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겨울엔 참 추웠다. 산에서 나무 해와 군불 지피던 때 이야기다. 자기가 소유한 산이 아니면 나무하기도 정말 힘들었다. 한나절 이상 힘들게 고생해서 해 놓은 나무를 산 주인한테 통째로 뺏길 때도 있었다. 나뭇단을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먼 거리를 뛰다시피 다니기도 했었다. 여러 나무 중 제일 인기 있는 품목은 '동다리'이거나 '갈비'였다. '동다리'는 삭정이의 경상도 방언인데 살아있는 가지에 붙어있는 말라죽은 나뭇가지를 말한다. '갈비'는 말라서 땅에 떨어진 솔잎이다. 솔가리 또는 검불로도 불리는데 불쏘시개로 안성맞춤이다. 가마솥에 밥할 때 뜸 들이는 용도로도 좋았다. 요즘 아이들한테 갈비 얘기하면 식육점이나 식당에 가자고 조른다. 그 갈비랑 이 갈비는 다르다고 얘기해도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

그 시절 '동다리'를 한 짐 해 와야 밥을 먹을 수 있었던 소년은 부리나케 삭정이를 모았다. 동생보다 더 많이 모아야 밥도 더 많이 먹을 수 있고 형님 체면도 조금 세울 수 있었다. 불 담 좋은 삭정이는 온 산을 헤매 다녀야 겨우 한 짐 나올까 말까 한 상황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눈앞에 엄청난 삭정이가 나타났다. 가지에 말라붙은 게 아니라 통째로 삭정이가 된 나무가 보인다. '이제 동생보다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네. 체면도 세우고, 밥도 많이 먹을 수 있으니. 혹시 산신령님이 보내주신 건가?' 앞뒤 가릴 것 없이 퍼질러 앉아 나무에 마구 톱질을 해댄다. 이 나무 하나만 해도 오늘 임무 완성이다. 가슴이 뿌듯해 미칠 지경이다. 그야말로 '운수 좋은 날'이다. 어, 그런데 어딘가 좀 이상하다. '살아 있는 나무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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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귀나무 꽃. /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

그해 6월 어느 날. 소년은 밭갈이 나선 소를 잡아끌고 있다. 아버지는 소 등에 쟁기를 채워 밭이랑을 만드신다. 소도 지치고 사람도 지칠 무렵 잠시 휴식을 취한다. 고삐가 느슨해진 틈에 배고픈 소가 환장한 듯 뛰어가 나무 잎사귀를 뜯어 먹는다. 소년은 갑자기 의아해진다. '무슨 나무지? 얼마나 맛있으면 소가 저렇게 눈이 뒤집힐 만큼 좋아할까?' 뒤에 알고 보니 소가 제일 좋아하는 '소쌀밥나무'였다. '소쌀밥나무'는 표준말로 자귀나무다. 옛날 시골에서는 '자귀나무 움이 트면' 늦서리 걱정 없이 곡식을 파종하고, '첫 꽃이 피면' 팥을 심었다고 한다. 자귀나무는 겨울잠을 오래 잔다. 진달래도 피고, 철쭉도 피었다 지고 난 5월 하순에야 새순이 돋아나는 잠꾸러기 나무다.

박성우 시인은 '자귀꽃'이란 시에서 이런 자귀나무 특성을 게으름뱅이 나무로 표현하고 있다. 통째로 잘라 나뭇짐에 넣으려 했던 그 나무. 윤병렬 소년이 톱날을 들이댔을 무렵에야 화들짝 놀라 '저 살아있어요'라며 눈을 치켜뜬 그 나무다. 시집 <가뜬한 잠>으로 제25회 신동엽 창작 문학상을 수상했던 박성우 시인의 시 '자귀꽃' 전문을 옮겨 본다. 필자가 보기엔 자귀나무 꽃의 모든 것을 한 편의 시로 재미있게 압축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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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지 주변에 핀 자귀나무 꽃. /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

게으름뱅이 자귀나무는

봄을 건넌 뒤에야 기지개 켠다.

저거 잘라버리지, 쓱쓱 날 세우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연초록 눈을 치켜뜬다.

허리춤에서 부챗살 꺼내 펼치듯

순식간에 푸르러져서는 애써 태연한 척,

송알송알 맺힌 식은땀 말린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쪼매 늦었죠, 니년은 그새

밀린 지각비가 얼만 줄이나 알어?

양지다방 김양은 허기만 더할 말대답 대신

스쿠터 엔진 소리로 콧방귀를 뀐다

확연한 빚만 켜켜이 쌓여 있는 여름,

자귀나무 연분홍 꽃잎이 헤프게 흩날린다

배알도 없이 헤프게 으응 자귀 자귀야

야들야들한 코맹맹이 꽃 입술

엉덩이 흔들어 날려보낸다 아찔한 속살

조마조마하게 내비치기도 하면서

(전 괜찮아요, 보는 놈만 속 타지)

오빠 냉커피 한잔 더 탈까, 지지배

지지배배 읍내 제비 앞세운 김양이 쌩쌩 달려나간다

연분홍 자귀꽃 흩뿌려진 땡볕 배달길,

따가운 빚이 신나게 까지고 있다

자귀나무는 이름이 꽤 많다. '잠자는 귀신'이라고 부르다가 자귀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가장 많이 회자된다. 실제로 비가 오는 흐린 날이나 밤이 되면 잎들이 서로 끌어안고 잠자듯 맞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부부 금실과 화합을 염원하며 조상들은 자귀나무 이름을 합환목, 합혼수, 야합수, 유정수라고도 불렀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밤마다 같이 자는 나무. 부부 금술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자귀나무의 특성은 아까시나무와 비교하면 더욱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아까시나무는 겹잎 자루를 중심으로 하나둘 세어 나가면 끝에 있는 잎 하나가 남는다. 반면에 자귀나무 잎은 양쪽 잎이 완전히 겹쳐져 홀아비 잎이나 과부 잎이 생기지 않는다. 옛 사람들은 자귀나무를 집 마당에 심어 놓으면 부부 애정이 좋아지고 가정이 화목해진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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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쳐진 자귀나무 잎사귀. /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

자귀나무는 날이 어두워지거나 밤이 되면 새 깃털처럼 작은 잎들이 일제히 맞붙어 아침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수면운동을 한다. 그야말로 야합을 하는 것이다. 건드리면 순식간에 접혀지는 미모사처럼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수면 야합 모드로 바뀌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수면 운동은 잎자루 아랫부분에 있는 잎바늘에서 생긴다. 빛의 강약이나 자극으로 인해 잎바늘 속의 수분이 일시적으로 빠져나오기 때문에 잎이 닫히고 잎자루가 밑으로 처지는 현상이라고 한다. 일본 이름 '네무노키(합환목)'도 이러한 수면운동으로 잠자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자구낭(잡귀나무)'이라 했는데, 자귀나무를 집 안에 심으면 학질 같은 우환이 생긴다고 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자랄 때 자귀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다 모기에 물려 학질이 걸리는 것을 막자는 뜻도 있다고 한다. 자귀나무 꽃은 모기를 비롯한 여러 곤충들이 무척 좋아한다. 꽃이 피면 여러 곤충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든다. 말라리아는 1970년대에 사라졌다가 1993년 이후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자귀나무 꽃을 찾아드는 모기류들 때문에 말라리아에 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나무와 꽃이 운치 있어 보여 자귀나무 아래 차를 주차시키면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 학질이 아닌 곤충 배설물 세례를 받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자귀나무는 꽃이 무척 예쁘다. 꽃 피는 기간도 한 달 정도나 된다. 더운 낮 시간보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분홍 명주실을 얹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공작 깃털 같기도 한 꽃은 수술이다. 15개에서 20개 정도가 우산살처럼 매달린다. 윗부분은 담홍색이고 아랫부분은 흰색에 가깝다. 정말 오묘한 색깔을 뽐낸다. 영어 이름은 비단나무(Silk Tree) 또는 비단꽃(Silk flower)이다. 오묘하고 아름다운 꽃모습을 비단에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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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에 흩날리는 자귀나무 열매. /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

자귀나무는 논이나 밭에서 쟁기질하던 소가 유턴하는 지점. 햇볕이 잘 드는 밭 가장자리 부근에 잘 자란다. 등산로 입구, 절개지가 많은 임도, 야트막한 언덕 부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대만과 동남아시아 여러 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생긴 모양은 조금씩 다르다. 열대지방에서 본 자귀나무 열매는 엄청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자귀나무 열매는 콩과 식물이라 콩 열매처럼 꼬투리 안에 대여섯 개의 종자가 들어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자귀나무 열매 아래 서 있으면 달랑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들린다. 콩깍지 같은 열매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이 소리를 들은 옛날 사람들은 여자들의 수다처럼 시끄럽다는 뜻으로 여설수라 부르기도 했다.

6월은 자귀나무 꽃의 계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곳곳에서 자귀나무 꽃을 볼 수 있다. 가장 늦게 잎을 틔우는데도 어느 순간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맺는 신기한 나무.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일을 시작하는 필자와 많이 닮은 나무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있는 나무들 중 자귀나무가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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