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 보다 사람을 선택했던 야구 선수, 그 결과는?

김성근 감독 뒤를 이어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야구부 감독을 했다는 정성국(70) 씨. 그를 처음 본 건 우연한 술자리였다. 그는 띄엄띄엄 기억을 더듬으면서 마산 야구 옛 이야기들을 풀어나갔다. 타지 출신인 기자로서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신기하고 놀라운 내용들이었다. 이후 그의 친인척을 '동원'해 어렵게 어렵게 인터뷰 자리를 마련했다.

짧게 끝난 야구 인생

솔직히 외모에서 왕년의 운동선수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뷰 전 악수를 하면서 맞잡은 투박하고 힘 있는 손에서 과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말을 구부리지 않고 곧게 차근차근 했다.

- 원래 마산 분이신가요?

"평생 마산에서 살았습니다. 1946년에 마산에서 태어나 마산무학초등학교, 마산동중학교,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를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상선 전문학교를 나온 선장이셨습니다. 덕분에 부유하지는 않지만 형편은 또래보다 나았습니다."

- 야구를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했습니다. 당시 우리 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김성길 씨(전 경남야구협회장)가 계셨는데, 그분 밑에서 야구를 배웠습니다. 당시 마산엔 야구 돌풍이 지금보다 더했습니다. 거의 모든 마산시내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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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국 전 마산상고 야구부 감독./임종금 기자

- 야구 포지션이 어떻게 되십니까?

"투수를 많이 했습니다. 물론 외야수로 타자도 했습니다. 오른손잡이입니다. 타자로는 5~6번 정도 쳤습니다."

- 그럼 학창 시절 기록이 어떻게 되는지요? 방어율은 얼마나 되셨는지요?

"지금과 달리 그 전에는 기록체계가 없었습니다. 방어율도 모르겠고, 다만 투수하면서 홈런을 맞은 기억은 없습니다. 그리고 학생 때도 그렇고 실업야구에 가서도 후보를 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는 야구 선수로서는 상위권에 있는 선수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제일은행(현 스탠다드차다드 은행) 야구팀 선수로 스카웃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1965년에 제일은행에 들어갔는데 그해 겨울에 허벅지를 다쳤습니다. 동계훈련을 하다 허벅지 근육파열이 된 겁니다. 당시 제일은행에 김차열, 김우열 같은 유명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의술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결국 한 시즌만 하고 내려왔습니다."

- 아직 젊으셨는데, 그 뒤로 야구할 기회가 없었습니까?

"사실 한 번 더 있었습니다. 야구를 그만두고 제가 마산에 와서 제일은행 지점에 말단 행원으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당시 은행업무는 주판으로 계산하고 손으로 일일이 기록하는 시스템입니다. 제가 주산을 좀 했습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종일 산수 문제 풀리고 주판 가르치고 일 년 내내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걸 안 까먹고, 고등학교에서도 야구 특기생으로 왔지만 주산을 그런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지점에 있는데 야구부 단장(당시 제일은행 상무)님이 지점 순시를 하는 겁니다. 뒤에서 제가 일 하는 걸 보고 있으니 다리도 괜찮은 것 같고 일도 그런대로 하니 멀쩡해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어느 음식점으로 부르더라고요. 상무님이 대뜸 '발령 났다. 나랑 같이 당장 서울(야구부) 가자'는 겁니다."

- 그럼 야구를 다시 하셨겠네요.

"그때 따라갔으면 아마 지금까지 야구밥 먹고 살았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제가 불려가기 전에 간부들끼리 얘기하는 걸 슬쩍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누구를 보내고 정성국이를 서울로 보내자'는 얘기였습니다. 그럼 나 때문에 선배가 피해를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미안한 마음도 들고…. 마음으로는 반반이었습니다. 고향인 마산에 있는 것도 좋고 야구도 좋고. 야구를 하자면 서울에 가야 하는데. 그래서 상무님께 저는 '고향에 있고 싶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 말단 행원이 임원의 인사발령을 거부한 거네요.

"그래서 난리가 났죠. 제 위에 차장님은 크게 혼이 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제가 듣기로는 마산상고 야구팀 감독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얼마 안 됩니다. 제 앞에 김성근 감독이 처음 감독생활을 마산상고에서 했습니다. 한 3년 했나? 그리고 서울로 갔습니다. 그 뒤를 이어 제가 한 분기만 감독을 한 겁니다. 1969년에 잠시 했습니다."

- 한 분기만 했다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당시를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엔 은행업무를 하면서 은행 배려로 감독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김성근 감독도 기업은행 마산지점에서 일을 하면서 감독을 했습니다. 1년에 3번 큰 대회가 있는데 청룡기, 전국체전, 황금사자기가 있습니다. 저는 김성근 감독 뒤를 이어 전국체전만 치러주고 바로 은행에 복귀했습니다. 당시 전국체전에서 마산상고가 3위를 했습니다. 제 다음으로 제일은행 동료인 김유성 씨가 감독직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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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국 전 마산상고 야구부 감독./임종금 기자

- 그럼 이것이 야구와의 인연은 끝인가요?

"아, 1975년쯤 될 겁니다. 제가 그때는 경남은행에 있을 때였는데, 김희련(전 국가대표) 감독이 마산상고 감독을 하고 나갔는데 그 뒤를 이어 또 청룡기 한 대회만 치르게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때 대구상고에게 져서 8강밖에 못했습니다. 또 나중에 1990년대 초에 마산야구협회 전무를 잠시 했습니다. 왜냐하면 경남야구협회에서 당시 마산고와 마산상고가 치열하게 경쟁을 해서 분란이 좀 있었습니다. 경남도체육회는 상급기관이거든요. 경남도체육회가 상급기관으로서 직권으로 저를 전무에 임명하고 분란을 조정하라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야구계에서 주로 '불 끄러 다니는' 일을 자주한 셈이다.

- 혹시 지도했던 야구 선수 중에 생각나는 선수가 있나요?

"유두열이 생각납니다. 나중에 롯데 가서 국가대표도 하고 그랬죠. 참 잘했습니다."

- 사실 저는 타지 출신이라서 마산야구가 어느 정도 위상인지 지금은 감이 잘 안 옵니다.

"일제시대부터 마산은 야구를 일찍 받아들였습니다. 1950년대 '4도시 대회'라는 게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야구선진 도시들끼리 도시별 대표팀을 꾸려서 붙는 겁니다. 그때 마산, 서울, 인천, 대구 4개 도시가 겨뤘습니다. 이 당시 김상대 씨라고 부산상고 출신이신데 청룡기 대회에서 1호 홈런을 치신 분입니다. 한국전력 마산지점에서 근무하면서 많이 애를 쓰셨고, 제 초등학교 감독이셨던 김성길 선생님도 마산을 대표하는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박상근 선생님. 이 분은 일본대학을 나와서 일본 야구팀에서 뛰었습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에서 가장 센 대련야구팀에 있었습니다. 대련은 지금 중국 영토지만 당시는 일본 영토였으니까요. 그러다 건강이 안 좋아서 국내로 들어와서 야구 붐이 일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1963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4도시 대회도 주관하고 사회인 야구팀도 만들고 했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분입니다. 또 이호헌 KBO 초대 사무총장이 마산상고 출신인데, 하일성 씨 처럼 야구해설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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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국 전 마산상고 야구부 감독./임종금 기자

- 혹시 프로야구 출범 때 마산 연고 팀 창단 얘기는 없었나요?

"사실 지역에 큰 기업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창단 얘기는 없었습니다."

물러설 줄 아는 사람

- 실업팀에서 선수가 운동을 그만두면 어떻게 되나요?

"아까 말했다시피 똑같이 다른 직원들처럼 일합니다. 1970년에 경남은행이 설립되고 저는 1971년에 경남은행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다 1980년부터 마산시 중앙동 지점장, 신마산 지점장, 창원시 반지동 지점장 이런 것도 하고 본점에 들어와서는 경남은행 청사 신축본부장을 맡았습니다."

- 지점 위치만 들어보면 상당히 중요한 지점에서 일하신 것 같은데요.

"어쩌다 보니 시금고 지점장을 몇 번 했습니다. 마산시 중앙동 지점이 마산시금고, 창원시 반지동 지점이 창원시금고를 유치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들하고도 많이 알게 됐죠. 세입, 세출 업무를 다 은행에서 해줍니다. 물론 은행은 시금고를 유치하면 융통 가능한 돈이 크게 늘기 때문에 금고 유치를 하려 애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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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국 전 마산상고 야구부 감독./임종금 기자

- 공무원들과 일 하다 보면 특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나요?

"하루는 마산시청 회계과장이 온 적이 있습니다. 어느 업체에서 지방세를 낸 기록이 없는데, 회계과에서 조사를 나가면 경남은행에 냈다고 은행 직인이 찍힌 영수증이 있는 겁니다.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래 조사를 해 보니 업체에서 위조한 은행 직인 도장을 찍어서 보여준 겁니다. 고발을 해야 하는데, 고발하면 애꿎은 어린 경리만 잡혀갈 게 아닙니까? 그래 제가 기업 사장을 만나서 도장을 압수하고 '세금 내라. 세금만 내면 이번은 넘어가 준다'고 압력을 넣어서 조용히 해결한 적 있습니다. 문제를 키우면 결국 사장만 내빼고 경리만 잡혀가니까 그랬죠."

- 경남은행 청사 신축본부장이라는 직함은 뭔가요?

"지금 경남은행 설계도를 제가 골랐습니다. 1990년 신축 얘기가 나왔을 때 처음엔 3500평을 하라고 임원들에게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헌데 이왕 짓는 거 크게 짓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제가 설계사무소에게 얘기를 해서 계속 건평을 늘렸습니다. 나중에 최종적으로 15층으로 높이기로 했습니다. 설계가 마무리되고 나서 행장님이 절 부르시더군요. '고생했다. 뭐 하고 싶은 요청이 있으면 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15층은 조금 적습니다. 17층으로 합시다'고 했습니다. 빙그레 웃으시더군요."

- 제가 보기엔 9년 만에 지점장도 다시고, 승진이 빠르신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윗분들이 잘 봐주셔서 그런가. 저는 승진인사 때 누락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사내 포상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 그런데도 임원은 안 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오기 전에 이미 경제가 휘청거렸습니다. 명예퇴직했는데, 저도 당시 51살이었고 이만하면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후배들도 올라가야죠."

- 참, 야구장에도 안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랍시고 야구장에 기웃대면 그얼마나 후배들이 불편하겠습니까? 떠났으면 깔끔하게 정리하고 매듭을 지어야지 얼쩡거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면 은행 나오신 이후 무슨 일을 하셨나요?

"엉뚱한 일 하지 말고 배운 대로 스포츠 샵 같은 거 소일삼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역에 신도기업이라고 알루미늄 특수강을 참 잘하는 기업이 있습니다. 일거리가 없어서 직원들 놀리다가 망하게 생겼거든요.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주변에 알아보니 해경이나 해군이나 관세청이나 굴리는 쾌속선이 전부 알루미늄 재질로 된 겁니다. 그래서 이거를 이 친구에게 줘야겠다 싶어서 부산도 가고 군산도 가고 했죠. 알아보니까 코리아타코마(한진중공업 마산조선소. 천안함 제작 업체)에서 납품을 하는데 코리아타코마에 알루미늄 전문가는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친구를 연결해서 납품하게 했습니다. 대개 이런 식입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과 연결해서 일을 하고 싶은데 어색하고 그러면 제가 중간에 나서서 특사 노릇을 해주죠. 이런 식으로 소일하고 지냅니다."

- 그럼 혹시 선거나, 무슨 단체를 조직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건 절대 안 합니다. 그리고 은행에서 간부로 있었다고 지역에서 행세하면 욕먹습니다. 공직이건 은행이건 나오면 다 평범한 시민 아닙니까. 제가 은행에 있을 때 잘해 준 게 뭐가 있겠습니까?"

- 그렇다면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는 이유가 뭘까요? 베푼 것도 없는데.

"내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지들끼리 잘 되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만나야지. 누군가 뭐가 필요하다고 하면 저는 거절은 안 합니다. 자기 필요에 따라서 나를 찾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 필요에 맞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심부름만 해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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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길 전 경남야구협회장과 정성국 전 마산상고 감독./임종금 기자

- 그러면 앞으로 따로 목표나 욕심은 없으십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이렇게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야죠."

따지고 보면 야구 감독을 맡은 일, 경남야구협회 전무로 있었던 일, 업체를 연결해주는 일에서 그는 '해결사' 역할을 맡았다.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이 그를 찾는다. 평생 남을 위해서만 사는 손해 보는 인생 같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외롭지 않은 것 같다. 인터뷰하면서도 워낙 아는 사람이 많아서 여러 차례 인터뷰가 끊겼다.

야구에서 투수는 선택하는 사람이다. 어디로 무슨 공을 던질지 선택하기에 따라 경기가 갈린다. 그는 평생 마산에 살면서 이익 대신 사람을 선택했다. 그 덕분에 마산이라는 지역공동체가 이만큼이라도 유지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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