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중간 지점을 지나, 마지막 대도시 레온에서

◇7월 7일 카리온에서 테라리요스까지 17.5㎞

새벽 6시에 알베르게 문을 연다고 해서, 그전에 깨었는데도 계속 누워있다가 부엌으로 내려오니 아직 5시가 안 되었어요. 한 사람이 준비를 하고 있네요. 저도 아침 식사도 하고 느긋하게 준비하는데 준비하던 사람이 없어졌어요. 어디로 갔지? 6시도 안 되었는데? 알고 보니 창고 옆의 문으로 나가면 되는 거였어요. 괜히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오늘은 거리가 짧아서 서두르지 않고 메세타를 즐기며 걸었어요. 정말 광활한 평야들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어마어마한 콤바인이 밀을 수확하는 것도 보았는데 우리나라 수확 풍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네요. 중간중간 나무 그늘이 있어서 쉴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쩐 일로 늘 저보다 늦던 프랭크 부자(순례 초반부터 자주 마주친 미국인 아버지와 아들)가 제가 쉬고 있는데 저를 앞질러 갑니다. 어제 피터(아들)가 배탈이 나서 프랭크가 수프를 끓여 주던데 아마 그걸 먹고 힘이 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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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도시 사하군으로 가는 길에 본 일출. / 박미희

가르마를 탄 듯한 길을 따라 함께 걷다 보니 기대하지 않았던 바르(Bar)가 나왔어요. 무인지대라더니, 더욱 반갑네요. 바르에서 또 좀 쉬었어요. 거리는 짧지만 날씨는 무척 더웠거든요. 얼음 넣은 아쿠아리스(이온음료)를 먹고 나니 더위가 좀 가시는 듯합니다. 이제 3.5㎞가 남았는데 날이 더우니 좀 지루하네요. 아직 테라리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Templarios) 마을로 들어온 것 같지 않은데 첫 번째 알베르게(순례자용 숙소)가 나왔어요. 그런데 너무 황량해 보여요. 그래서 조금 더 걸으니 마을 안에 또 알베르게가 나오더라고요. 정말 작은 동네네요.

이곳 알베르게 도미토리(공동침실)는 8유로인데, 10유로 방도 있다고 해서 큰 맘 먹고 10유로 방을 선택했어요. 오늘은 좀 쉬어 볼까 하구요. 1층 침대만 4개 있는 방이었어요. 씻고 모처럼 낮잠을 조금 자고 나오니 프랭크 부자도 와있었고 한국인 아가씨 3명도 같은 알베르게예요. 스페인 삼인방 중의 아저씨와 자주 만나는 키 큰 스페인 아저씨도요.

혹시 슈퍼마켓이 있나 하고 산책 겸 나가봤는데 정말 날씨가 머리가 벗겨질 듯이 덥기만 하고 슈퍼가 없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알베르게 안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을 좀 살 수가 있어서 다음 날 먹을 과일을 좀 사긴 했어요. 알베르게에 샘이 있었는데 얼마나 물이 차가운지 모두 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담그는 거예요. 저도 따라서 해 보았더니 정말 시원해서 그동안의 발의 피로가 모두 달아나는 듯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프랭크의 발을 보니 완전히 엉망진창이었어요. 그 발로 아까 나를 앞질러 갔고 어떻게 그 발로 걷는지 신기할 정도였다니까요. 많은 사람이 심하게 아픈 몸을 끌며 걷기를 멈추지 않는데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아요. 만약 저였다면 포기를 했을 것 같기도 한데 저의 나약함을 아는지 다행히 조금 생기던 물집도 가라앉았고 특별히 심하게 아픈 곳이 없어 얼마나 감사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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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라리요스 마을 성당. / 박미희

오늘 같이 걷던 프랑스 신부님도 같은 알베르게라서 신부님이 집전하시는 미사를 함께 하고 한국인 아가씨 세 명과 함께 식사를 했어요. 수다 떨며 먹으니 더욱 맛이 있네요. 이 아가씨들은 잘 다니던 직장을 다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나왔대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으로 앞으로 1년 정도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더군요. 용기에 감탄했고 또 부럽기도 했어요.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올까요? 또 다른 꿈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어디서 근사한 소리가 들렸어요. 어제 카리온에서 만나 '오~! 꼬레아' 라고 외쳤던 집시 복장을 한 사람이 피리를 불고 있었고 젊은 아가씨가 기타를 치고 있었는데 아주 멋지더라고요. 그리고 그 아저씨가 주변 사람을 모아 이것저것을 주며 두드리라 하는데 그 소리 또한 듣기 좋았어요. 즉석에서 작은 콘서트가 열린 거예요. 이것이 바로 카미노의 매력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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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라리요스 마을 알베르게에서 열린 순례자들의 즉석 콘서트. / 박미희

행복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너무 더워 잠이 오지를 않아요. 10유로짜리 방도 아무 의미가 없네요. 똑같이 잠도 안 오고, 똑같이 덥고, 똑같이 코 고는 사람도 있고요.

7월 8일 엘 부르고 라네로까지 30㎞

새벽 4시쯤 나와 준비하고 있으니 한국 아가씨 중 한 명도 준비를 하러 나오네요. 같이 콘플레이크로 아침을 먹었는데, 한 명이 몸 상태가 안 좋아 준비가 늦어지겠답니다. 난 준비가 일찍 끝나서 밖으로 나와 있다 다른 알베르게에서 나온 사람들이 있기에 따라서 길을 나섰어요. 자세히 보니 얼마 전 만난 한국 청년 둘도 이곳의 다른 알베르게에서 잤던 모양이에요. 모처럼 만나니 또 반가웠죠. 환해지기 시작하면서 내 걸음으로 걷기 시작합니다. 빨리 걷는 게 덜 피곤하더라고요. 다른 사람과 보조 맞춘다고 천천히 걸으면 더 힘이 든 거예요.

이곳의 풍경은 또 다르게 펼쳐지네요. 멋진 해바라기들이 얼마나 장엄하게 서 있는지 황홀했어요. 요즘 계속 밀밭만 보아 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동트는 해바라기밭과 하늘의 조화가 정말 그림 같았어요.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없음이 너무 아쉬웠지요. 그런데 좀 쉬고 싶은데 문을 연 바르(Bar)가 없는 거예요. 거리를 잘 못 계산한 건지 어찌하다 보니 사하군(Sahagun)까지 13㎞를 쉬지 않고 걸어와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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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진 순례길. / 박미희

사하군은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 중 절반 정도의 위치에 있는 소도시에요. 시작할 때는 언제 끝날지 아득하기만 하더니 절반이라니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기쁜 마음에 절반이라는 표시가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고 바르가 있는 곳을 물어보니 거꾸로 다시 가야 한다는군요. 하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 또 나오겠지 하고 계속 가는데 이미 도시를 벗어나고 있었어요. 난 배도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은데 어쩌라구요~! 울고 싶을 지경이에요. 하는 수 없이 길가의 벤치에 앉아 비상식량으로 배를 채우고 남편과 딸에게 전화해서 어리광도 피우고 나니 좀 힘이 생겼어요.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앞뒤로 순례자로 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무리 혼자 걷는 걸 좋아해도 그렇지 이렇게 몇 시간을 혼자 걸으려니 죽겠더라고요. 분명히 길을 잘 못 들은 것은 아닌데 뒤에 오는 사람들과 만나려고 일부러 천천히 걷고 오래 쉬었다 가 봐도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사람들이 안 보이니 발은 무겁고 지루하고 더 피곤해 집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생소한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란 곳이 나타나네요. 일단 바르가 보이기에 무조건 들어갔죠. 거기서 배부르게 챙겨 먹고 앉아 있으니 그제야 아는 순례자들이 나타나는 거예요. 제 계획은 칼사디아 데 로스 에르미니요스(Calzadilla de los Hermanillos)에서 묵으려고 했는데 어찌하다 보니 다른 길로 오게 된 거지요. 알고 보니 중간에 갈라지는 길이 있었는데 그걸 못 보고 지나쳐 왔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결국 조금 더 걸어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라는 곳까지 와서 묵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30㎞를 넘게 걸어오게 된 거랍니다. 에효~!!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덥지 않아 다행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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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 부르고 라네로 마을에 있는 멋진 알베르게. / 박미희

알베르게를 찾아왔는데 아주 좋아요! 8유로라서 망설였는데. 주인아저씨는 나름 멋쟁이같이 특이하게 차려입고 있는데 영어는 일부러 안 하는 건지 스페인 말로만 하니 답답했지만(무슨 말로 해도 답답하지만) 그래도 부엌도 있고 마당도 멋지고 일단 만족입니다. 씻고 마당의 파라솔 아래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네요.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산들산들 불어주니 오늘의 노고가 살랑살랑 날아갑니다.

7월 9일 레온까지 39㎞

새벽에 일어나니 날씨가 몹시 춥습니다. 얇은 오리털까지 입고 출발 준비를 했습니다. 오늘은 먼 거리를 걸을 거라서 어제 짐을 부칠까 하고 마음이 잠시 흔들렸었지만 내짐은 이제 내가 지기로 결정, 한국인 청년과 자주 만나던 스웨덴 사람 샤롯데와 까리나 그리고 스페인 사람 짜로와 함께 걷기 시작했어요. 자주 만나고 같은 숙소에 묵고 하다 보니 이제 저절로 돈독한 사이가 되어가네요. 모두 유쾌하게 이야기 나누며 새벽을 맞는 기분은 역시나 좋습니다. 어느새 스페인 장다리 아저씨 하우메와 꺼꾸리 비센떼, 네덜란드에서 온 데레사가 따라오네요.

모두 바르에 들러 아침 식사도 하고 사진도 찍고 왁자하니 활기가 넘칩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 친구가 함께 있으니 더욱 좋아요. 오늘은 무리를 지어 걷고 있습니다. 전 웬만하면 혼자 걷는데 오늘은 함께가 더 좋은 날이에요.

하우메가 '사이먼 앤 가펑클'의 '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를 크게 틀어 함께 부르재요. 그런데 완전 영어권의 사람들이 아니라서인가요 모두 '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이 부분만 따라 하는 거예요. '음~음' 거리다가 그 부분만 큰 소리로요.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장대소! 진짜 많이 웃었어요. 그 노래를 몇 번이나 그렇게 따라 부르고 결국 그 노래는 새벽에 출발할 때 듣는 우리의 카미노송이 되었어요. 각 나라의 노래도 불러가며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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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도시 레온으로 가는 길. / 박미희

이젠 메세타도 끝나가고 있네요. 다른 사람들은 메세타를 걸으며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느낌으로 이야기하던데 전 다른 길과 별반 다르지 않게 생각이 되었어요. 생각보다 그늘이 없는 것도 아니고 간혹 건조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길이 있긴 했어도 생각을 다 바꿔 버릴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처음엔 흥겹게 시작을 했는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다들 말 수가 적어집니다. 햇볕이 뜨거워지고 목적지 레온(Leon)으로 들어가는 길이 다 온 듯, 다 온 듯 끝이 없더라고요. 좀 쉬고 싶은데 함께 걷다 보니 맘대로 되지 않아요. 대도시에서 알베르게 찾아 들어가려면 헷갈릴 수 있어서 함께 가야겠다 싶기도 해서 열심히 따라갔지요. 늦으면 자리가 없을 거란 생각에서인지 정말 걸음들이 어찌나 빠른지 완전히 지쳐서 알베르게에 도착을 했어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인데 이미 많은 사람이 들어와 있었어요. 이곳에서부터 걷기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다 보니 그런가 봐요.

레온으로 가는 길 바르에서 동료 순례자들과 아침을 먹으며 찍은 사진.jpg
▲ 레온으로 가는 길 바르에서 동료 순례자들과 아침을 먹으며 찍은 사진. /박미희

친절하고 분위기도 괜찮고 남녀가 구분되어있는 특징이 있네요. 전혀 모르는 남녀가 같은 방에 잔다는 게 처음엔 참 불편하고 적응하기 힘이 들었는데 이젠 하도 남녀가 같은 방에 묵으며 와서인지 감각이 무뎌져 별 의미는 없는 것 같아요.

씻고 나오니 스페인 사람 짜로가 울상입니다. 베드버그가 짜로를 물었대요. 어제 알베르게에서 그런 것 같다며 물린 곳을 보여줍니다. 다행히 듣던 것보다 심한 것 같지는 않았어요. 봉사자들과 함께 짜로의 모든 것을 소독하는 야단법석이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소문이 나면 순례자들이 불안해하기 때문이에요. 저도 갑자기 찝찝해지기 시작해요. 어제 같은 숙소에 묵었잖아요. 배낭을 통째로 들고 나와 다 널고 하나하나 살펴보았어요. 일단 육안으로는 없어 정리를 했지만 찝찝한 마음은 그대로예요. 한국인 아가씨 세 명도 같은 알베르게네요. 저보다도 먼저 와 있어 '어~! 벌써!' 하고 놀랐는데 알고 보니 한 명이 허리가 아파서 택시를 타고 온 거래요. 정말 얼굴도 퉁퉁 붓고 고통이 심한가 보더라고요. 여기서 일단 며칠을 있어 본다고 해요. 그러고 나서 계속 걸을지 생각해 본다고요. 참 걱정이네요. 걷는 동안 이런 일이 없어야 하는데…. 다행히 전 특별히 아픈 데가 없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또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레온성당으로 갔어요. 가는 길 주변으로 카페가 들어차 있었고 구불구불 골목길로 되어 있어 길은 좀 헷갈렸지만 오래된 도시 레온의 골목이 아기자기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레온 대성당은 고딕양식의 걸작품이라더니 그것을 보려고 수많은 관광객과 순례자들이 모여 있었어요. 조금 둘러보다 시내를 도는 관광 열차가 있어서 그것을 탔어요. 스페인의 어디나 마찬가지이지만 도시 전체가 역사박물관 같아요. 레온 시내의 볼만한 곳을 두루 돌아다니는데 영어설명이다 보니 또 답답함을 느끼며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했지요. 1세기경 로마인들이 설계했다는 이 도시에서 눈만 호강하고 왔네요.

레온에는 한식 파는 데가 없고 중국 음식을 먹으면 된다고 해서 울 딸이 가르쳐준 중국식당을 찾아 물어물어 갔는데 아뿔싸, 완전 실망~! 8시 30분에야 문을 연대요. 두 시간이나 기다릴 수 없어서 다시 돌아오는데 어찌나 덥고 거리는 먼지요. 왕복 한 시간 반이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헤맸어요. 몸은 피곤하지만 레온의 구석구석을 누비다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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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도시 레온 거리. / 박미희

돌아와서 어디서 밥을 먹을지 고민하고 기웃거리다 아까 지나온 골목의 바르로 가서 순례자 메뉴를 시켰습니다. 와~! 그런데 저기 프랭크 부자가 오네요. 밥 먹을 곳을 찾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거예요. 같은 알베르게래요. 참 자주 만나지죠? 식사하며 며칠 전 잠깐 함께 걸을 때 둘의 뒷모습을 사진에 담아 두었던 것을 보여 주었어요. 아버지와 나란히 걷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거든요. 맘에 들었나 봐요. 둘이 아주 좋아하면서 미국의 자기 와이프에게 이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더라고요. 나도 기꺼이 그러마 했지요.

함께 식사 후 숙소로 와서 성당에서 하는 순례자와 함께하는 예식에 참석했어요. 미사는 아니지만 모두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매일 오는 순례자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맞아주는 이분들 참 멋지고 고맙죠?

어둑해져 가는데 한국 학생 다섯 명이 들어오네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요. 다행히 아직 침대가 남아 있나 봐요. 이 친구들은 내일 이곳에서부터 걸으려고 한답니다. 알베르게에서의 첫날이라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기 때문에 내가 아는 만큼 안내를 해 주고 들어와 잠을 청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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