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세바돈에서 폰페라다까지 28.6㎞

아직 어두운 새벽, 4시 반쯤에 동료 순례자들이 거의 다 일어났습니다. 이 알베르게(순례자용 숙소)의 유쾌한 호스피탈레로(자원봉사자) 미겔이 준비해 놓은 빵 등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함께 폰세바돈을 떠납니다. 다음에 오게 되면 다시 묵을 것을 다짐하면서요. 스페인 장다리 아저씨 하우메는 어김없이 우리들의 카미노송(사이먼앤가펑클의 '스카보로페어')을 틀어 주었어요. 10명이 함께 출발을 하는데 어찌하다 보니 이 팀과 며칠째 그룹이 되어 걷고 있네요. 30분가량 가니 카미노에서 유명한 '쿠르스 데 페로(La Curz de Ferro)'라는 철십자가가 나옵니다. 철십자가는 순례자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놓고 소원을 비는 곳으로 유명한데요. 저는 돌도 짐이 될 것 같아 안 가져 왔는데 가져올 걸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아직 환해지지는 않았지만 여명에 버티고 서 있는 십자가를 보니 경외심마저 들었어요. 모두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경건한 새벽입니다.

이제 이 산을 넘어가면 카미노의 막바지 길을 걷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벌써 아쉬워지면서 앞으로 하루하루를 더 의미 있게 걸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어제 스페인 친구들이 알베르게의 미겔과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아마 미겔이 지름길을 알려 줬나 봐요. 산길을 걷지 않고 한적한 찻길을 따라 우리만 걷고 있었어요. 카미노 길 중 가장 높다는 푼토봉(Punto Alto)을 지나가는 길, 주변은 온통 낮은 나무와 들풀로 덮여 있는 산뿐입니다. 얼마를 가니 산 밑에 예쁜 동네가 보이네요. 아세보(Acebo)란 마을이에요. 앗, 지붕색깔이 달라졌어요! 여태까지는 거의 빨간색이었는데 이곳은 우리나라 기와색 같아요. 지역에 따라 지붕색깔이 변하는 게 신기했습니다. 마을이 예쁘고 독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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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길 중 가장 높다는 풍토봉에서 바라본 풍경. / 박미희

하우메와 비센테(스페인 사람)가 몇 군데 바르(Bar)에 들어갔다 오더니 여긴 물가가 너무 비싸다고 조금만 더 걷자고 합니다. 아, 난 쉬고 싶은데 할 수 없이 따라나섰습니다. 다음 마을에 가서 바르에 들어가 신발도 벗고 수다도 떨며 푹 쉬었습니다. 이젠 순례의 막바지, 친해진 사람들도 많아져서 제가 한국에서 준비해온 태극 배지를 나눠 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 친구들에게 태극 배지를 하나씩 나눠 줬더니 다들 너무 좋아합니다. 자기들 가방에 달고 자랑스럽게 보여주기도 하더라고요. 저도 기분이 좋았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출발했는데, 내려가는 길은 너무 힘이 들었어요. 길은 완전히 돌멩이에다가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 먼지는 심하게 날리고 너무 힘들게 몰리나세카(Molinaseca)까지 왔어요. 이곳도 참 아름답네요. 아름다운 이곳에서 묵고 싶었어요. 아니 쉬었다가 라도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일행이 폰페라다(Ponferrada)까지 쉬지도 않고 간다네요. 으흐흑. 그냥 뒤처져서 걸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니나(폴란드 사람)가 같이 가자고 독려를 합니다. '그래~, 의리가 있지!' 하는 수 없이 또 따라나섰습니다. 나도 걸음이 빠른 편인데 폰페라다 알베르게에 방이 없을까 봐 그런지 다들 어찌나 빨리 걷는지 따라가기가 너무 힘이 들었어요.

그룹으로 다니는 것은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네요. 스페인 친구들이랑 다니다 보니 음식도 알아서 시켜주고 재미도 있고 지루하지 않았어요. 반면에 용변 문제도 그렇고, 쉬고 싶을 때 쉬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특히 사색하기가 힘이 들어요. 아무튼, 뒤도 돌아볼 틈도 없이 가서 정오에 도착했어요. 하지만, 아직 알베르게 문 열기는 한 시간이 남았네요. 배낭으로 줄을 세워 놓고 앉아 맥주도 한잔 하며 숨을 돌렸지요. 알베르게에 등록을 하고 안내해 준 방으로 가니 네 명이 자는 방이에요. 프랑스 여인 둘이 먼저 들어 있었고 나와 지원이가 같은 방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팀이면 한방도 해 주는 거였나 본데 잘 몰라서 우리만 다른 방에 자게 되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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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길을 걷는 중 바르에서 동료 순례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 박미희

씻고 나오니 스웨덴 사람 샤롯데와 카리나, 그리고 이탈리아 삼인방과 몇 명은 오다가 수영을 하고 왔다며 신나서 알베르게로 들어오고 있었어요. 에고, 부러워라~! 천천히 왔어도 알베르게 잡는 것은 무리가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어쩌겠어요. 그래도 이곳은 마당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놨어요. 아쉽지만 이곳에 발을 담그니 오늘의 피로가 싹 가시더라고요.

프랭크 부자, 이탈리아 삼인방, 스웨덴 친구들 등 한 번씩 마주치던 사람들과 모두 같은 알베르게에서 만나니 시끌벅적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이 반가웠어요. 니나가 4시에 저녁을 먹자고 하는데 점심 먹은 지가 얼마 안 돼서 7시에 먹자고 했어요. 그런데 말이 전달이 잘못된 건지 5시쯤 또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가기로 했어요. 주선이와 니나, 또 폴란드에서 온 하리나와 마치 모자랑 함께요.

여태 먹어본 순례자 메뉴 중 정말 최고였어요. 10유로밖에 안 하는데 정말 전에 것과 비교가 되더라고요. 와인은 무료, 디저트도 커피와 푸딩에 폴란드 친구들이 원하는 보드카까지 화려했지요. 하지만, 아직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아 너무 아쉬웠어요. 식사 후 슈퍼에 가서 함께 장을 보고 돌아와 발 담그는 곳에서 또 발 담그고 놀다가 미사에 갔습니다. 아마 니나가 미사 때문에 저녁을 일찍 먹자고 했나 봐요.

미사에는 많은 순례자가 참석을 했어요. '주님의 기도(주기도문)'하는 시간에 순례자들에게 자기 나라말로 기도하게 하는 관례가 있나 봐요. 세 명에게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저에게도 한국말로 기도하는 영광이 주어졌어요. 정성을 다해 또박또박 한국말로 기도를 하는데 가슴이 벅차더라고요. 같은 방의 프랑스 여인 둘이 옆에 앉아 있다가 엄지를 치켜세워줍니다.

기분 좋게 미사를 마치고 혼자서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이곳은 해발이 낮아서인지 근래 들어 가장 덥지만 알베르게에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도시가 좀 커서 다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방에 들어오니 프랑스 여인 둘이 내 한복형 원피스가 독특하다고 관심을 보이는 거예요. 이때를 놓칠 수 없어 인터넷을 켜고 우리나라 한복을 보여 주었더니 아름답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태극 배지를 하나씩 주며 고맙다고 했지요. 이 여인들은 오늘이 순례길 첫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루페와 티헬즈랑 통성명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몸은 피곤한데 더워서 잠이 잘 올까요?

폰페라다에서 페레헤까지 27.1㎞

새벽 6시에 문을 열어주는 알베르게라서 오늘도 조금 여유가 있네요. 5시 40분이 되니 문을 열어줘서 출발하는데 오늘은 가장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출발했답니다. 20여 명이 한꺼번에 시내를 가로지르며 '싸인! 싸인!'을 조용히 외치며 길을 찾아갑니다. 조개 모양이나 노란 화살표를 찾는 거예요. 시내에서는 자칫하면 다른 곳으로 가기가 쉽거든요. 새벽에 군인들처럼 행군하듯 가는 그 모습이 다들 재미있는지 즐거운 표정들입니다. 어차피 중간에 다들 헤어지겠지만 그래도 몇 팀은 꼭 같은 알베르게로 가게 되더라고요.

다들 뿔뿔이 헤어졌는데도 길에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큰 도시를 하나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아마 폰페라다에서 출발한 사람도 많나 봐요. 어린 학생들도 많이 보입니다. 카카벨로스(Cacabelos)라는 마을을 지나는데 우리 팀은 어떤 바르로 들어갔어요. 나무에 예쁜 뜨개질 옷을 입힌 것이 독특했어요. 이곳은 순례자에게 와인과 엠파나다(empanada 군만두처럼 생긴 스페인 빵)라는 빵을 무료로 주는 곳이었습니다. 거기다 화장실도 무료로 쓸 수 있고요. 혼자 왔으면 이런 정보를 몰랐을 텐데 스페인 친구들하고 다니다 누리는 호사였어요. 바르에 너무 감사해서 그냥 나올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조그마한 기념품을 하나 사서 나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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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페라다(Ponferrada) 마을 풍경. / 박미희

날씨는 어마어마하게 더워요. 비아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를 지나는데 이곳도 오래된 도시처럼 보였어요. 다들 그곳에서 묵어가는데 우리 팀은 4㎞를 더 간답니다. 그런데 저랑 주선이는 이미 방전이 되었어요. 다들 우리를 앞서 가버렸고 하도 배도 고프고 힘이 들어서 우리 둘은 길가의 벤치에 주저앉아 버렸어요. 거기서 뭘 좀 먹고 쉬고 나니 그제야 힘이 좀 나는 겁니다. 그런데 4㎞가 왜 이리 먼가요. 주선이는 저보다 더 안 따라오고 이젠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다리 허벅지 쪽이 아파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이 이곳을 걷기 시작 후 힘든 날 중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날이에요.

겨우 페레헤(Pereje)에 도착하니 일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삼인방과 스웨덴 사람 샤롯데와 카리나도 우리 뒤를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여기의 침대는 이 층짜리가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우리가 씻고 나오는 걸 기다려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이곳의 유일한 바르 겸 레스토랑이죠. 식사 후 평소에 안 자던 낮잠도 자고 일어났는데도 피곤해요. 모두 물가로 수영을 하러 간다고 하네요. 개울에 갔는데 물이 너무 맑고 시원한 거예요. 거기다 물 위에 피어 있는 하얀 꽃이 너무나 예뻐요. 발만 담가도 더위가 모두 물러가기 때문에 다들 수영할 생각은 안 하고 물수제비 뜨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하 호호' 재미가 있어요. 그러다 큰 가재를 발견했어요. 모두 즐거운 표정으로 지켜만 보더라고요. 내가 일부러 잡는 척만 해도 기겁을 합니다. 안된다고요. 흐흐흐.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이렇게 놀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지원이와 주선이를 데리고 저녁 겸 맥주 한잔 사 주러 바르로 갔습니다.

샤롯데와 카리나도 와 있더군요. 조금 있으니 우리 팀의 나머지도 모두 바르로 왔습니다. 저녁을 안 먹고 자기가 어려웠나 봐요. 모두 한 잔씩 하며 친목을 다졌고 바르에서 서비스로 보드카가 나오자 분위기는 더욱 좋아집니다. 기분 좋게 알베르게로 돌아왔죠. 내일도 난코스라서 모두 배낭을 부치고 걷는다고 합니다. 그래도 저는 그냥 지고 가고 싶었는데 다들 보낸다고 해서 저도 그냥 부치기로 했습니다.

페레헤에서 오세브레이로까지 23.8㎞

새벽 4시 10분에 누가 깨웁니다. 4시에 일어나기로 했는데, 엊저녁 잠을 설치고 새벽에야 잠이 들어서는 귀마개를 하지 않고 잤는데도 다른 사람 소리를 못 듣고 주선이가 깨워서야 일어난 거예요. 어제 니나가 우리 팀을 위해 사놓았던 빵과 과일로 함께 아침을 먹고 5시쯤 출발을 했습니다. 카미노송도 부르고 시작은 평탄합니다. 가다가 바르에 들러 커피도 마시고 배낭 없이 여유롭습니다. 큰딸에게 전화해서 니나, 샤롯데, 카리나와 통화를 하게 했습니다. 전처럼 이들에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전해 달라고 한 거예요. 원래 성격이 밝은 니나는 서툰 영어로 딸과 통화를 한참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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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울로 코엘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오세브레이로(O'cebreiro) 마을 풍경. / 박미희

전화하고 나니 더욱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길옆에 흐르는 물도 깨끗하고 갖가지 야생화도 반겨 주고 좋은 친구들과 스페인의 시골길을 걸어가는 기분 정말 좋았어요. 바르에 들러 간식도 챙겨 먹고 나니 산길로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와~, 장난이 아니게 힘들어요. 배낭까지 졌더라면 어쩔 뻔했나 싶어요. 이래서 사람들이 배낭을 보냈던가 봐요. 하지만, 산 위에 오르니 경치는 멋집니다. 이런 풍경들을 보며 걷는다는 게 꿈만 같습니다.

물론 마을을 지나는데 소똥을 피해 다녀야 했고 지독한 냄새도 감수해야 했지만요. 아침 일찍 나선 덕에 시간 여유가 있어 쉬엄쉬엄 올라갔습니다. 갈리시아(Galicia)주로 접어들었다는 표지석을 지나 얼마를 걸어가니 그 이름도 아름다운 오~! 세브레이로! 경치도 아름다운 오~! 세브레이로! 순례길 중 가장 신비로운 장소라는, 파울료 코엘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오 세브레이로(O'cebreiro)가 나타납니다. 시간은 11시, 아직 벗겨지지 않은 구름바다가 우리를 반겨줍니다. 일 년 내내 안개가 낀다는 이곳, 높긴 높은가 봐요. 알베르게에 들어갈 생각도 안 하고 예쁜 경치에 홀려 있습니다.

샤롯데와 카리나는 다음 마을까지 간다고 다시 출발을 하네요. 시간이 너무 이르다 보니 더 걷고 싶었나 봐요. (이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요. 작별인사도 못 하고 헤어져 너무 아쉽네요.) 1시에 알베르게 문을 열어서 두 시간이나 기다리려니 지루하기도 했지만 배낭을 줄 세워놓고 성당에 가서 기도도 하고 알베르게 문 열면 해먹으려고 스파게티 재료도 사놓고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버렸습니다. 오늘은 비센테가 요리한답니다. 맛있게, 재밌게 식사를 했어요. 우리가 설거지를 하려고 했는데 이곳 주방은 냄비는 있는데 그릇이 없어 일회용품을 쓰는 바람에 설거지할 일도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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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세브레이로 마을에 있는 고대 켈트족의 전통가옥 '파요사'. / 박미희

이곳은 1300고지쯤 되는 높은 곳이다 보니 올라오기는 힘이 들었어도 날씨도 선선하고 산책하기가 좋았어요. 우리나라 초가집 같은 고대 켈트족의 전통가옥 '파요사'가 인상적이네요. 이곳에 네 채가 보존되어 있대요. 작은 동네라서 별로 갈 데는 없었지만 동산 같은 데가 있어 올라갔더니 사방이 트여 있었고 그곳에 본 전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어요. 언제 왔는지 그림 그리는 미국인 프랭크도 같은 알베르게네요. 니니랑 산책하다 보니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고요.

신심이 깊은 니나와 미사를 드리고 나서 이 지역 특산물이라는 문어요리 '폴포(Pulpo Gallega 갈리시아 지역의 명물 문어 요리)'를 먹으러 갔어요. 맛있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소금과 고춧가루에 묻혀 나오는 폴포는 매콤하기는 한데 그다지 추천할 만하지는 않네요. 프랭크 부자도 들어오기에 맵다고 했더니 망설이다 도로 나갑니다. 주인장께는 미안합니다! 해지는 풍경을 본다고 모두 자러 들어갈 생각을 안 하네요. 스페인 청년들과 이메일도 주고받고 사진도 찍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합니다. 아마 순례길이 아니었으면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을 게 틀림없어요. 오세브레이로의 해지는 풍경은 장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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