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젤소미나는 떠돌이 차력사 잠파노에게 팔려간다. 젤소미나는 그와 함께 개조한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떠돌며 그의 조수로 일한다. 잠파노가 몸에 묶은 쇠사슬을 끊는 차력을 선보이는 동안 그녀는 북을 친다. 젤소미나는 잠파노에게 점점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잠파노는 그녀가 지금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듯 그녀를 함부로 대한다.

어느 밤, 젤소미나가 묻는다. "내가 죽으면 당신 슬프겠어요?" 잠파노가 대답한다. "왜? 죽고 싶어?" "이런 남자와 살 바엔 죽어버리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당신과 결혼도 할 거예요. 잠파노, 나 조금은 좋죠?" "시끄러워. 잠이나 자."

다른 여자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아무렇게나 두고 가버리는 남자를 아침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는 젤소미나. 여러 번 도망갈 수 있었지만 끝까지 잠파노 곁을 지키는 젤소미나. 어린아이 같은 젤소미나. 바보 같은 젤소미나. 그래서 너무 사랑스러운 젤소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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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길> 한 장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이 젤소미나를 연기한 이탈리아 출신 줄리에타 마시나(Giulietta Masina)다. 나는 대학 시절 서울 홍익대학교 앞 한 카페에서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 빔 프로젝터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하얀 벽에 가닿자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가 화면에 나타날 때마다 생기가 흘렀다. 오죽하면 흑백 영화인데 색채가 보이는 듯했을까. 마주 앉은 지인과 지인 뒤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줄리에타 마시나를 한참 번갈아 쳐다봤다. 결국 카페를 나오며 영화 제목을 물었는데 그게〈길〉(La strada·1954년 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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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길> 한 장면.

줄리에타 마시나가 이 영화의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아내이자 페르소나(Persona·영화감독 자신의 분신이자 특정한 상징을 표현하는 배우)라는 사실은 시간이 지나서 알았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예술 억압에 대항해 형성된 영화 운동, 네오리얼리즘(Neorealism). 그 선두에 섰던 두 사람은〈길〉외에〈카비리아의 밤〉(1957), 〈영혼의 줄리에타〉(1965) 등에서 호흡을 맞췄다. 줄리에타 마시나는〈카비리아의 밤〉에서 남자들에게 숱한 배신을 당하는 창녀로,〈영혼의 줄리에타〉에서는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후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아내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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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길> 한 장면.

하지만 그녀는〈길〉에서 가장 빛난다. 단언컨대 줄리에타 마시나가 연기한 젤소미나는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다. 그 눈동자, 미소, 몸짓, 순진무구함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젤소미나가 반쯤 미쳐 결국 죽었단 걸 알게 됐을 때, 그래서 눈물이 흐르는 건 비단 잠파노만이 아닐 것이다. 젤소미나 때문에 가슴이 무너지는 건 분명 잠파노만이 아니다. 젤소미나는 스스로를 상처 낼 때까지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이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덧붙임) 열아홉 번째 글을 마지막으로 '우보라와 영화보라' 연재를 마칩니다. 매달 독자 여러분 앞에 부족한 글을 내놓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좋아하는 영화, 감독, 배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 있어 행복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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