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대화하고, 즐기며 어느 새 익숙해진 순례자의 일상
 

◇7월 1일 그라뇽에서 비야프랑카까지 28.8㎞

오늘은 늦잠자고 조금만 걸으려고 작정을 했는데 새벽부터 눈이 떠져요.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하고는 '그래~! 더워지기 전에 걷지 뭐!' 하고 일어나 준비하고 걷는데 피곤함도 덜하고 걸을 만한 거예요. 목적지인 토산토스(Tosantos)에 도착하니 10시도 안 되었어요. 일러도 너무 일러 조금 더 걷기로 했어요. 정말 넓디넓은 밀밭을 지나고 또 지나는데 오늘따라 밀향이 더욱 진하게 나네요.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왜 빵을 먹는지 이해가 가더라고요. 지형적인 이유인가 봐요. 땅 모양이 구릉처럼 생겼으니 물을 가두어 키우는 벼는 안 되고 밀을 심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나마 스페인은 쌀도 제법 먹는다고 하지만 유럽을 돌아다니며 느낀 것도 밀밭이 무지무지 많다는 거였어요. 저도 매일매일 빵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다행히 힘들지 않았어요. 처음엔 걱정을 많이 했는데 먹다 보니 먹을 만하더라고요. 아마 제가 빵 체질인가 봐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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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산토스 가는 길에 만난 넓은 밀밭. / 박미희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Villafranca Montes de Auca. '오카 산기슭에 있는 프랑스인 마을'이란 뜻으로 오래 전부터 프랑스에서 온 순례자나 장인들이 정착해 사는 마을. /편집자 주)까지 왔는데도 12시가 채 안 되었어요. 오는 길에 어떤 아저씨가 알베르게 안내장을 주고 갔는데 호텔에 딸린 알베르게이고 10, 8, 5유로 이렇게 구분이 되어 있어서 선택도 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공립 알베르게를 지나쳐 호텔로 가 보았어요. 호텔 로비에 가니 먼저 10유로를 권하데요. "노!", "8유로?", "노!", "5유로?", "오케이~!"

들어가 보니 제가 제일 먼저 알베르게에 도착을 한 거였어요. 18명 정도 잘 수 있는 방인데 깨끗하고 아주 좋았어요.

제일 좋은 1층 자리에 짐을 풀고 씻으러 가니 샤워실도 깨끗하고 손빨래하기도 잘되어 있고 호텔의 부대시설을 다 쓸 수도 있고 아주 맘에 쏙 드는 알베르게였어요. 샤워 후 빨래를 너는 곳도 널찍하고 빨래집게까지 넉넉하고, 완전 흡족! 부엌도 깨끗해서 우선 요기를 하고 있으니 오다가 몇 번 만났던 이탈리아인 3인방은 10유로 방에, 켈리 모녀는 8유로 방을 정하고 왔다면서 들어가더군요.

알고 보니 10유로 방은 이층침대가 아니었고 8유로 방은 8명이 자는 곳이더군요. 그것만 빼고는 다른 것은 다 똑같이 쓰는 거였어요. 야호~! 오늘은 싼 가격에 좋은 곳에서 묵게 되어 기분이 좋았어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 프랭크 부자도 저와 같은 5유로 방에 들어왔어요. 다른 사람들은 10유로, 8유로 방으로 낚여 들어가고 결국 5유로 방에는 5명이 자는 특혜가 주어졌지요.

오붓하고 유쾌한 저녁

잔디밭에 내려가니 켈리 모녀가 있더라고요. 오붓하게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인지 서로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사는 이야기, 사는 곳 이야기, 손자 이야기 등 서로 사진을 보여주며 나누었어요. 조금 있으니 프랭크도 내려오더니 이야기를 하자네요. 오다가 카미노를 걷는 프랑스 신부님을 만났는데 제 얘기를 했더니 보고 싶어 한다고요. 켈리도 프랭크도 저에게 놀랍다고,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 줍니다. 그래서 이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무모한 행동'이라고 했어요. 사실, 걸을수록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거든요. 그런데 번역기가 뭐라고 했는지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하며 못 알아듣더니 좀 있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하지만, 그들이 보기엔 영어도 못하고 좌충우돌 걷는 제가 대단해 보였나 봐요. 오늘은 제 번역 앱이 아주 바쁜 날이었죠.

방으로 들어와 잠깐 누워 있는데 프랭크와 피터가 들어왔어요. 어디서 구했는지 태극기와 카미노의 상징인 조개가 새겨져 있는 배지를 선물로 주더군요. 피터가 샀다면서요. 기쁘게 받아 가방에 달았더니 둘 다 좋아합니다. 관심을 두는 그들이 너무너무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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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주민들이 즐기던 놀이. / 박미희

7시에 미사가 있다고 해서 갔더니 그 프랑스 신부님이 집전하시는 미사였어요. 미사 후 잠깐 인사를 나누는데 말이 통해야 말이지요(ㅜㅜ). 간단히 인사만 나누고 아까 켈리가 추천해 준 호텔 식당으로 갔어요. 점심때 먹었는데 아주 맛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들어가 보니 프랭크 부자가 먼저 식사를 하고 있다가 옆에 앉으라고 자리를 내주었어요. 여태 순례자 메뉴 먹으러 들어간 식당 중 가장 고급스러운 식당이에요. 가격은 12유로인데 가격대비 멋졌습니다.

피터가 포도주를 따라 주는데 아무 생각 없이 옆에 있는 잔에 포도주를 받았어요. 여태까지 순례자 메뉴를 먹으러 가면 포도주나 물 중에서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고 포도주를 먹는 경우에는 물을 사 먹어야 했었거든요. 이곳은 두 개를 다 제공하는 곳이어서 잔이 두 개 있었는데 제가 모르고 물잔에 포도주를 받은 거예요. 아차! 싶었는데 프랭크가 자기 포도주를 얼른 마시더니 자기 포도주잔에 얼른 물을 따르더군요. 그러니까 피터도 따라 하려고 해서 제가 만류했어요, 괜찮다고요. 웃으며 헤프닝은 마무리되었고 식사를 다 했는데도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려주는 그들을 보며 남을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답니다. 물론 음식 맛도 아주 좋았고요. '내가 외롭고 힘들어하니 천사를 보내 준걸까?' 생각하며 방으로 왔습니다.

숙소에 와서 프랭크와 피터에게 "5유로, 5명! 8유로, 8명!" 했더니 둘이 빵 터집니다. 그들도 싼 가격에 오히려 쾌적한 환경인 이 상황이 재밌었나 봐요. 다신 짐을 부치지 않기로 했지만 내일은 부르고스까지 37㎞ 이상을 걸어야 하고 길도 좀 험하다고 해서 짐을 부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7월 2일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에서 부르고스까지 37.2㎞

새벽에 살짝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어제 준비해 두었던 음식으로 요기를 하고 짐을 나눠 준비해서 호텔로 내려갔는데 웬걸~! 문이 다 잠겨 있는 거예요. 문 세 군데를 가봐도 다요. (ㅜㅜ) 알베르게와 호텔은 따로 되어 있었는데 너무 새벽이라서 아직 문을 안 연 거지요. 하는 수 없이 다시 큰 배낭에 짐을 꾸역꾸역 다시 챙기고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려 봐도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요. 이제 곧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고 너무 어두워서 누가 오면 함께 출발하려고 하는데 다른 알베르게에서 오는 사람도 없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한 시간 넘게 지체를 하고 있는데 결국 프랭크 부자가 먼저 나옵니다.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출발했어요.

프랭크는 물집도 많이 생기고 다리가 아파 천천히 걷더라고요. 성질이 급해서 그런지 순례길에서 제가 잘 걷는다고 소문이 났거든요. 하하. 함께 천천히 걸으려니 다리가 더 아프네요. 아직 깜깜하니 혼자 갈 수도 없고 같이 가며 환해지기를 기다렸어요. 깜깜한 새벽 하늘에 달이 떠 있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헨젤과 그레텔'이 생각났어요. 달빛에 차돌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집을 찾아왔던 그 장면이요. 그래서 '헨젤과 그레텔'이 생각난다고 했더니 처음엔 못 알아듣다가 '아! 한스와 그레텔' 하며 막 웃는 거예요. 그게 재미있었는지 그 후로도 몇 번을 이야기하더라고요. 점점 날이 밝아오고 있었고 이젠 헤어질 시간이 되어가요, 앞으로 또 만날 수 있을는지. 이제 큰 도시로 들어가기 때문에 다시 보기가 어려울 것 같아 많이 섭섭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의 큰딸에게 전화를 했어요. 딸에게 여태까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해 주고 프랭크에게 전해주라고 프랭크를 바꿔 주었죠. 딸이랑 유쾌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프랭크도 다시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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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타그란테봉으로 올라가는 길. / 박미희

작별인사를 하고 저는 빨리 걷기 시작했습니다. 길은 험하지 않아도 계속 산길로 이어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할아버지가 빠르게 따라옵니다. 그러더니 저에게 말을 걸어와요. 한 60대 중반쯤 되었을까? 머리가 하얗긴 해도 할아버지라고 하기엔 좀 그렇나요? 자기는 스페인 사람인데 혼자 왔느냐고 물어서 나는 한국에서 왔고 혼자라고 했습니다. 같이 걷겠답니다. 아무튼 이분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는데 어떻게 이만큼이라도 통하는지 신기하기만 했어요. 전 걷다 보면 다시 혼자 걷게 될 줄 알았어요. 늘 그래 왔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되거든요. 그런데 이분은 내가 빨리 걸으면 빨리 걷고 늦게 걸으면 늦게 걷고 계속 속도를 맞추어 걷는 거예요. 이분이 아니었으며 산길 무인구간 12㎞(프랭크와 헤어진 후 이분 말고 본 사람이 없었거든요)가 무섭고 심심할 뻔도 했어요. 그런데 사실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어제 켈리가 같이 가자고 했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아타푸에르카(Atapuerca. 마을에서 12㎞ 떨어진 곳에서 지난 1994년 인류의 조상으로 알려진 호모 앤티세서가 이 인근에서 발굴됐고, 지난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편집자 주)를 지납니다. 켈리는 여기 왔다가 버스 타고 부르고스에 들어간다고 해서 거절했거든요. 아타푸에르카를 지나고 보니 '아~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보고 갈 걸'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젠 돌아갈 수도 없는 일, 그냥 마타그란테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스페인 아저씨와 함께요.

돌들로 만들어진 '미스터리 써클'이 있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보면 모를까, 돌들만 조금 보이고 아무리 둘러봐도 제대로 볼 수가 없어요. 아저씨에게 물어봐도 저보다 더 모르는 것 같네요. 마타그란테봉에서 내려다보니 저 밑에 큰 도시가 보여서 부르고스(Burgos)냐고 물으니 아니래요. 그렇게 가까이 보일 줄 몰랐나 봐요. 하긴 아무리 스페인 사람이라고 해도 어떻게 이 길을 다 알겠어요.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부르고스가 맞긴 했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은 정말 최악이었어요. 산에서 내려와 바에서 간식을 먹으려고 쉬었어요. 화장실도 가구요. 아저씨 때문에 오래 참았거든요. 에고~!

날씨는 더워지고 체력은 바닥나고 있는데 가도 가도 부르고스가 나타나지 않아요. 햇볕도 가릴 데가 없고 공항 옆길을 지나 조금 도시 가니 같은 데가 나오더라고요. 이젠 거의 왔나?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지요. 스페인 아저씨가 지나는 사람에게 물으니 4㎞ 남았대요. '그래 그러면 갈 만하네' 하고 다시 갈 길을 재촉했죠. 그런데 또 한없이 가는 거예요. 다 왔다는 기대감에 그런 걸까요? 정말 너무 힘이 들었어요. 하는 수 없이 공원에서 자리를 펴고 앉아 버렸어요. 거기서 쉬며 번역기를 이용해 이야기를 나눴지요. 68세라는 스페인 아저씨는 자기의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어디서 산다, 이름은 뭐라고 하셨는데, 생소한 이름들이라서 지금 생각이 나지를 않네요. 죄송~! 다시 출발해서 걷는데 이번엔 길까지 잃은 것 같아요. 아저씨가 몇 번을 물으며 온 데도요. 외곽의 어느 레스토랑에 들러 물으니 또 4㎞가 남았대요. ㅜㅜ 그곳에서 화장실도 가고 물도 얻어먹고 어찌어찌 시내로 겨우 들어왔는데도 우리의 목적지는 가도 가도 나오지를 않아요. 아저씨는 자기 잘못도 아닌데 계속 괜찮냐며 내 얼굴을 살핍니다. 

라면 파는 식당을 찾아

큰 강을 낀 부르고스는 너무나 큰 도시였어요. 강가에서 수영을 하고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 저도 물속에 '퐁당' 들어가고만 싶었지요. 제가 가고 싶은 알베르게가 있었는데 너무나 지쳐서 그냥 가까운 공립 알베르게로 들어와 버렸어요. 무려 11시간 넘게 걸었고 3시 30분경에야 알베르게에 도착한 거예요. 에효~! 정말 오늘은 최악의 날이었어요.

무지 큰 알베르게입니다. 5층(?)으로 되어 있었고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그나마 시설은 깨끗한 편이네요. 큰딸한테 문자가 왔는데 부르고스에 라면 파는 데가 있대요. '라면'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한국 음식이 못 견디게 먹고 싶은 거예요. 오늘 너무 힘들어서일까요, 여태까지 잘 참아왔는데 한순간에 무너진 거죠. 스페인 아저씨는 다행히 좀 잔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정말 정말 쉬고 싶었는데 라면이 너무 먹고 싶은 마음에 씻자마자 거리로 나섰어요. 알베르게를 나오는데 프랭크 부자와 캘리 모녀도 완전히 지쳐서 이 알베르게에 들어오고 있었어요. 반가움과 또 오늘의 그 수고를 알기에 서로 안고 위로를 했죠. 카미노에서는 헤어져도 헤어지는 게 아니라더니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또 같은 알베르게에 든 걸 보면 인연은 인연인가 싶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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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길에서 만나는 몇 안되는 대도시 브르고스 거리 풍경. / 박미희

그런데 딸이 라면을 먹었다는 광장 쪽에 가서 아무리 찾아도 라면 파는 데를 찾지 못했어요. 여기저기 물어봐도 모르고 정말 허탈했지요. 피곤한 몸을 질질 끌고 나왔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며칠 전 함께 걷던 미국 언니와의 문자에서 부르고스에서 한국인 신부님이 삼계탕을 사주신다고 이곳에서 만나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었어요. 그런데 일정 때문에 기다리기 어렵다고 말했었는데 연락처라도 알아둘 걸 하는 후회가 되었지요. 언니와는 와이파이가 될 때만 한 번씩 연락을 하기 때문에 연락도 안 되구요.

하는 수 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슈퍼를 찾아가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서 숙소로 돌아오다가 한국인 젊은이 둘을 만났어요. 제가 한복형 원피스를 입고 있으니 먼저 아는 척을 하더라고요.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나니 아주 반가웠죠. 사실은 조금 전 알베르게에서도 한 한국아가씨를 만나기는 했었어요. 며칠 전부터 몇 번 마주쳤던 사람이었어요. 외국인들과 함께 다니고 있었고 한국사람인지 좀 헷갈리게 생겨서 아는 척을 못 했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누가 봐도 한국사람, 왜냐구요? 태극기 바람개비를 달고 있었고 걸을 때 말고는 한복원피스를 주로 입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아는 척도 했을 법한데 한 번도 한국인사를 안 하다가 오늘 바로 제 옆자리에 자게 되니까 인제야 한국인사를 하더라고요. 좀 씁쓸했어요. 다른 책에서도 이런 유의 사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친하게 잘 지내면서 한국 사람은 아는 척도 안 하는 이런 사람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흠~ 암튼! 근데 이 친구들은 저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고(착하게도) 또 다행히 저와 같은 알베르게였어요.  

왁자한 스페인 도시의 밤

혹시 라면 파는 데를 아는지 물어보니 분명히 아침에도 다른 사람한테 라면을 먹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자기들도 찾다가 햄버거만 사서 그냥 왔다며 나가서 다시 한 번 찾아보겠다고 희망을 주더라고요. 일단 숙소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들어왔어요. 숙소에 오니 그 스페인 아저씨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가재요. 사실은 오늘 온종일 고맙기도 했지만 온종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살짝 거짓말을 했어요. 오늘 한국친구들을 만나서 한국 음식 먹으러 가기로 약속했다고요. 알았다며 혼자 나가는데 조금 미안했어요. 근데 기다려도 라면집 알아보러 간 친구들이 오지 않아 다른 거라도 먹으려고 나가는데 이 친구들이 밝은 얼굴로 들어왔어요. 라면집을 찾았다고요! 오예! 앗싸!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죠. 가 봤더니 아까 내가 찾았던 곳인데 라면이라는 글이 하도 조그맣게 쓰여 있어서 제가 못 봤던 거예요. 자기들은 저녁을 먹었다고 해서 일단 두 개를 시켰는데 쌀로 만든 밥과 함께 나오더군요. 한국에서는 라면을 잘 먹지도 않는데 스페인의 도시 노천카페에서 먹는 라면 맛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어요. 국물까지 싹 먹어 버렸어요. 헉! 그런데 너무 비싸네요. 두 그릇에 16유로, 그래도 한국 음식을 먹었다는 생각에 아깝지 않았어요. 이로써 스페인 아저씨한테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 게 맞죠? 이 친구들이 아이스크림 맛있는 곳을 안다고 해서 갔더니 자기들이 사주겠대요. 기꺼이 하나 얻어먹고 젊은 사람끼리 어울리도록 하고 헤어졌어요.

정말 몸은 무지무지 피곤하지만 이대로 숙소로 들어갈 수는 없었어요. 발길을 시내로 돌렸죠. 그런데 도시 사람이 다 나온 걸까요? 그야말로 인산인해! 주말인가 싶어 확인해 보니 그도 아니었어요.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스페인의 밤 문화구나!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함께 나와 왁자하게 즐기고들 있었어요. 광장마다 작은 퍼포먼스나 공연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표정도 즐거워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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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길에서 만나는 몇 안 되는 대도시 브르고스 거리에서 펼쳐진 공연. / 박미희

저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나름 즐기다 숙소로 오니 숙소 뒤편에서 크게 음악 소리가 나는 거예요. 얼른 다시 나갔죠. 소리를 따라가보니 제 또래쯤 보이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락밴드가 공연을 하고 있었어요. 신나더라고요. 모두 흥겨운 얼굴로 음악에 맞춰 들썩이고 춤추는 사람도 있었어요. 저도 음악에 맞춰 장단도 맞추고 즐기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버리네요. 진즉에 올걸.

아쉬움을 달래며 숙소로 오니 아직 9시밖에 안 되었어요. 다시 씻고 귀마개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누가 큰 소리로 깨우는 거예요. 깜짝 놀라 일어나니 스페인 아저씨였어요. 벌써 많이들 자고 있는데 하도 큰소리로 말을 해서 '쉿쉿!' 하며 밖으로 나왔죠. 들어보니 '왜 벌써 자느냐, 밖은 흥겨운데' 이런 요지의 말인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내일 몇 시부터 걸을 거냐, 같이 걷자'고요. 그래서 '나는 오늘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몇 시에 출발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약속하기가 어렵다, 미안하다'고 하며 다시 잠자리로 돌아왔어요. 분명히 이 아저씨가 저한테 딴 맘을 먹고 이러는 것이 아닌 건 알아요. 혼자 왔다고 하니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전 사실 많이 부담스럽거든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눈치 없고 착한 아저씨 안녕히 주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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