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깨친 한국말로 법정에서 진실 잇는다

'고희선', '카오 티 타오(Cao Thi Thao)'. 둘 다 그녀의 이름이다. 희선 씨는 한국으로 귀화한 베트남인이다. 고희선이라는 이름은 베트남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높다'라는 뜻을 가진 'Cao'가 성인 '고'가 되었고 '착하다'라는 '타오'는 선. 전혀 관계없어 보이던 두 이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처럼 희선 씨는 한국에 녹아들어 살고 있다.

고희선(41) 씨는 창원시 팔용동에서 매일 베트남 쌀국숫집 문을 연다. 식당은 남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과 같은 건물에 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한국어는 유창했다.

가방 두 개 들고, 남편 손잡고, 한국으로

희선 씨는 베트남 동나이성 출신이다. 졸업 후 호찌민 인근에 있는 빈증성에서 남편을 만났다. 두 사람은 같은 회사에서 일을 했다.

"남편이 아주 착했어요. 남성적인 면도 있었고요. 일을 하다 뭐에 부딪히면 대부분 한국인들은 큰소리부터 냈어요.(웃음) 근데 제 남편은 그렇지 않았어요. 실수를 한 원인을 먼저 찾고 차분하게 해결하는 그런 사람이에요."

남편은 베트남에 파견 근무를 하러 온 기술자였다. 옷 만드는 일을 했는데 솜씨가 아주 좋았다.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끌린 두 사람은 2년 동안 연애했다. 그때 희선 씨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그렇다고 남편이 베트남말을 잘 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통하지 않는 언어는 문제가 아니었다. 곧 둘은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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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희선 씨./서정인 기자

"시부모님은 안 계셨고 시누는 환영한다며 결혼을 축하해주셨어요. 저희 집에서는 처음에 결혼을 반대했어요. 주변에 결혼해서 캐나다, 미국으로 간 사람은 좀 있었는데 한국 사람이랑 결혼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그때 한국 사람 이미지가 별로 안 좋기도 했고요.(웃음) 그렇지만 허락받고 결혼을 했어요."

그때가 2004년도였다. 결혼을 하고 단란하게 가정을 꾸릴 생각으로 들떠있던 부부에게 곧 큰 문제가 생겼다. 두 사람이 다니던 회사가 베트남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게 된 것이다. 부부는 한국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희선 씨 뱃속에서는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가방 두 개 들고 뱃속 아이, 남편과 한국에 왔어요. 남편은 원래 인천에 살았었는데 시누이가 창원에 있어서 창원에 정착했어요. 한국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아들을 낳았어요, 생계가 아주 많이 어려웠어요. 남편은 옷 수선도 하고 세탁소도 했어요. 겨우 사파동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살게 되었죠."

절박했던 한국말

희선 씨의 휴대폰에는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한국말이 서툴러 곤란한 상황을 겪는 베트남 이주민과 노동자들이 희선 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다. 희선 씨는 한국말을 잘 한다. 10년 넘게 한국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했으리라 생각했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그녀는 스스로 치열하게 한국말을 공부했다고 했다. 한국 드라마와 사전이 그녀의 한국어 선생님이었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한국말 한마디도 못 하니까 생활하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아이도 나처럼 한국말을 못 할까봐 걱정도 됐고요. 무작정 한국 드라마 보면서 배우고, 모르는 말은 사전에서 찾으면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희선 씨가 다른 사람에 비해 한국어를 빨리 깨친 비결은 누구보다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희선 씨는 2008년부터 3년간 경남이주민노동복지센터에서 일했다. 첫 시작은 통역 봉사 활동이었다.

"처음에는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했어요. 베트남 사람과 한국 사람 중간에서 통역을 했죠. 임금체불 당하거나 체류 문제가 생긴 외국인들, 결혼을 해서 한국에 온 이주민 여성들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서 센터에 도움을 요청하면 중간에서 통역할 사람이 꼭 필요하거든요. 그렇게 통역 봉사를 하다가 센터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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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희선 씨./서정인 기자

희선 씨는 경남이주민노동복지센터에서 근무할 때 법정 통역을 했다. 지금은 상근직으로 일하지 않고 가게를 운영하지만 법정에서 자신을 필요로 할 때는 지금도 통역을 맡아한다고 했다.

법정 통역은 외국인이 피고나 원고 등으로 법정에 섰을 경우 외국인의 말을 통역해 재판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법정에서 그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재판 전후에 필요한 통역도 해야 한다. 외국어에 능통한 한국인이 하기도 하지만 한국어를 잘 하는 외국인도 참여하고 있다. 한국인에게도 어려운 법률용어가 오가고 작은 뉘앙스 차이나 단어 선택이 판결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아무리 한국어를 잘 한다고 해도 무게가 만만치는 않을 테다. 이 일을 희선 씨는 어떤 마음으로 해내고 있을까.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법률용어도 계속 공부했죠. 같이 근무하던 선배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전 아직 한국어가 완벽하지 않거든요. 진정서를 어떻게 내는지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처음부터 소장님, 선배님들이 가르쳐줬죠. 그분들이 있으니까 할 수 있었어요. 힘들지만 기억에 남는 일도 많고 그래요."

이주민의 눈으로 본 한국

한국에 온 지 12년. 베트남을 떠날 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어느덧 열세 살 소년이 되었고 불편함 없이 할 수 있게 된 한국말만큼 그녀는 한국이 익숙해졌다. 희선 씨는 이주민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보는 한국인들도 있다는 것을 안다. 마냥 웃는 표정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 경계심이 아쉽기도 하다. 경계심은 결국 문화 차이에서 오는 것이고 이주민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 또한 그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점은 문화의 차이가 크게 느껴질 때예요. 그렇다고 한국 문화에 천천히 적응할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문화의 차이가 스트레스를 주고 자신감을 떨어지게 만들죠. 베트남은 소수민족이 많고 여러 문화가 함께 있어요. 한국은 단일민족이고요. 그런 부분에서 느껴지는 차이가 분명 있죠."

하지만 10년 넘게 한국에서 지내오면서 분명 변화의 기운이 돌고 있다고 그녀는 느낀다. 그리고 희선 씨 역시 한국인과 소통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제가 다문화축제 맘프(MAMF)에 매번 참가했거든요. 한국 사람들과 외국 사람들이 교감하는 축제잖아요. 처음에는 축제에서 외국 음식을 만들면 한국인들이 먹어보려고 한다거나 하는 그런 반응이 없었어요. 근데 작년에는 외국 음식에 도전해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또 한국 사람들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나 익숙하지 않고 거부감 드는 음식을 보면 표정에 티를 많이 냈어요. 그런데 작년에는 좀 분위기가 달랐어요. 특히 30대 정도 젊은 분들이요. 이렇게 축제 열고 하는 게 영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보람이 있었어요."

베트남 그대로의 맛 내는 쌀국숫집

희선 씨는 쌀국숫집을 하기 전에 노래주점을 운영했었다. 베트남 노래 반주가 나오는 노래방 기계를 베트남에서 구해왔다. 고향 노래를 마음 놓고 부를 공간이 없었던 베트남 사람들은 반가워하며 앞다투어 희선 씨네 노래주점을 찾았다. 생각보다 장사가 잘 돼서 기뻤던 것도 잠시, 희선 씨는 1년 만에 노래주점 문을 닫았다.

"돈을 쉽게 벌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주점을 연 건 아니었는데 그때 '아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구나'라고 알게 됐죠. 처음에는 돈이 모이니까 좋았어요. 근데 갈수록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노래 부르고 술 마시는 곳이니까 늘 시끄러웠고 스트레스도 받았죠. 또 밤을 새우면서 일을 해야 했고요. 그래서 노래주점 문은 닫았어요."

지금은 남편이 외국 식재료를 파는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그 바로 옆에서 희선 씨는 쌀국숫집을 운영한다. 희선 씨는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가게는 아니라고 했다. 이미 한국 사람 입맛에 맞는 한국식 쌀국수를 파는 곳이 많기에 베트남 사람들을 위한 가게를 열었다고…. 쌀국수 맛도 고향에서 먹던 그 맛을 그대로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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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선 씨가 운영하는 쌀국수 음식점(왼쪽)과 남편이 운영하는 가게(오른쪽)./서정인 기자

"직장에 다니면 8시간 직장에 있어야 하니까 아이를 키우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가게를 하기로 했어요. 고향 음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언제든 와서 먹을 수 있고 저도 먹고 싶을 때마다 베트남 음식을 먹을 수 있잖아요. 대박을 꿈꾸면서 연 가게도 아니고요. 손님은 베트남 사람 반, 다른 나라 사람 반이에요. 한국인들도 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한국인 분들에게는 도전해보는(웃음) 그런 맛이죠. 제 나름대로는 잘 운영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희선 씨는 작년에 둘째를 낳았다. 예쁜 늦둥이 딸은 이제 24개월이 되었다. 희선 씨의 친정 부모님도 7년 전 한국에 왔다.

"부모님은 동생들이 집에서 멀리 직장을 잡아서 혼자 계시고 저는 여기서 아이 키우면서 많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한테 도움을 요청해서 같이 살고 있어요. 저희 부모님이 저희보다 한국 생활 적응하기 힘드셨을 거예요. 앞으로 아들, 딸 공부시키고 부족한 거 없이 키워야죠."

희선 씨는 귀화했지만 자신은 베트남인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라고 한국 사람처럼 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테두리 안에서라면 얼마든지 다양성을 드러내며 살 권리가 있다. 희선 씨가 법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이주민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걱정과 달리 이미 서로 섞이고 있는지 모른다. 김치를 잘 먹는 외국인이 있듯. 더 향내 짙은 베트남 쌀국수를 좋아하는 한국인이 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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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희선 씨./서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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