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독립군의 노래

국가보훈처는 2016년 4월 29일 자로 광복회와 독립기념관 공동으로 대한군정서 소속 독립군 문창학(1882~1923)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야외특별전시장에 선생의 업적을 알리는 별도의 전시코너를 마련하고 관련 자료를 5월 한 달 동안 전시했다.

문창학 선생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간도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 독립군에 가입했다. 1922년 동료 대원 14명과 국경을 넘은 선생은 일본 해군기지인 함경북도 웅기항을 공격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국경수비가 강화돼 인근 신건원주재소로 목표를 변경했다. 선생이 1월 5일 밤 12시 40분경 신건원주재소에 도착해 대기 중이던 대원들에게 불빛으로 위치를 알리자, 대원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해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고 주재소 숙소를 파괴했다. 일본 군경이 반격해오자 폭탄 2개를 투척하며 퇴각했고,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 훈춘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일본 군경에 대한 공격과 밀정 처단을 계속하던 중 부하의 밀고로 그해 12월 동료 대원 13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혀 함경북도 청진형무소로 압송되었다.

1923년 5월 25일 일본 법정은 14명에게 각각 사형, 무기징역, 10년 징역형 등 중형을 선고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선생과 김학섭은 고등법원에 상고했다. 재판은 9월부터 약 두 달 동안 경성복심법원에서 계속됐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문창학 선생은 다시 사형을 선고받고 1923년 12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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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정부는 일제 기관 파괴와 밀정처단 활동을 벌이다 순국한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국가보훈처는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다시 태어난 독립군'으로 문창학 선생을 재조명했다.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한을 노래한 김정구(1916~1998) 선생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문창학 선생을 두고 만든 노래라 하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노래의 사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유랑극단 '예원좌'는 중국 동북지방인 용정에서부터 조선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간도순회공연을 하던 중, 두만강에 위치한 조그만 도시 도문에 있는 만춘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이 여관은 조선 사람이 운영하며 겨우 명맥이나 이어가고 있었는데, 뒷마당에 단풍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마침 가을이라 두 단풍나무는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 있어 집 떠난 나그네에게 향수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작곡가 이시우(1913~1975)에게도 쓸쓸한 감정이 파고들었다. 그를 비롯한 몇몇 배우들이 한참동안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고향 생각에 잠겨있는데, 여관집주인이 다가와 단풍나무에 대한 내력을 알려주었다. 자신이 고향을 떠나오며 영원히 그날을 잊지 말자고 어린 단풍나무 몇 그루를 떠서 가져왔는데, 두 그루만이 겨우 살아남아 10여 년이 지난 지금 제법 가을 맛을 안겨주는 나무로 자랐다고 했다. 마침 작곡가 이시우는 새로운 곡을 만들어 공연을 준비해야만 했다. '추억'이라는 주제로 사색에 잠겨보았지만 그럴듯한 악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밤이 깊도록 곡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던 차에, 난데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비통하고 처절한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놀란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여관집 주인에게 오열하는 여인의 사연을 알아보았다.

그 여인은 독립군 문창학의 부인인 김증손녀(당시 30세) 씨로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만주로 도피한 남편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독립군이 있다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10여 년을 찾아다녔는데, 그런 그녀는 한 가닥 희망마저 사라지게 하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남편이 훈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압송된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됐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녀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이 남편의 생일이었기에 슬픔은 더하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는 빈 방에서 술이나 한잔 부어놓고 생일을 지내려 하였는데, 여관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제물을 차려가지고 왔다. 여관 주인이 차려준 제상에 술을 붓고 난 여인은 그만 솟구치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한밤중에 울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작곡가 이시우는 여인의 슬픔과 애환이 자신의 가슴으로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튿날 이시우는 그녀가 남편을 찾아 건너온 두만강을 바라보며, 나라 잃은 우리 겨레의 슬픔과 애환을 노래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도문에서 우연히 만난 문학청년 한명천에게 그 여인의 사연을 들려주었는데 그는 즉석에서 구슬픈 가사를 써내려갔다. 밤을 지새 가사에 맞추어 오선지에 멜로디를 그려나가니 마침내 민족의 애창곡 '눈물 젖은 두만강'이 완성되었다. 극단 '예원좌'는 장월성이라는 소녀 배우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이날 처음으로 노래한 뒤로 장월성은 관객의 터질듯한 환호로 하루에 몇 번씩이나 그 노래를 불러야 하는 인기를 누렸다. 두만강 연안에 살고 있는 조선 사람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노랫말이었기에 그만큼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간도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시우 작곡가는 뉴코리아 레코드사 소속의 가수 김정구를 찾아가, 이 노래의 취입을 제의했다. 한명천이 지어준 1절뿐인 노래에 김용호가 2, 3절을 만들어 1938년 OK레코드사가 첫 음반을 출시했지만, 판매량이 저조한 데다 설상가상 조선총독부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판매금지처분을 내렸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간 1970년대, 이미 원로가수가 된 김정구는 무대에서 부를 노래가 별로 없었다. 그의 노래 대부분이 조명암, 박영호 등 월북 작사가의 작품이었기에 금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940년대 후반 북한 정권 초기에 활동하면서 대표작 '북간도'가 조기천의 '백두산'과 함께, 북한 문학사에서 2대 서사시로 평가를 받고 있는 시인 한명천이 1절 가사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 젖은 두만강'만큼은 어떤 금지도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분단과 더불어 북에서 월남해 온 실향민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노래로 뒤늦게 유행을 타게 되었다. 여기에다 1964년부터 30여 년 동안 매일 낮 12시 55분에 시작하여 5분간 방송되었던, KBS 라디오 '김삿갓 북한 방랑기'의 시그널 음악으로 선택되면서 이 노래는 더욱 더 유명세를 올린다. 이후에 가수 김정구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열창했다. 이 노래는 1981년 MBC가 개국 20주년을 기념하여 조사한 '한국인이 뽑은 가요 100곡' 중에서 1위를 차지한 불후의 명곡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북한의 월간 대중잡지 <천리마>(2005년 5월호)에서 노래의 창작 동기와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는데, 북한에서도 이 노래를 계몽기가요(일제강점기에 나온 노래) 중 가장 대표곡으로 꼽고 있다고 하니, 남북한을 아울러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국민가요라 할 수 있겠다.

민족의 애창곡을 작곡한 이시우 선생은 경남 거제 출신으로 '이만두'가 본명이다. 선생은 퇴직 이후에도 작곡 활동을 계속했으며, 주요 작품으로 '섬 아가씨', '눈물의 국경', '타향술집', '봄 잃은 낙동강', '님 없는 거제도', '인생의 역마차', '영도다리 애가', '아내의 사진', '진도 아가씨' 등을 발표했다. 달동네에서 어린 삼 남매를 돌보며 어려운 생활을 하던 선생은 1975년 1월 추운 겨울 하얀 첫눈이 내리는 날, 집으로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노래해 국민가수로 떠오르며, 1980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는 영광을 누렸던 가수 김정구와는 달리, 작곡가 이시우 선생은 고향에 노래비 하나조차 없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거제면민들의 건의를 받아들인 거제시는, 2013년 2월 거제면 거제농업개발원에 '눈물 젖은 두만강'의 악보를 새긴 노래비를 건립하고 선생을 추모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배 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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