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 ~ 노량마을 7.8㎞. 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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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코스 이순신호국길은 남해군 고현면 차면마을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에서 시작해 설천면 노량마을까지 이어진다. 이 바래길은 지난 2012년 남해군이 마련해 놓은 '이순신 호국길'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순신호국길은 그야말로 이순신에서 시작해 이순신으로 끝나는 길이다. 또한, 거북선에서 시작해 거북선으로 끝나는 길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이순신의 '마지막 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 코스는 거리가 짧고 마을이 몇 개 없기에 길과 마을을 따로 하지 않고 뭉뚱그려 이야기하려 한다.

대자대비의 물결, 관음포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앞바다를 관음포라 부른다. '관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그 관음이다. 관음보살은 대자대비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불교 성자다. 기록에서는 고려말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정지 장군(1347~1391)의 '관음포대첩'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관음포로 불렸던 것 같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지역은 불교과 관련이 깊다. 학자들은 고려시대 위대한 역사(役事), 고려대장경 판각(나무에 새기는 일)을 관음포 일대에서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혹시 우리나라 3대 관음 성지 중 하나인 남해 금산 보리암과도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옛 관음포는 뭍으로 깊숙이 들어온 바다였다. 일제강점기 많은 갯벌이 매립되었는데 관음포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적어도 지금 고현면 탑동마을 앞까지는 바다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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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군 고현면 차면마을 등성이를 오르며 뒤돌아 본 관음포. / 이서후 기자

7년 전쟁의 끝, 노량해전

이 관음포에서 정유년(1598년) 11월 18~19일, 조선과 명나라 연합 수군 그리고 일본 수군 사이에 치열한 해상 전투가 벌어졌다. 노량해전이다. 임진년(1592년)에 시작해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일본군은 임진왜란을 시작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군을 계획한다.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 이순신은 굳이 돌아가려는 일본군의 퇴로를 막는다. 7년 동안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가족을 잃었고, 임금은 피난을 갔다. 이순신은 이렇게 조선을 짓밟은 원수들을 단 한 명도 살려 보내기가 싫었다. 노량해전에 앞서 이렇게 기도한다.

"이 원수들을 다 없앤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노량 앞바다에서 조명 연합 수군에 막힌 일본 수군은 남쪽 큰 바다를 향해 배를 돌린다. 하지만, 그들이 큰 바다로 생각했던 건 바로 관음포였다. 겨울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는 치열했다. 조선 수군은 사력을 다했고, 관음포에 갇혀 궁지에 몰린 일본군은 결사적이었다. 이 와중에 이순신이 유탄을 맞고 쓰러진다. 그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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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거북선. / 이서후 기자

이충무공 전몰 유허

관음포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 나간 등성이를 이락산이라 부른다. 이순신이 유탄에 맞아 숨진 후 뭍으로 옮겨졌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등성이 초입에 이락사가 있다. 그리고 입구 옆에 유난히 우뚝 솟은 큰 비석에 다음과 같은 한자가 새겨져 있다. 쓰러진 이순신이 유언처럼 남긴 마지막 말이다.

"戰方急 愼勿言我死(전투가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이락사는 한자로 '李落祠'라 쓰는데 '이순신이 순국한 것을 기리는 사당' 정도로 보면 되겠다. 이는 1832년 이순신의 8세손 이항권이 통제사로 부임해 유허비와 비각을 세운 후 이름 지은 것이다. 이락사는 아담하고 단정한 사당으로 묵직하고 단단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입구에 키 큰 소나무 대열은 굵고 우직했던 이순신의 성정을 상징하는 듯하다. 현판은 '이락사'와 '대성운해(大星隕海,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 두 개가 있는데, 모두 박정희 대통령이 적은 것이라 한다.

이락사 오른편으로는 솔숲 사이로 첨망대(瞻望臺)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이는 이락사가 있는 등성이 끝에 있는 망루로 지난 1991년 세웠다. 망루에서는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관음포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500m 남짓 걸어 첨망대로 가는 길 자체도 호젓하고 깔끔해 좋다. 이락사에 있는 이충무공 유허비와 비각, 이충무공 전적비, 첨망대 등 이락산 일대를 '관음포 이충무공 전물 유허'라 하는데, 국가 사적 제232호로 지정돼 있다.

첫 번째 거북선-이순신영상관

이락사와 첨망대까지 보고 돌아 나오면 왼편으로 커다란 배 모양 건물이 보인다. 용머리가 없어 판옥선인가 했는데, 상판이 덮인 모습이 귀선(龜船), 즉 거북선이다. 이는 남해군이 지난 2008년 12월 개관한 이순신 영상관이다. 영상관 내부 전시관은 이순신의 삶과 임진왜란 전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특히 노량해전 상황 중 학익진 장면을 재현한 모형이 인상적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 있는 이순신 영정도 눈여겨보자. 현재 이순신 표준영정은 1953년에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으로 조복(朝服, 조선시대 문무관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던 옷)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영상관에 있는 영정은 구군복(具軍服, 조선시대 무관이 입던 복장)을 하고 있다. 이는 서양화가인 정형모 화백이 1978년 그린 것이라 한다. 당시 정 화백은 이순신 장군의 본관인 덕수 이 씨 50대 남자를 수없이 관찰해 얼굴을 그렸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영상관에 있는 138석 규모 돔형 입체영상관에서는 노량해전 당시 상황을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다. 평일과 주말 상영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미리 알아보고 찾아가는 게 좋다. 영상관을 나오면 관음포 방향으로 넓게 데크가 만들어져 있어 바다를 보며 노량해전 당시를 상상해도 좋겠다.

영상관을 둘러보고 나면 본격적으로 바래길 13코스를 걷게 된다. 2016년 6월 말 현재 영상관 주변은 이순신순국공원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지난 2011년부터 총사업비 280억 원을 들여 차면리 관음포 일대 8만 7586㎡를 이순신을 테마로 한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공사는 거의 막바지에 이른 듯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바래길 초입을 찾기가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공사장을 이리저리 가로질러 해안을 향해 걸었다. 곧 차면마을 부두에 이른다. 사실 차면마을은 바닷가에서 좀 떨어진 19번 국도 곁에 있다. 바래길은 해안을 따라 이어지기에 아쉽게도 마을을 지날 기회는 없다.

이순신 어록을 따라

이락사와 첨망대가 있는 이락산이 해안으로 길게 뻗어 나간 모습을 왼편으로 끼고 해안 길을 걷는다. 바래길 이전에 이순신호국길이 이미 만들어진 곳이어서 확실히 이정표가 많다. 그리고 초입부터 이순신 어록을 담은 입간판이 줄을 서 있는데, 이 입간판은 13코스 곳곳에서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입간판에는 전체 노선도와 현재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 이정표 노릇도 하고 있다. 가장 먼저 서 있는 입간판에는 어록이 아니라 이순신의 호국정신을 표현하는 구국희생정신(救國犧生精神)이란 말이 적혀 있다. 나라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그의 희생정신을 담은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취지로 이순신의 다음과 같은 글귀를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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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코스 곳곳에 설치된 이순신 어록 입간판. / 이서후 기자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게 되면 온몸을 던져 일할 것이요, 쓰이지 못한다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과 열심히 농사를 짓는 일에 비슷한 무게를 담은, 삶에 대한 그의 진지한 태도가 잘 드러난 말이다. 이 역시 13코스 바래길을 따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어록 중 하나다.

바닷가 등성이를 걸으며

길은 곧 등성이로 접어든다. 능선을 따라 밭들이 누워있다. 그사이로 반듯하게 하얀 시멘트 길이 이어진다. 뒤를 돌아보면 관음포가 한눈에 보인다. 산등성이 밭 너머 바다, 바래길 특유의 풍경은 그대로다. 바다 건너편으로 하동과 순천이 지척이다. 광양제철과 하동화력발전소가 있는 곳이다. 특히 하동화력발전소의 커다란 굴뚝들은 13코스 내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한동안은 소쩍새가 울어대는 한적한 산길이다. 중간에 도로를 한 번 만나는데 아마도 이전 19번 국도의 일부인 듯하다. 현재 이 주변에서 제2남해대교와 연결되는 19번 국도 확장 공사가 한창인데, 도로를 직선화하면서 이 곡선 부분이 분리되어 버린 것 같다. 이 도로를 만나자 마자 바래길은 능선을 벗어나 바닷가로 내려간다.

아무도 찾아올 것 같지 않은 으슥한 해안이다. 갑자기 수십마리의 개가 나를 향해 짖는다. 해안가에 개 사육장이 있다. 바닷가는 물이 빠져 너른 갯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끄트머리에 살짝 걸친 모래사장을 걸어 건너편 등성이로 가는 길, 문득 만조가 되면 이곳까지 물이 차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법 물이 깊이 들어오게 생긴 갯벌이어서다. 아니나다를까 등성이 초입에 '만조 주의'란 경고판과 만조가 되면 바닷물이 넘치니 조심하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아담한 무논이 있는 산길을 오르면 다시 탁 트인 능선길이다. 바람에 무성한 풀이 한쪽으로 펄럭인다. 제법 깊은 편백 숲을 지나고, 솔숲도 지나면 내리막길. 바래길은 월곡마을로 내려선다. 바닷가 작은 마을이지만 논도 있고, 어선도 제법 많다. 주민들이 근면 성실하기로 소문난 마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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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길 13코스에서 두 번째로 만나는 거북선. 남해수협 감암위판장 건물이다. / 이서후 기자

두번째 거북선-감암위판장

월곡마을에서 종착지 충렬사까지는 해안도로를 따른다. 월곡마을을 지나고부터는 노량 앞바다, 남해대교를 보며 걷는 길이다. 건너편으로 하동 노량마을이 보인다.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라 바닷새들이 제법 많이 모여 있다. 아마도 물고기가 많이 모여 있어서 일 것이다. 하천 주변 습지와 바다를 가르는 긴 뚝방 같은 시멘트 도로와 그 도로 끝에 일렬로 앉아 있는 큰 새들이 인상적이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월곡교다. 월곡교를 지나면 해안도로는 아스팔트로 바뀐다. 국도 19호선과 연결되는 1024번 지방도다. 설천면의 아름다운 풍광을 끼고 달리는 설천해안도로가 이곳에서 시작된다. 차량 통행은 거의 없지만 가끔 지나는 차량은 속도가 높으니 조심해야 한다.

이 도로를 걷다 보면 감암마을이 나온다. 이곳에서 두번째 거북선을 만난다. 남해군수협 감암위판장이다. 지난 2009년 준공한 이곳은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영락없이 거북선 모양을 하고 있다. 거북선 위판장을 둘러보고 뒤를 돌아섰는데, 길 한 켠에 한글로 적힌 공적비가 있다. 그동안 바래길을 걸으며 한자로 된 공적비는 여럿 보았지만, 한글로 된 것은 처음이다. 글귀도 운치가 있다. "정덕원의 공적이 이곳에 살아있다." 비석 뒤에 있는 설명을 보니 정덕원 선생은 어촌 근대화에 힘쓰신 분이라고 한다. 감암마을을 지나면 제2남해대교 완성된 교량이 압도적인 높이로 우뚝 서 있다. 그리고는 곧 남해대교다. 길은 남해대교 아래를 지나 노량마을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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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염마을을 지나면서 만나는 압도적인 제2남해대교 교량. / 이서후 기자

이순신이 수호하는 노량마을

노량마을은 '충무공의 혼'이 지키는 마을이다. 이런 믿음으로 400년 전부터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 전설은 절정에 이른 듯하다. 당시 일본인들은 남해 곳곳에 있었지만 노량마을에는 살지 않았다고 한다. 남해섬과 육지를 잇는 중요한 곳이었는데도 그랬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노량에도 순사가 머무르는 주재소가 있었는데, 순사가 오기만 하면 미치거나 병이 들어 곧 돌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일본 형사들은 노량으로 발령 나는 것을 꺼렸고 발령이 나도 근무 시간에만 머물렀다고 한다. 오랫동안 주민들은 충무공의 영혼이 노량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충무공 혼은 충렬사에서 비롯된다. 충렬사는 관음포 앞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시신이 남해를 떠나기 전 임시로 매장된 곳에 세워졌다. 충무공이 떠난 지 30년 후 1628년 남해 사람 김여빈과 고승후가 이 자리에 사당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로부터 다시 5년 후 초가로 된 1칸 짜리 사당이 세워진다. 당시 남해현령은 충민공비를 세운다. 당시 사람들은 이순신을 충민공(忠愍公)이라 불렀다. 충무공이란 시호는 이로부터 10년 후에나 받게 된다. 충렬사도 이락사처럼 고즈넉하고 아담하다. 충렬사 주변은 아름드리 벚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두려움 탓일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충렬사를 없애기보다 벚나무로 둘러싸 버렸다. 봄이면 충렬사 주변이 벚꽃으로 흐드러진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장면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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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충렬사 입구. / 이서후 기자

충렬사 바로 앞바다에는 바래길 13코스에서 만나는 세 번째 거북선이 있다. 이번에는 진짜 거북선이다. 안내문을 보면 옛 기록을 참고해 1980년 1월 31일 해군 공창에서 복원했고, 원래는 해군사관학교에 전시하던 것이라고 한다. 이후 1999년 12월 31일 이곳으로 옮겨졌다. 관람료 500원을 내고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거북선 용머리는 남해대교 교량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그 아래 노량 앞바다는 이순신이 떠난 지 4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거칠게 살아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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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사 내부 충민공비. 이순신이 충무공 시호를 받기 전 불리던 것이라 한다. / 이서후 기자

바래길에서 만난 사람

남해 이순신 전도사 서재심

남해바래길 13코스 이순신호국길을 걷던 날, 누군가 그를 꼭 만나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여 다음날 남해군 고현면 관음포에 있는 이순신영상관에서 그를 만났다. 마치 영상관에 있는 모든 자료가 머리에 담긴 듯 질문을 할 틈도 없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말들은 이순신의 삶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크게 흠모하지 않으면 쉽게 공부하기 어려운 지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일러 '이순신의 애인'이라 스스럼없이 말하는 남해 사람, 서재심(53) 씨다.

"저는 남해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도 소풍을 이곳 관음포 이락사 주변으로 오고 그랬죠. 그래도 이순신은 잘 몰랐어요. 그냥 교과서에 나오니까 그런 사람이 있나 보다, 하는 정도였어요."

그러다가 그의 운명을 확 바꾼 일이 일어났다.

"36살 때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어요. 그 책으로 제 운명이 바뀌죠. 그때 정말 놀랐어요. 이순신이 남해에 이런 흔적을 남겼는데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구나, 아, 이순신 공부를 해야겠다 결심했어요. 그때부터 이순신 관련 책은 죄다 읽었어요."

서 씨는 이순신 공부를 하면서 지난 2006년부터 남해군 문화관광해설사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공부가 쌓이면서 그를 찾는 이들이 늘었다. 보는 이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라, 그러면 삶이 바뀐다고 설파했다. 그야말로 이순신 전도사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꿈에 이순신 장군 한번 보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지 15년 만인 지난 2014년 2월, 드디어 꿈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났다. 그리고 나자 이곳저곳에서 이순신 강의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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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전도사' 서재심 씨가 남해 충렬사 앞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 이서후 기자

"저는 주로 이순신 어록을 중심으로 강의를 해요. 태어나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54년 삶이 바로 성인군자구나, 사서삼경도 좋지만 이순신 어록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으니까요."

요즘 서 씨는 서울을 오가며 명강사 양상 교육을 받고 있다. 앞으로 이순신 관련 강의를 더욱 알차게 하기 위해서다. 이순신 이외에도 '남해 12경', '운명을 바꾼 만남' 같은 주제로도 강의를 계속할 생각이다. 문화관광해설사 일은 이제 그만두었다. 하지만, 누군가 부탁을 하면 휴일을 이용해 안내를 하기도 한다.

"이순신 장군 이야기잖아요. 듣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해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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