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시즌 시작합니다. 지리산으로 출발! 출발!

안전기원제

매년 새해가 되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의 의식을 치른다.

기업이나 관청에서는 시무식을 열어 새해 각오를 다진다. 산악인들은 산에 올라 시산제를 지낸다. 산신에게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고하고 보살핌을 구하는 것이다.

모터사이클을 타는 사람들도 안전기원제라는 것을 지낸다. 천지신명에게 라이딩 시즌 시작을 알리고 한 해 동안 안전하게 지켜달라고 고하는 의식이다.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볼 수도 있다. 대개 이런 의식은 해가 바뀐 직후인 정초에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모터사이클 라이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는 3~4월이다. 그래서 안전기원제도 이 시기에 하는 사례가 많다.

안전기원제는 정형화된 형식이 따로 없다.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천지신명에게 예를 갖추고 마음을 모아서 보살핌을 구하고 또 스스로 안전하고 건전한 라이딩을 다짐하면 족하다.

보통은 이렇게 안전기원제를 지내고 나면 함께 모여서 가벼운 투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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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열을 지어 질서 정연하게 달리는 맛은 혼자 달릴 때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창원시와 진주시의 경계인 발산고개. / 조재영 기자

 

내가 소속된 블랙라벨클럽이 안전기원제를 지낸 그날은 BMW의 모터사이클 브랜드인 BMW모토라드가 경북 상주시 경천섬에서 시즌 오프닝 행사를 하는 날이었다. 이 행사에는 전국에서 BMW모터사이클을 타는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모여서 시즌 시작을 함께하는 축제 같은 날이다. 물론 나도 원했다면 참가신청을 해서 참여할 수 있었다. 작년에는 이 행사에 다녀왔었다.

다른 BMW모터사이클 라이더라면 모토라드 시즌오프닝 행사에 참여할지 클럽의 안전기원제에 참여할지 고민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소속된 블랙라벨클럽 안전기원제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블랙 라벨 클럽은 내 손으로 직접 창립한 클럽이고, 초기 2년 동안 회장을 맡아 경남을 대표할 만한 대형모터사이클 클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만큼 애정도 많고 의무감도 크다.

작년까지는 경남할리클럽과 함께 안전기원제를 지내왔는데 그때는 경남할리클럽에서 주로 고사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올해는 두 클럽이 같이 안전기원제를 지낼 형편이 못 되어서 우리 클럽만 따로 안전기원제를 지내기로 했다.

안전기원제는 창원스포츠파크 안 한적한 곳을 정해 지내기로 했다. 클럽 회장단이 고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돼지머리와 몇 가지 과일 등을 준비하고, 나는 안전기원문을 맡기로 했다.

이름은 거창하게 안전기원문이라고 해도 특별할 것은 없다. 우리 클럽 회원들의 마음을 담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혹시 인터넷에 참고할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검색해봤지만 참고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직접 기원문을 쓸 수밖에 없었다. 우리 회원과 그 가족들이 안전하게 한 해를 보낼 수 있도록 보살펴달라는 것, 그리고 우리 회원들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와도 같은 모터사이클들이 고장 나지 않고 사고 나지 않도록 해달라는 바람을 담았다. 내가 쓴 안전기원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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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라벨클럽은 고사 때 돼지머리에 꽂힌 돈에다 클럽 운영진이 십시일반으로 보탠 돈을 합쳐 총 50만 원을 정신지체장애인 생활공동체에 기부했다. / 조재영 기자

 

<안전기원문>

천지조화를 다스리는 신령님들께 고합니다.

대한민국 경남땅을 터전 삼아 모터바이크를 타며 레저 문화 창달을 선도하고 회원 간의 건전한 친목을 도모해온 저희 블랙라벨클럽은 천지신명님의 보살핌으로 무탈하게 지난 한 해를 보냈습니다.

병신년 0월 00일 오늘 다시 천지신명님을 모시고 감히 청하고자 합니다.

올해도 문응주 회장을 비롯한 저희 블랙라벨클럽 회원들이 모터바이크를 타고 아침에 기쁜 마음으로 집을 나서고 해지는 저녁에는 무탈하게 사랑하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보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길이 어두울 때는 앞길을 밝혀주시고,

저희 눈이 어두울 때는 저희 눈을 밝혀주시고,

길이 패었을 때는 비켜가게 해주시고,

사고 위험은 미리 알게 해주시고,

저희가 타는 모터바이크 또한 비록 생명은 없으나

저희들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이오니 함께 보살펴주시옵기를 감히 엎드려 청합니다.

천지신명님께 또 감히 청합니다.

블랙라벨클럽 회원들이 하는 일마다 원하는대로 이루고 그 가족들이 모두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살펴주시기를 빕니다.

오늘 저희 정성을 모아 맑은 술 한 잔을 올립니다.

부디 이 작은 정성을 거두어주시고 저희들은 보살펴주시옵소서.

2016년 0월 00일

블랙라벨클럽 회원 일동

안전기원제가 열린 당일 아침 9시 창원스포츠파크 수영장 뒤편 공터에 20여 대의 대형모터사이클이 집결했다. 작은 언덕을 등지고 고사 상을 차렸다.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 2대를 5m 간격으로 세우고 그 사이에 펼침막을 걸고 고사상을 차렸다. 조촐하지만 완벽한 준비였다.

전통적으로 지내는 고사는 순서가 정해져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설사 그 순서를 제대로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꼭 그 순서를 따를 필요는 없다. 고사 진행을 맡은 나는 집에서 제사 지내는 순서를 떠올려 그대로 진행했다. 순서는 틀렸을지 모르지만 신에게 보살핌을 구하는 간절한 마음과 경건함은 정식 고사에 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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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전기원제에 참석한 클럽 회원 가족. 회원들은 취미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보다는 가족을 먼저 생각하며 가족들과 함께 하려 노력한다. / 조재영 기자

 

지리산 천왕봉 아래 중산리

토요일이었지만 안전기원제가 끝난 뒤 일부 회원들은 일터로 가고 나머지 스무대의 모터사이클이 지리산을 향해 출발 했다.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이다. 안전기원제를 지내고 민족 영산의 정기를 받아 올 한해 회원들을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를 목적지로 잡았다.

창원시 의창구 창원스포츠파크에서 지리산 중산리로 가려면 시가지를 가로질러 마산합포구 경남대 앞을 지나 진동면 진전면을 거쳐 2번국도를 타고 진주까지 간 다음 진주 시내를 통과해 3번국도를 타고 가다 신안에서 중산리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우리는 시천면 소재지까지 여유롭게 달렸다. 시천면까지 달리는 중간에 내가 일행보다 먼저 가서 적당한 곳에서 대열주행을 하는 회원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남보다 먼저 달려가고, 또 뒤따라 가고, 복귀한 뒤에는 찍은 사진을 정리해서 클럽 인터넷 카페에 업로드해야 하기 때문에 남보다 더 부지런해야 한다.

창원에서 시천면 소재지까지는 2시간 정도 달려야 한다. 고사를 마치고 고사떡을 조금 먹기는 했지만 시천면 덕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뱃속이 출출해져 있었다. 시천면사무소 앞 넓은 공터에 모터사이클을 주차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모터사이클은 넓은 주차장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대형모터사이클은 제법 넓은 공터가 있어야 여러 대를 주차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시천면사무소 앞 공터는 참 고마운 존재다. 식당으로 향한다. 순두부 음식으로 제법 유명한 음식점이었는데 클럽 총무가 미리 예약을 해놓았기 때문에 20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쳤지만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가 먹은 해물순두부는 조개가 들어있어 맛이 깔끔하고 시원했다. 또 어른이 배불리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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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콤하고 깔끔한 맛이 일품인 해물순두부. / 조재영 기자

 

식사 자리에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고사를 지낼 때 회원들이 돼지머리에 꽂았던 돈은 어차피 천지신명에게 바쳤던 것임으로 우리가 쓸 것이 아니라 작은 돈이지만 도움이 될만한 복지단체 등에 기부하자고 제안을 했다. 클럽 회장과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그렇게 하자고 뜻을 모았다. 적은 돈이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쓰자는데 회원들이 흔쾌히 동의한 셈이다. 참 기분이 좋은 순간이었다. 투어를 다녀온 후 나와 회장단이 조금씩 더 보태어 50만 원을 채웠고, 우리 클럽과 약간 인연이 있는 정신지체장애인 생활공동체에 기부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중산리로 향했다. 지리산대로를 타고 중산리로 가는 길은 따뜻하고 여유로웠다. 지리산에도 봄이 찾아왔다. 나뭇가지에 파릇한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하얀 포말을 만들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덕산에서 중산리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화가 부부가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를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중산리 버스 종점 위에 있다. 순두부 식사를 한 뒤에 마시는 아메리카노 한 잔. 개운하고 맛있다. 더구나 카페의 작은 마당에서 앉아 건너편 황금능선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는 더 맛있고 운치도 있다.

중산 산악관광센터와 빨치산 토벌 전시관

카페 아래 중산리 버스 종점 넓은 주차장 앞에는 '지리산 중산 산악 관광 센터'가 새로 문을 열었다. 센터는 산청군이 건립했다. 중산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민간 산악구조대가 주축이 되어 주변 주민들과 함께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서 이 센터를 위탁관리 하고 있다고 했다.

1층에는 지리산에서 나는 특산물 판매장이 있고 복도에는 지리산에서 자리를 잡고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뒤편에는 지리산의 역사와 문화·생태 등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작은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는데 들어가 보면 오밀조밀하게 알차게 꾸며져 있다.

전시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지리산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렀고, 멀리 백두대간이 흘러 왔다 하여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1967년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산신 신앙 대상으로 여겨져 삼국시대 이전부터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 온 명산이다. 정감록에서는 전쟁 피해와 기근이 없는 십승지의 하나로 여겼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 동학교도들이 피난하여 살았다.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당시의 좌익세력 일부가 지리산에 은둔하며 저항하였고, 특히 1950년 한국전쟁 때는 도망치던 북한군이 노고단과 반야봉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며 국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지리산은 우리 민간신앙과 불교 신앙의 요람으로 자리하여 주변에 화엄사 쌍계사 실상사와 법계사 대원사 내원사 등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센터 지하에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산악계에서도 인정받는 허영호 대장 전시관이 있다. 허영호 대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동계 시즌 에베레스트를 등정했으며, 총 네 차례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이곳에는 허 대장이 기증한 수십 장의 히말라야 등정 사진과 등정 때 사용하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과 장비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히말라야의 고지에 와 있는 듯하다. 얼마나 험난한 길을 해치고 세계 최고봉에 올랐는지 알 수 있다.

건물 2층에는 펜션 형식의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한쪽에는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을 조망할 수 있도록 대형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주머니에서 500원을 꺼내어 망원경에 넣고 천황봉쪽으로 초점을 잡았다.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것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천왕봉을 오르내린 탓인지 흙더미가 흘러내린 듯한 흔적도 보인다. 센터는 아직 개관한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센터가 활성화되어 지리산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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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리 계곡 초입. 멀리 보이는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계곡 물은 바닥이 고스란히 보일 만큼 맑디맑다. / 조재영 기자

 

버스종점 옆에는 보건지소가 있고 그 보건지소 옆으로 더 들어가면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이 있다. 산청군이 운영하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은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다. 어른은 1000원, 청소년과 군인은 700원, 어린이는 500원이다. 6세 이하 어린이나 65세 이상 노인은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중에 퇴로가 막힌 북한군이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가 우리 국군과 경찰에 저항하다 토벌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쓰던 소총, 기관총, 대포, 박격포 등 무기와 빨치산들이 산속에서 사용하던 기구, 생활용품, 당시 사진과 신문 기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빨치산 토벌 전시관까지 둘러보고 나서 우리는 창원으로 복귀를 시작한다. 되돌아가는 길은 좀 더 편안하고 마음도 여유롭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집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천지신명께 고사를 지낸 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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