트리야카스텔라(Triacastela)가 보이는데 며칠 전부터 살짝 아프던 다리가 갑자기 심하게 아파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르막일 때는 괜찮았었는데 말이죠.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요. 일행에게는 먼저 가라고 하고 주선이와 둘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왔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아주 힘이 들었어요.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모두 걱정을 해 줍니다. 이렇게 왔는데도 오전 11시가 안 되었어요. 처음에 무리하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되었지만 이제 어쩌겠어요. 오후 1시까지 알베르게 문 열기를 기다리며 알베르게 앞 바르(Bar)에서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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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아 마을을 떠나며 본 아침 풍경. / 박미희

샤워하고 나오니 니나가 이곳 세탁기가 너무 크다고 빨래를 함께 한다고 달라고 합니다. 몇 명의 빨래가 다 들어가는 거였어요. 평지로 돌아오니 다리가 많이 아프지 않아 장을 보러 나갔는데 에공! 시에스타(낮잠 자는 시간)에요. 시에스타에 걸려 본 적이 별로 없는데 오늘 딱 걸렸네요. 다른 길로 돌아오다 점심 먹고 있는 우리 팀을 만났어요. 함께 앉아 맥주를 한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슈퍼에 갔는데 새벽에 만났던 케이트와 우리 팀 학생 몰카가 손을 잡고 나옵니다. 아이구~ 빠르기도 하여라~! 오늘 유난히 즐겁게 함께 걸어오더니 그새 친구 하기로 했나 봐요. 니나도 그렇다 생각했는지 저를 쳐다보네요. 둘이 마주 보고 웃었지요.

숙소로 돌아오는데 프랭크(순례 초반부터 자주 만나는 미국인)가 아까 우리가 내려온 산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같은 알베르게, 참 인연이에요. 약속도 하지 않았고 알베르게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자주 만나네요. 그런데 정말 부러운 거 있죠. 이렇게 좋은 달란트(재능)를 가졌으니 말이에요. 이 길을 걸으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부럽던지요. 저는 그런 달란트가 없으니 이 멋진 경험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일기로 남길 뿐이에요.

숙소에서 좀 쉬다가 미사를 드리고 저녁을 먹으러 갔어요. 프랭크 부자, 러시아 안드레이 부자, 폴란드 하리나 모자 등 아는 얼굴들이 많았어요. 다들 가족 같아요. 같은 곳을 향해 함께 걷는다는 유대감이 이렇게 끈끈하네요. 식사 후 숙소로 돌아오는데 왠지 자꾸 슬퍼집니다. 왜냐구요? 이제 곧 이 길이 끝나잖아요. 이 길을 떠나야 하잖아요.

사람들은 순례길을 세 단계로 나누어 말을 하지요. 나바라와 라 리오하지역 초반 삼 분의 일을 '고통의 길',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메세타 지역을 '명상의 길', 내일부터 걷게 되는 갈리시아를 지나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을 '깨달음의 길'이라고요. 아직은 이 길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왜 이 길을 걸은 많은 사람이 이 길을 못 잊어 하고 또다시 걷는지는 좀 알 것 같더라고요. 저는 이제 나머지 길을 걸으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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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야카스텔라 마을 풍경. / 박미희

트리야카스텔라에서 사리아까지 18.6㎞

그동안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어요. 그동안은 조금 아프다가도 자고 나면 괜찮은데 오늘은 다리가 나아지지 않는 거예요. 같이 출발을 해서 걷다가 일행이 나 때문에 늦어지는 것 같아 먼저 가라고 했어요. 빨리 걸으면 더 도질 것 같았기 때문이죠. 스페인 친구 차로가 중도에 포기하고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더 걱정이 되더라고요. 친구들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뒤돌아보며 앞서가네요. 그때부터 또 눈물이 나는 거예요. 실은 며칠 전부터 혼자이기를 은근히 바랐던 일인데 말이죠. 다리는 아프지, 친한 사람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프더라고요. 어쩌면 못 만날 수도 있잖아요. 같이 걷던 사람 중에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못 만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훌쩍거리며 가고 있는데 우리 일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래도 속도를 내기는 어려웠어요. 앞으로 기다리지 말라고 하고 다시 헤어져 좀 편한 도로를 따라 내려왔어요. 이 길엔 순례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아요. 결국 길을 잃어버렸죠. 카미노에서 약간 벗어난 길이다 보니 표지가 없어진 거예요. 어느 마을로 들어갔는데 물어볼 사람도 보이지 않고 스마트폰에 길 찾는 앱도 제대로 작동이 안 돼요. 그런데 크게 걱정은 안 되더라고요. 혼자인데도 이젠 간이 좀 커졌나 봐요. '길 못 찾으면 택시 불러서 타고 가지 뭐~!' 이렇게 생각하고 길가에 앉아 간식을 먹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보였어요. 그분이 잘 가르쳐 주셔서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었답니다.

천천히 쉬엄쉬엄 사리아(Sarria)까지 왔어요. 원래는 일행들과 바르바델로(Barbadelo)까지 가기로 했는데 더 걸으면 무리일 것 같아 사리아에서 쉬어가기로 했답니다. 혼자 걸으면 생각을 더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생각이고 뭐고 아픈 다리에만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며칠을 일행들과 우르르 다니다 혼자가 되니 하루도 되지 않아 외로움이 엄습을 합니다. 바르바델로까지 억지로라도 갈 걸 후회가 되었지요. 이 알베르게에 주방이 보이기에 아픈 다리를 끌고 슈퍼에 갔습니다. 마침 배낭에 쌀이 조금 남아있어 밥을 해먹으려고요. 한국 음식을 먹으면 외로움이 가실까요? 오는 길에 약국에도 들러 마사지 연고도 하나 더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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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아 마을을 떠나는 새벽. / 박미희

우익, 요리하려고 보니 가스는 있는데 조리기구가 없는 겁니다! 알고 보니 갈리시아지역에서는 알베르게 주방 도구를 모두 없앴답니다.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는데 저는 어쩌라구요. 샐러드용 상추는 하몬이랑 빵에 쌈 싸먹으면 되는데, 양파와 감자는 워떡혀요? 씁쓸히 빵을 먹고 있는데 프랑스에서 온 파리에앙느 할아버지가 주방에 왔습니다. 대충 짐작하기로 오래전 자전거를 타고 산티아고를 순례한 적이 있다는 것 같은데 그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작은 코펠을 가지고 다니며 식사를 직접 해먹는다더군요. 오늘도 스파게티를 해먹는데 그 손놀림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녜요. 저보고도 먹어보라네요. 전 금방 식사를 했다 하니 달걀 삶은 걸 나누어 주십니다. 저도 그 코펠을 빌려 감자를 삶아 나눠 드렸지요. 식사 후 미사에 갔는데 거기서 폴란드 모자와 인도네시아에서 혼자 온 클라우디아를 만났어요. 아는 사람이 너무 없어 외로웠는데 다행이죠. 폴란드 모자는 같은 알베르게라서 숙소로 와서 같이 과일을 나누어 먹고 산책하러 가고 전 다리 마사지를 했어요. 얼른 나아야 할 텐데요. 다리가 아파 오늘은 동네 구경도 제대로 못 했네요. 날씨도 덥고 누군가 코도 심하게 골고 골목도 참말로 시끄러운 밤이에요.

사리아에서 포르토마린까지 23.9㎞

더운 날씨에 코 고는 소리에, 저도 그랬지만 다들 정말 자기가 어려웠나 봐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어떤 사람은 매트리스를 아래층에 가져가서 자고 올라오기도 하네요. 오늘은 다리가 아프니 배낭을 부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일찍 일어나지는 바람에 그러지를 못했어요. 보통 다른 알베르게는 짐을 놔두고 가면 알아서 부쳐주는데 이 알베르게는 6시에 직접 부치고 가야 한답니다. 하는 수 없이 배낭을 지고 출발했죠. 밖으로 나오면 다른 순례자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는 거예요. 마을이 끝나가는 곳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누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리아를 쳐다보며 30분 넘게 기다리니 겨우 한 명이 오고 있네요. 깜깜한 길을 랜턴에 의지한 채 앞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걸었습니다. 오다 보니 길이 평탄해서 어제 일행이 묵는다던 곤자르까지 더 왔어도 될 뻔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럿이 같이 다니다 보니 혼자이길 원했었는데 오늘은 정말 혼자 걷는 이 길이 아주 좋았어요. 어둠이 걷히자 너무나 평화로운 스페인의 농촌풍경과 아직 남아있던 구름이 잘 어우러져 멋진 모습을 연출하네요. 어디서 아름다운 백파이프소리가 납니다. 조금 걸어가니 순례길에서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앞에서 여유롭게 감상을 하다가 1유로를 주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어제 마사지를 열심히 한 덕인지 다리가 더 아파지지 않는 것 같고 배낭을 지고 걷는데도 별 무리가 없네요. 정말 다행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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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토마린으로 향하는 길 풍경. / 박미희

며칠 전부터 순례길에 어린 학생들이 많이 눈에 띄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사람이 걷고 있어요. 사리아에서 산티아고까지 100㎞를 걸으면 순례자 증을 준다고 해요. 처음부터 다 걷고도 이 구간을 걷지 않으면 순례자증을 안 준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이러니한 일인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이 구간에만 순례자(?)들이 몰리게 되어 있어서 숙소도 붐비고 길도 붐빈다고 합니다.

길도 평탄하고 돌담도 많고 풍경도 좋고 날씨도 좋고 오늘은 걷기가 참 수월합니다. 11시도 안 되어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입성! 강을 끼고 높은 곳에 있는 도시가 정겹게 반겨 줍니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학생들이 나와서 물을 나눠주는 봉사도 하고 있었고요. 무니시팔(공립) 알베르게에 가니 내가 제일 먼저 도착을 했네요. 일단 가방으로 줄을 세워놓고 동네를 둘러보다가 가방에 쌀이 남아 있는 것이 생각났어요.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은 터라 사립 알베르게로 가기로 했지요. 이곳 공립 알베르게엔 주방이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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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토마린 계단 앞 박미희 씨. / 박미희

골라서 찾아간 알베르게는 깨끗하고 맘에 들었어요. 이곳도 제가 일등이네요. 얼른 씻고 장을 보러 나갔죠. 감자국을 끓이고 오이를 무치고 계란말이를 해서 맥주와 함께 혼자 근사한 점심을 먹었어요. 여유롭게 쉬고 있는데 바로 옆 침대의 이탈리아 부부가 둘이 끌어안고 히히덕거리고 가관입니다. 그 좁은 침대에서요. 조금 낮잠을 잘까 하다가 '에효!' 안 되겠다 싶어 시내구경을 나갔어요. 오늘 날씨는 완전 가을 같아요. 햇볕이 조금 따갑긴 해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더없이 좋습니다. 그런데 길이 다 비탈길이라서 걷는 게 좀 힘이 듭니다. 걷다가 동네 바르에 앉아 있는데 이 시간이 너무 감사하게 다가오더군요. 앞으로 또 내 일생에 이런 날이 올까요? 오로지 나만의 시간, 나만을 위한 시간. 먹고 잠자고 씻고 걷고, 단순하지만 정말 풍요로운 시간이에요. 이제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조금은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주어진 시간만큼 최선을 다해 느끼고 즐기자고 혼자 다짐을 해 봅니다. 지금 스페인의 작은 도시에는 제가 젤 좋아하는 살랑 바람이 불고 있어요. 이 분위기 정말 그리울 것 같아요.

광장으로 나오니 스페인 학생들이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아까 오다가 만났던 친구들인데 어떤 학교에서 단체로 순례길 체험을 하러 왔나 봐요. 기다리고 있노라니 며칠 전에 폰페라다에서 같은 방에 묵었던 프랑스 여인 둘이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인도 눈에 띄고 프랑스 할아버지, 러시아 부자 등 아는 얼굴들이 많이 있어 더욱 기분이 좋아요. 인도네시아에서 온 클라우디아와 함께 다니던 멕시코인 후안과도 인사를 나누었죠. 공연이 시작되었고 나와서 노래하고 싶은 사람을 불러냈는데 프랑스 여인 중 하나가 나가서 노래를 불렀고요. (영 아니었어요. ㅋㅋ) 멕시코인 후안이 나가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데 정말 장난이 아녜요. 현란한 기타 솜씨 하며 가창력까지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몇 번의 앙코르를 받았답니다. 분위기는 무르익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추억의 마카레나 춤도 추고 아주 신나는 한마당이 펼쳐졌습니다. 나도 질 수 없지요. 함께 손뼉 치고 춤추며 즐기고 있는데 아는 사람들이 엄지를 올리며 흥을 돋워줍니다. 아직 고등학생들인데 선생님 앞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스스럼없이 춤추고 진한 스킨십이 좀 놀랍기도 했지만 이곳 문화라니요. 공연이 끝나고 후안에게 가수냐고 물어보니 정말 멕시코 가수랍니다. 어쩐지~!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주니 함께 다니던 클라우디아도 뿌듯한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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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토마린의 거리 풍경. / 박미희

광장 바로 옆 성당에서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까 공연했던 팀이 다 성당으로 가서 첼로, 바이올린, 기타를 치며 함께 미사를 하는데 그 소리의 아름다움이 감동 그 자체였어요.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가 봐요. 미사 후 신부님들이 안수를 해 주시는데 유난히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거든요. 생각지 않은 큰 선물을 받고 감동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어요.

아까 남았던 밥으로 저녁을 먹고 물을 사러 갔는데 오잉~! 벌써 시에스타 시간이라 큰 슈퍼도 문을 닫았네요. 이 사람들은 정말 삶을 즐기고 산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순례자나 관광객을 위해서 문을 좀 더 열 법도 한데 철저하기도 한 거 있죠. 에구~!! 아까 그 이탈리아 부부는 금슬도 좋네요. 뭐가 그리 좋은지 2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한 침대에서 아직도 계속 낄낄거리고 있어요. '여보쇼! 여긴 많은 사람이 함께 묵는 알베르게라구요! 쫌!' 요렇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귀마개를 꼭꼭 집어넣고 잠을 청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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