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까지 공부하는 평생교육시대, 열정적인 평생교육사에게 묻는다

'친구 따라 대학 갔다'

선애 씨는 북마산(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나고 자랐다. 딸 넷, 딸부잣집 맏이였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선애 씨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동생들은 우겨서 인문계에 갔지만 선애 씨는 스스로 상업계 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집 형편이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 스스로 그게 좋겠다고 결론을 낸 속 깊은 딸이었다.

"학교 졸업하고 스물한 살 정도에 삼성전자서비스사업부 경남지사에 입사했어요. 거기서 한 7년을 일했는데 업무 강도가 굉장히 높았어요."

그때의 일 버릇이 굳어져 선애 씨는 지금도 어딜 가면 '악착같이 일한다', '정말 열심히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선애 씨 주변에는 직장을 다니며 야간대학에 가는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친구들은 야간대학 가서 공부하기도 했는데 저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다른 걸 배웠었어요. 공예나 테니스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꽃꽂이를 시작했는데 저한테 잘 맞는 걸 찾은 것 같았어요."

친구와 함께 같은 선생님에게서 똑같이 꽃 수업을 받았는데 선애 씨가 훨씬 더 꽃을 잘 다룰 수 있었다. 꽃에 흠뻑 빠진 선애 씨는 꽃꽂이 강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직장을 그만둔다. 꽃꽂이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다 선애 씨를 묵묵히 응원해주는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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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애 평생교육사./서정인 기자

"내서종합사회복지관이 개관을 하던 때에 원장님과 후원 차원에서 꽃을 해드리러 갔어요. 그때 복지사로 일하고 있던 남편과 연이 닿아서(웃음) 결혼을 했습니다."

선애 씨 삶에서 허투루 버리는 시간은 없었던 듯했다. 결혼을 하고서는 압화 공예 공방을 했고, 친구와 식혜를 만들어 3일 동안 난전에서 팔아본 적도 있다며 옛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점심시간이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만나서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하는데 저는 그게 좀 안 맞았어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날 친구가 방송대(방송통신대학교)라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 교육학과에 들어갔는데 흥미롭고 재미있다며 선애 씨에게 추천을 했다.

"아이들이 어려서 육아에 매달려있는 상황이었어요. 친구 말을 흘려듣고 한창 지내던 99년 가을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도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 때 나름 공부도 빠지지 않게 했고 회사에서도 인정받으며 일했는데… 아이들을 키우고 나서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니까 아무 모습도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친구가 말했던 방송대를 떠올린 선애 씨는 그다음 해 곧장 교육과에 입학했다. 학기 시작 후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1학기 성적이 예상을 훨씬 밑돌았다. 충격이었다. 선애 씨는 꾸준히 해왔던 신문배달 일도 그만두고 공부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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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애 평생교육사./서정인 기자

"사실 신문배달 일도 누가 다이어트가 된다고 해서(웃음) 시작했는데… 새벽마다 제 느슨한 마음과 싸우면서 정말 많은 걸 느꼈어요. 그래서 꾸준히 해왔었죠. 근데 생각보다 성적이 너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도 그만두고 공부에 집중했어요."

3학년이 된 선애 씨는 주택공사에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한다.

"고객지원팀 업무에서 삼성전자를 모델로 하는 부분이 있대요. 제가 예전에 삼성전자서비스사업부에서 일했었으니까 일하게 됐어요. 2002년부터 주택공사에 한 4년 정도 근무했어요."

평생 내가 열정 쏟을 일, 평생교육을 만나다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였다. 선애 씨는 우연히 한국평생교육사협회 부울경 지회가 생긴다는 소식을 듣는다. 선애 씨는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이미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였다. 자격증이 생기긴 했지만 사실 그게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 했다.

"평생교육? 그게 뭐지? 싶었어요. 코끼리 뒷다리 만지는 기분이었죠. 공부 동아리 같은 걸 함께 하는 언니들이 있었는데 그 언니들이 부산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같이 부산에서 열리는 창립총회에 갔어요. 가니까 거기서 제가 제일 어린 거예요. 얼떨결에 부지부장을 맡았죠."

평생교육에 대해 더 깊게 공부하는 동아리도 꾸렸다. 늘 그렇듯 그녀는 대충하는 성미가 못 됐다.

"부산에서 동아리 활동 하는 날이면 6시 '땡' 하면 퇴근했죠. 곧장 창원시외버스터미널에 가서 주차해놓고 해운대 가는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갔어요. 동아리 모임에 가는 게 저한테 도움이 많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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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애 평생교육사./서정인 기자

공부하고 토론하고 심야버스를 타고 창원으로 돌아온 뒤 설익은 운전 실력으로 긴장하며 집에 와서 다음 날 출근하는 고된 스케줄을 자청했다. 즐거움과 성취감 없이는 하기 힘든 과정이었을 테다.

"너무너무 좋았어요. 방송대 다닐 때는 사실 주부, 아내, 엄마 역할을 소화하면서 학교 과정을 따라가기에만 급했죠. 그런데 뭔가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 뭉쳐서 공부를 해나가니까 좀 더 깊이 있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정기총회 같은 거 하면 제 돈 들여서 가고 1박 2일 연수에도 다녀오고 그랬죠."

선애 씨는 공부하면 할수록 평생교육이 나와 꼭 맞는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평생교육 분야가 굉장히 넓어요. 평생교육 활동 중에서 내가 유아, 청소년, 성인, 어르신 등 어떤 대상에게 관심이 있는지도 진로를 정하는 데에 중요하고요. 지자체에서 행정적으로, 정책적으로 활동하고 싶은지, 시민 의식에 따라 NGO에서 활동하고 싶은지, 민간 평생교육기관이 맞는지…. 동아리 활동하면서 평생교육 중에서도 나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많이 고민했던 것 같아요. 저는 지자체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해졌었어요."

그녀는 곧장 대학원에 진학하려 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선애 씨의 남편도 대학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두 사람의 학비는커녕 입학금 외의 다음 학기 등록금도 없는 상황에서 일단 입학을 했다. 가계는 늘 적자였다. 그나마 아이들이 아직 어려 큰 돈 들어갈 데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지자체에서 일하고 있는 평생교육사 나이가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정도로 굉장히 젊어요. 저는 그때 이미 4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더 늦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남대 교육학과 평생교육 전공을 했는데 4학기가 되어서는 아이들 금반지도 팔고, 현금도 이리저리 힘들게 만들어서(웃음) 그렇게 석사 공부를 했죠."

선애 씨는 다니던 주택공사를 그만둔 후 경남대 경남평생학습연구센터에 연구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평생교육사 활동을 시작한다. 늘 선애 씨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지금 같은 일상을 유지하느냐', '힘들지만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느냐' 이 갈림길에서 선애 씨는 항상 후자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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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애 평생교육사./서정인 기자

타지의 평생교육 현장에서 보낸 시간

2010년 선애 씨는 꿈을 이룬다. 울산 북구청 평생교육사 채용공고에 응시해 합격했다. 혼자 울산으로 떠나야 했기에 선애 씨 마음이 마냥 기쁠 수만은 없었다. 하루 동안 고민하던 남편은 그녀에게 본인과 아이들 걱정은 말라며 힘을 북돋아 주었다.

"전국 최초로 지자체의 과 안에서 직원을 두고 평생교육사가 관리직으로 들어가는 자리였어요. 울산에서 5년 정도 평생교육사로 일했죠."

업무를 시작하고 나서 너무나 마음이 쓰이는 일들이 많았다. 특히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문해(文解: 문자를 읽고 쓰는 일) 교육은 특히 신경을 쓰려고 했다. 원래부터 선애 씨가 관심 있었던 분야 중 하나이기도 했거니와, 단순히 글자를 가르치는 일에 앞서 어르신들에게 넓은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져갔다.

"저희는 지자체 사업을 하는 거니까 한글교실 같은 걸 하면 사진이라도 자료로 남겨야 해요. 어르신들이 사진을 못 찍게 하시는 거예요. 글자 못 배운 걸 부끄러워하는 분들도 계셨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건 'ㄱ, ㄴ' 가르쳐드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에 앞서 어르신들이 글을 배우지 못한 이유, 개인이 아닌 시대적인 문제가 어르신들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걸 알게 하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 중요했어요. 그걸 수업하는 선생님들한테도 굉장히 강조하고 신경을 많이 썼어요."

선애 씨는 어르신들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 봄 소풍을 계획한다. 각 수업반별 소규모로 가는 게 아니라 어르신들을 한꺼번에 모셨다.

"버스를 빌려서 어르신 120명을 모시고 경주로 소풍을 갔어요. 어르신들이 놀라신 거예요. 본인이 가는 문해교육 반에는 8~10명밖에 없는데, 다 모이니까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은 거예요. 노래자랑도 하고 글자 맞추는 게임도 하고 그랬죠. 울산 북구 평균 연령이 그때 33.3세였어요. 한글교실 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있어도 참여하시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요. 소풍 다녀오고 나서 많이 분위기가 좋아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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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북구 늦깎이 학생 골든벨 행사./이선애 제공

선애 씨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현장을 누볐다. 2014년에는 골든벨을 하기로 했다. 지자체뿐만 아닌 다른 평생교육 관련 기관·단체도 힘을 모았다. 함께 했기에 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행사였다. 선애 씨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뭉클하다고 했다.

"원래는 각자 행사를 하려고 했는데 예산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그럼 다 같이 골든벨을 해보자고 하니 모두 '오케이'를 했어요. 시간이 빠듯했고 준비할 것은 굉장히 많은 행사였어요. 각자 역할을 맡고 부족한 예산은 공모사업을 통해 지원받고 했죠."

어르신 100명에게 50문제를 미리 드렸다. '불났을 때는 어디?', '욕실에서 미끄러져 다쳤다면 어느 병원에 가야 하나?' 등 실생활에 필요한 기초지식 위주로 문제를 만들었다.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들 하셨는지 탈락자가 잘 안 나오는 거예요. 나중에는 문제를 변형해서 내기도 했죠. 어르신들이 '한 번만 더 하면 더 잘할 수 있는데…' 이러시면서 무척 즐거워하셨어요. 방송 프로그램 '도전! 골든벨'이랑 정말 똑같이 했거든요. 오셨던 분들만 150명, 내빈까지 합치면 200명 정도가 10시부터 4시까지 함께 한, 지역에서도 굉장히 큰 관심을 받은 행사였죠."

경남도가 나서서 평생교육시대 이끌어야 해

선애 씨는 창원으로 돌아왔다. 울산북구청 계약 기간을 다 채우기도 했고, '주말 가족' 생활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대학, 지자체 등에서 강의를 하다가 올해 5월부터는 함안군과 함께하게 됐다. 지역에서 평생교육사로 일하며 당면하는 문제나 고민에 대해 물었다.

"경남 18개 시·군 지자체 중에 평생교육사가 일하고 있는 곳은 50%가 안 되는 거로 알고 있어요. 인구수가 적은 군이 10개가 있는데 상대적으로 평생교육 정책을 맹렬하게 펼치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죠.(웃음) 아직은 굳어있는 분위기거든요. 그래서 자체적인 활동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창원 같은 대도시에서는 어느 정도 자체적으로 추진한다 해도 군 단위는 무리가 있죠. 부족한 부분은 도 단위에서 추진을 하고 파견이나 다양한 방법을 통해도 될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다행히 2015년도에 경남평생교육진흥원이 개원했어요. 하지만 시작 단계라 그런지 인구 300만 명이 넘는 경남의 평생교육시대를 이끌기에는 역량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애 씨는 이제 막 함안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5년의 경험이 있다 보니까 업무가 막막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아직 서먹한 부분이 있지만 울산과는 다른 인프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요. 저와 평생교육사들의 활동으로 '함안 참 살기가 좋다' 이런 얘기를 듣고 싶어요. 앞으로도 재밌는 일들이 많이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4시간 정도 잤다는 그녀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선애 씨는 교육을 통해 스스로 미래를 바꿨다. 선애 씨가 그 어떤 것보다 평생교육사라는 옷이 잘 맞는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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