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소녀 (1)

통기타를 멘 채 지그시 눈을 감고 꿈꾸듯이 노래하는 독특한 가수가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정호는 이미 '폐결핵 가수'라는 썩 달갑지 않은 별호가 나돌고 있었다. 하지만 음악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건강했으며, 듣는 이에게 소리의 혼과 정한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매력이 있었다.

가수로서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김정호이지만,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1970년대의 포크 음악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그의 음악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김정호의 인기와는 별개로 그의 음악이 당시의 문화를 대변할 수 있는 특징이 없다고 본 것이다. 평론가들의 시각에서 김정호는 주류가 아니었다. 60년대 후반부터 대중문화를 서서히 잠식하는 서구음악의 영향 속에서 그들은 김정호의 음악이 청년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된 도시적이며 세련된 음악과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여겼다. 또한 서민의 애한과 정서를 품어왔던 전통가요, 기존의 트로트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와 비교해도 크게 차별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일찍 요절한 김광석(1964~1996)과 유재하(1962~1987)와 비교해도 김정호에 대한 평가는 관대하지 못했다.

80년대 이후의 음악 흐름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조명받고 있다. 김광석은 학생운동권 출신의 이점을 지니고 있는 데다, 70년대 포크에 덧씌워진 저항의 정통성을 잇는 가수로 거듭났다. 그리고 유재하는 현대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한 천재로 각인되어지고 있다. 이 두 사람은 현재 대중음악의 중심에 있으며, 지금도 그들의 음악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많은 후배 가수들이 뒤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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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의 저편에 있는 김정호는 우리의 전통소리를 가요와 접목해 국악적 요소를 극대화시켜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평론가들에겐 그가 시도하고 추구하려 했던 음악이 국악이라는 장르에 빗대어 고루하며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으며, 여전히 서구음악에 비해 저급하다는 편견 때문에 제대로 된 가치를 평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죽는 그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는 불꽃으로 피어났으며, 그 결과 우리 소리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며 확고한 대중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김정호는 더욱 돋보인다.

김정호의 본명은 조용호다. 어린 시절 소소한 병치레를 자주 하는 허약한 그였지만, 음악에 대한 재능은 그 시기부터 싹트고 있었다.

서편제의 큰 줄기이자 창작판소리의 창시자인 박동실(1897~1968) 명창이 바로 김정호의 외조부였다. 명창 박동실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등에 능통했으며, 서구의 오페라단격인 창극단을 최초로 만들어 현대 판소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후진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했다. 거기에다 같은 창극단에서 활동한 어머니 박숙자는 명창 김소희와 쌍벽을 이뤘던 판소리의 명인이었다. 그러나 6·25 때 박동실은 월북해 버린다. 이로 인해 판소리사에서 그의 이름은 거론조차 할 수 없었고, 서서히 잊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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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계기로 김정호의 외가는 풍비박산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의 어머니는 외조부 박동실을 원망하며 두고 간 흔적을 지우기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우고, 행여 아들 정호가 알까 봐 노심초사했다고 전한다.

그러한 기억이 잡힐 듯 생생하건만 김정호는 운명처럼 금지된 길을 걸어간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까지 음악에 몰입했다. 노래는 대동상고 시절 밴드부에 합류하면서 처음 만들었고, 졸업 후엔 기타를 둘러메고 발길 닿는 대로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잠자리조차 없어 거리에 내놓은 이삿짐 속 캐비닛에 들어가 잠을 청하기도 했다.

이즈음 임창제, 이상일 등과 '스킬보이스'라는 그룹을 결성해 미8군 무대에서 음악생활을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것은 음악보다 먼저 배고픔이었다. 당시 한 그릇에 5원 하던 노동자 합숙소의 국수, 한 대접에 10원이었던 남대문시장의 수제비로 허기를 채우며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고 나중에 추억처럼 되뇌기도 했다.

그 후 친구 임창제가 이수영과 함께 듀엣 '어니언스'로 데뷔하려고 하자, 임창제에게 자신이 만든 곡을 선물하며 축하해 주었다. 그런 와중에 가수 백순진과 더불어 '사월과 오월'의 멤버로 활동을 재개한 그는 소속사가 작곡에 대한 권리마저 귀속시키려 들자, 크게 반발하고 2개월 만에 활동을 마친다. 그만큼 자유롭게 곡을 만들려는 그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데뷔한 '어니언스'는 김정호가 만들어준 '사랑의 진실', '저 별과 달을', '작은 새' 등 여러 곡이 히트를 치기 시작하면서 가요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이때 임창제가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히트곡 대부분을 친구 김정호가 만들어주었다고 그를 소개했고, 언론과 방송은 김정호라는 음악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김정호는 작곡자에서 가수로 변신했다. 1974년 5월 '이름 모를 소녀'로 무대에 섰으며, 통기타 가수 대열에 참여하게 된다. 김정호의 대표곡이며 데뷔곡인 이름 모를 소녀는 총각 시절, 그의 아내 이영희를 애타게 짝사랑하면서 느낀 감정을 노래로 승화한 명곡이다. 이영희는 김정호가 중학생 때 한눈에 반해 오랜 세월 가슴에 담았던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자신의 일상과 심정을 표현한 연애편지를 수차례 보내고 집으로도 찾아갔지만, 무명가수인 김정호가 미덥지 못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두 사람의 교제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가 보낸 편지는 몇 통을 제외하고는 그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있던 그녀는 뜸해지는 소식에 그가 자신을 포기한 게 아닐까 오해하기도 했다. 한 번은 그가 머리를 매만지고 빌려 입은 코트 사이로 나비넥타이를 한 채 한껏 멋을 부렸는데, 그녀에게 비친 김정호의 모습은 그야말로 촌스러웠다. 그런 김정호의 순수함이 싫지 않았던 그녀는 그의 첫 노래인 '이름 모를 소녀'를 듣자마자, 바로 자신을 그리며 만든 노래임을 직감했다.

데뷔곡 '이름 모를 소녀'는 사랑의 아픔을 느끼고 있는 젊은 층뿐만 아니라 수많은 대중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1974년 11월 김수영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는 기염을 토한다. 당시 그의 노래에 대한 대중들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 영화에 김정호는 출연료 30만 원을 받고 배역을 맡았으며, 석찬, 홍민, 혼성듀엣 '원플러스 원'과 포크 록그룹 '들개들' 등 당대의 젊은 포크 가수들이 대거 출연했다. 그때 여주인공을 맡았던 정애정은 노래 제목을 착안해 자신의 예명을 '정소녀'로 정했을 만큼 '이름 모를 소녀'의 대중적 파급력은 대단했었다.

하지만 이 축복도 잠시, 김정호에게 보이지 않는 불행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지방 공연하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방위소집에 응하지 못한 그는 탈영병이란 굴레로 군 영창에 갇히게 되는 신세가 된다. 이는 불행의 서막일 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군 복무를 마치게 되지만, 건강이 엄청나게 나빠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때부터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폐결핵이라는 병마와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또 1975년에는 음악인으로서의 활동을 한동안 접게 하는 치명적인 사건인 '대마초 파동'이 일어난다.

김정호의 후기 작품들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담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조금 더 나중을 기약하며 다음 이야기를 지면에 옮길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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