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성치, 밤재 넘어 구례 현철마을까지

4월 초록걸음은 별들도 잠이 든다는 고개, 숙성치(宿星峙)를 넘어야 했다. 그것도 4월 16일에…. 어느새 다시 우리 곁에 다가온 4월 16일에 초록걸음은 남원 주천에서 출발해서 숙성치를 넘고 남원과 구례의 경계가 되는 밤재를 넘어 구례 현천마을까지 걸었다.

지리산에서도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월호 지리산 천일기도'라는 이름으로 2014년 8월 30일 실상사에서 시작해 2017년 5월까지 천 일 동안 3년 상을 치르는 마음으로 지리산권 시민사회단체와 지리산 4대 종단(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모임인 지리산종교연대가 함께 추모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누구라도 세월호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남원 실상사와 산청 성심원에 상설 기도단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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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체사진. / 초록걸음단

지리산 둘레길 시작점이자 끝점으로 알려진 주천마을에서 초록걸음 길동무들을 위해 노래 공연을 해 줄 떠돌이별 '수수'와 합류를 하고 인사와 함께 걷는 이의 약속으로 걸음을 시작했다.

<걷는 이의 약속>

모든 생명들을 섬기며 나와 주변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마음으로 걷습니다.

걸을 때는 침묵하며 나와 우주의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길에서 만나는 주민에게 먼저 인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주변의 농작물과 열매는 주민과 야생동물의 것으로 손대지 않습니다.

어머니 지리산의 마음으로 세월호의 아픔을 잊지 않고 헛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4월 지리산 둘레길의 배경색은 역시 연초록이다. 주천마을을 지나 내용궁마을로 가는 길섶에서 만난 으름덩굴은 연초록 잎사귀와 둥글게 말린 수꽃과 보랏빛 별 모양 암꽃의 색상 조화가 너무도 싱그러웠고, 한여름에 주렁주렁 매달릴 그 달콤한 으름 열매 생각에 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내용궁마을에는 고려 후기 유익경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가 세워져 있다. 유익경은 어머니 현 씨가 병에 걸리자 어머니의 똥을 맛보고 생사 여부를 가늠했을 만큼 효행이 지극했다고 전해진다. 이 유익경 효자비 앞에는 300년 된 배롱나무가 자리하고 있는데 잎이 늦게 달리는지라 아직은 매끈한 수피만이 고목의 멋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리산 고개 중 아마도 가장 운치 있는 이름을 가진 고개가 바로 숙성치(宿星峙)가 아닐까. 별들도 잠이 드는 고개라는 숙성치는 남원 주천면과 구례 산동면의 경계로 전북과 전남을 가르는 고개로 지리산 반야봉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두루봉, 만복재를 지나 숙성치로 이어지는데 서쪽으로는 밤재와 견두산이 있다. 이 숙성치를 넘는 길은 원시림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숲 속 오솔길의 정취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라 길동무들에게 강추하는 길이기도 하다.

숙성치를 넘고 밤재를 넘어 도착한 계척마을에서 초록걸음의 트레이드 마크인 초록 도시락으로 맛난 점심을 나누었다. 1000년 전 중국 산둥성에서 구례로 시집온 처녀가 가져와 심었다는 그 산수유나무가 지금의 우리나라 산수유나무의 시목이 되었는데 계척마을에 있는 그 산수유 시목은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산수유 열매를 해마다 풍성하게 매달고 있으니 참으로 대단한 할머니 나무임에 분명하다. 2001년부터 구례군에서는 매년 3월 산수유 축제가 열릴 때 이 산수유 시목 앞에서 풍년기원제를 지내고 있다.

점심을 먹고는 길동무들과 함께 조촐한 세월호 추모제를 지냈다. 시와 음악이 있는 초록걸음인지라 노래 공연은 수수 씨를, 시낭송은 이원규 시인을 미리 섭외해 두어 추모제를 더욱 의미 있게 진행할 수 있었다. 내가 떠돌이 별이라 부르는 수수 씨는 지역 문화 공연, 특히 세월호 추모집회나 백남기 농민 후원 행사 등에 흔쾌히 노래해 준 싱어송라이터로 이번 초록걸음에도 기타를 둘러메고 걸음을 함께 해 주었다. 그렇지만 올 초 다시 구례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단다. 공지영의 지리산행복학교에서 낙장불입 시인으로 등장하는 이원규 시인도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시를 낭송해주기 위해 그의 애마 '흑마'를 타고 계척마을로 달려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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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걸음 길동무들이 지내는 세월호 추모제에서 노래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수수 씨. / 초록걸음단

서해 맹골수도의 밤은 그 얼마나 캄캄하냐

바다 속 깊은 그곳은 또 얼마나 춥고 캄캄하냐

아이들아, 수중고혼이 된 아이들아

뒤늦게나마 바닷가에 나와 참회의 풍등을 띄운다

행여라도 이 불빛들이 보이거든 날아올라라

하나 둘 불빛 동아줄을 잡고 사뿐히 날아올라라

돌아보지도 말고 훠이훠이 구천을 건너가라

그리고 용서하지 마라, 아이들아

서해의 용이 되어서라도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너희들은 교육이 아니라 사육을 받았다

너희들은 학교가 아니라 밀식사육장에서

왜? 라는 혀가 거세되고

아니오! 라는 성대 제거수술을 받으며

가만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

대한민국 어른들의 그 말만 믿다가

해경과 헬기와 에어포켓과 정부만 믿다가

원망 한 번 못해보고 살해되었다

마침내 살처분되고 말았다

아이들아, 수중고혼이 된 아이들아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거짓 눈물, 기념사진을 찍으며

온갖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정부를,

사이비 종교를, 천민자본주의를 더 이상 믿지 마라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도 믿지 말고

어른들을, 시인들을, 종교인들을

그리고 뒤늦게 발로참회하는 나를,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마저 믿지 마라

칼을 물고 엎어져야할 이 땅의 어른들을 더 이상 용납하지 마라

그래야만 너희들이 돌아올 수 있다

임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 수많은 심청이로 돌아와야만

겨우 겨우 한반도가 실눈이라도 뜰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아, 서해 맹골수도의 밤은 그 얼마나 캄캄하냐

수중고혼이 된 아이들아, 육십일이 지나도록

바다 속 깊은 그곳은 또 얼마나 춥고 캄캄하냐

음력 오월열이렛날의 남해 바닷가에 나와 참회의 풍등을 띄우니

하나 둘 불빛 소망의 동아줄을 잡고 사뿐히 날아올라라

돌아보지도 말고 훠이훠이 삼도천을 건너가라

-'풍등(風燈)을 띄우며' 이원규-

이렇게 기타와 꽹과리 반주로 한 수수의 노래와 이원규 시인의 시 그리고 함께 한 길동무들과 세월호 지리산 천일기도문을 합송하면서 별이 된 아이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추모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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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에서 만난 사과꽃. / 초록걸음단

천수를 누리고 계시는 할머니 산수유나무를 뒤로 하고 길동무들은 야트막한 언덕길을 넘고 저수지 둑방길을 지나 현천마을로 향했다. 마을 뒷산인 견두산이 현(玄)자 형으로 되어 있고 개울에서는 옥녀봉의 옥녀가 매일같이 빨래를 하고 선비가 고기를 낚는 어옹수조(魚翁水釣)가 있어 그 아름다움을 형용하여 현천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졌단다. 이 마을 역시 여순사건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100여 호에 달하던 민가가 그 사건으로 거의 다 전소되고 당시 40여 명의 무고한 젊은이들이 죽었다. 아직도 군인과 빨치산이라면 신경이 곤두서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여전히 민감하다고 동네 어르신이 귀띔해주셨다. 하지만 지금의 현천마을은 산수유 꽃이 만개하는 3월이면 저수지 주변 동네 전체가 산수유 꽃동산이 되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그야말로 산수유 테마 마을이 되어 있다. 이렇게 지리산은 곳곳에 아픔이 서려 있고 또 그 아픔을 치유하려는 몸짓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현천마을에서 마무리한 이번 초록걸음에는 비록 산수유 꽃은 다 지고 없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연초록의 잎들과 논둑에 지천으로 핀 자운영만으로도 봄 내음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4월 16일의 그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고 작은 위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어머니의 산 지리산에 기대어 추모 기도를 함께해준 초록걸음 길동무들과 수수 씨 그리고 이원규 시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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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규 시인이 시 낭독을 하고 있다. / 초록걸음단

세월호, 시간은 여전히 4월 16일입니다.

세월호, 차마 견딜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슬픔이요 아픔입니다.

당신들의 슬픔, 당신들의 아픔, 당신들의 절망이

그대로 나의 슬픔, 우리의 아픔, 국민의 절망이었습니다.

세월호, 당신들은 '오직 생명'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당신들의 죽비소리에 우리 모두 정신 차리고 철들었습니다.

오늘 이후, 내가 달라져야지, 우리가 달라져야지,

대한민국이 달라져야지,

온 국민이 그렇게 마음내고 뜻 모으고 결의했습니다.

온 국민이 함께 한 그 마음이 바로 거룩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기꺼이 함께 하는

여기 내 모습, 우리 모습, 국민의 모습이

거룩한 해월, 예수, 붓다입니다.

간절히 기원합니다.

가리워진 진실이 환하게 드러나서

가신 이는 한을 풀고 편히 쉬기를!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탄에 빠진 유가족들의

몸과 마음 치유되고 일상이 회복되기를!

온 국민이 그분들이 섰던 자리에 서서 진실을 찾아가기를!

잊지 않겠습니다. 헛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세월호, 당신들이 잠들어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깨웠습니다.

국민이 가야 할 큰 길을 열었습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은 하늘의 뜻, 어머니의 마음인

세월호의 엄중한 명령입니다.

나, 우리, 한반도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온 국민의 사무친 약속이고 책무입니다.

거룩한 첫 마음, 절절한 그 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생활화하고 대중화하고 사회화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세월호 이후의 나와 우리,

그리고 대한민국이 새롭게 태어나겠습니다.

우리 모두 지리산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 길을 뚜벅뚜벅 가려고 합니다.

생명 평화의 벗, 세월호의 영령이시여,

부디 함께 하소서.

생명 평화의 꽃으로 빛나소서.

-세월호, 지리산 천일기도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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