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아이들에게 배운 동심으로 동시를…정년 후에는 훗날 읽힐 시조 쓰고 싶다"

정년을 앞둔 초등학교 교장이 동시집을 냈다. 환갑을 지나 예순둘의 나이지만 동심을 여전히 간직한 문인이다.

지난 2월 3일 <돌멩이야 고마워>를 펴낸 이동배(62·김해 삼성초등학교 교장) 시인을 만났다. 아이들이 하교를 서두르는 오후께 학교를 찾았다.

'쨍쨍 내리쬐는/뙤약볕 아래/벌겋게 달궈진 들판에서/그늘 찾아 헤매던/개미 식구가/돌멩이 밑으로/들어와 땀을 식혀요.//돌멩이야, 고마워.//졸졸 흘러가는/맑은 시냇물 속/미끈미끈 미꾸라지/숨바꼭질 하다가/돌멩이 밑으로/파고 들어요.//돌멩이야, 고마워.//(후략)('돌멩이야 고마워' 중)'

오는 8월 교단에서 물러나…고향 하동으로 갑니다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학교는 조용했다. 교장실은 더 그랬다. 이 씨는 깔끔하게 정리된 테이블로 안내했다. 교장실을 살짝 둘러보고 의자에 앉았다. 교장실 한 벽면에 세워진 책장에는 시조집과 시집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계간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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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배 김해삼성초등학교장./김구연 기자

그는 명함을 건네면서 오는 여름 김해를 떠나야 한다는 말부터 꺼냈다.

"김해문인협회 일을 더 해야 했는데…. 학교 일을 정리하면 고향으로 갑니다. 하동이에요."

명함을 훑었다. 앞면은 '꿈나르미' 로고가 박힌 교육청 명함이다. 김해삼성초등학교 교장이라고 적혀있다. 뒷면은 사단법인한국문인협회라고 크게 적혔다. 악력을 살펴보니 다양하다. '한국, 경남문협 이사', '합천, 김해문협 감사', '경남·진주 시조시인협회 회장', '섬진시조문학회장', '경남아동문학회 부회장' 등.

"나이가 드니 절로 직책도 높아지네요. 선생은 매번 근무지가 바뀌잖아요. 그때마다 지역 문협에서 활동했죠. 맨 처음은 진주였습니다. 학창시절 개천예술제에서 장원을 받았지요. 시를 썼는데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아마 주제는 '손'이었지 싶어요. 즉흥적으로 썼던 것 같네요. 고등학생이었지만 진주문협 준회원이었어요."

돈부터 벌려고 택한 초등학교 교사

하동 북천이 고향인 이 씨는 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전학도 많이 다녔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진주 반성에 있는 이모집에 정착했다.

"친이모는 아니고 어머니 친구댁이었어요. 학업에 전념하라고 저를 맡긴 거죠. 이모집에는 동급생이 한 명 있었는데 같이 지냈습니다."

그의 학창시절은 가난했다. 생활비와 학비 모두 스스로 벌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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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배 김해삼성초등학교장./김구연 기자

"고등학생 때 가정교사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동네에서 소문이 난 1급 강사였답니다. 진주 시내에서 알아주는 병원장 딸과 아들을 가르칠 정도였다니까요. 형님도 초등학교 선생님이에요. 어려운 사정 탓에 교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죠."

이어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놀라웠다. 아버지 얘기였다.

"아버지는 늘 승진에서 빠졌습니다. 빨간 줄이 따라다녔거든요. 소위 말하는 '빨갱이'라는 주홍글씨였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부친은 오르간을 칠 수 있다는 이유로 한 단체의 문화부장을 맡았답니다. 이 단체는 빨갱이라고 몰렸고 인민재판까지 받았어요. 아버지는 단체 우두머리를 탈출시키는 데 힘을 보탰고 그 이후로 빨간 줄이 그어졌죠. 1960년대부터요. 하동 출신 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지리산>을 보면 비슷한 사건이 나오는데 그 실제 주인공이 바로 우리 아버지시죠. 이 '말'자 '문'자 쓰십니다."

아버지는 교직생활을 이어갔지만 집안 형편은 넉넉지 못 했다. 그와 형제들도 '피해'를 봤다고.

"남동생이 사관학교 입학에서 낙방했어요. 마지막 면접에서요. 성적도 좋았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도 연좌제였겠죠."

그래서 시인을 꿈꿨던 문학 소년은 2년 만에 졸업할 수 있는 교대, 졸업만 하면 군대에 가지 않고 취업할 수 있는 초등학교 교사를 택했다.

문학은 돈벌이가 안 됐다. 그는 글을 쓰려면 우선 돈부터 버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권정호 전 교육감 "동배야, 글 좀 써도 되겠다"

그의 글쓰기 실력은 월등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내외 백일장 대회를 휩쓸었다. 동아리 문예부장을 맡았고 고등학생 때는 진주에서 활동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글을 썼다. 진주고, 진주여고, 삼현여고의 문예반 학생들이 모인 '학생문학회' 활동을 했다. 개천예술제에 출전해 장원을 받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도 교지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대학생 때 삼현여중 학교 신문 제작을 돕기도 했다.

그와 권정호 전 교육감의 인연은 특별하다. 이 씨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본 사람은 중학교 담임교사였던 권정호 씨였다.

"진주중학교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 시를 썼어요. 그때 선생님께서 '글 좀 쓰면 되겠다'라고 말씀해주셨죠. 칭찬과 인정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동기부여와 큰 자극이 됐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그가 진주교대 부설초등학교에서 교생 지도를 할 때 교수가 된 스승을 다시 만났다.

"권정호 전 교육감은 진주교대 총장과 경남도교육감을 지내셨지만 저는 여전히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선생님은 저를 '동배야'라고 부르고요. 지금 생각해도 인연이 참 신기하죠."

그는 교단에 서면서 학교에서도 글 쓰는 시간을 갖자고 마음먹었다. 문예부도 운영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첫 발령지는 하동 악양초등학교였다. 그는 교원예능경진대회에서 나가서도 글쓰기 실력을 뽐냈다.

하지만 문학세계로 빠져들지는 않았다. 스스로 영감을 받지 못 했다.

"대학생 때 '이상한' 연애사건이 있었어요. 연애편지로 상대방과 이별하게 됐죠. 그 이후로 소설도 싫고 시도 지겹고 글 쓰는 게 좋지 않더라고요. 아무튼 글을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방황했습니다."

방황은 꽤 길었다.

하동에서 사천으로, 또 남해에서 진주로 학교를 옮기는 동안 그는 펜을 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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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배 김해삼성초등학교장./김구연 기자

이문형 시조시인 만나 펜을 다시 들다

그러다 한 동료를 만난다.

"진주 평거초등학교 근무 시절 이문형 교사를 만났어요. 그는 시조에 관심이 높고 좋은 시조도 많이 썼어요. 선생님과 같이 근무를 하면서 대화를 많이 나눴고 문학 이야기도 자주 했어요. 저에게 '옛날에 글 좀 썼다면서'라며 자주 물었죠. 그가 요즘 왜 글을 쓰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사실 이 씨는 갈증이 났다.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지도하면서도 '등단을 한 선생님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고 각종 백일장 대회에서 만난 심사위원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럴수록 인정받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때 동료 이문형 교사는 큰 힘이 됐다. 그가 쓴 시조 30편을 찬찬히 살펴보고 5편을 골라 '현대시조' 응모를 제안했다.

그 덕에 1996년 현대시조 신인상으로 등단할 수 있었다. 이는 그의 가슴에 새 불을 지폈다. 문학에 대한 열망을 커지게 했고 시조에 파묻히게 했다. 그는 학생 때 준회원으로 활동하던 진주문인협회에 가입하고 경남문협에도 발을 들였다. 한국문협에서도 활동했다. 진주시조시인협회를 만들기도 했다.

진주에서 시대의 아픔을 시조로 읊는 김정희 시인도 만났다. 김 시인은 현재 진주 시조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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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배 김해삼성초등학교장./김구연 기자

'섬진시조문학회' 꾸려 지역 문학에 이바지

이 씨 작품에는 고향, 북천 이야기가 많다. 그에게 하동은 언제나 그리운 곳이다.

그래서 1996년 등단하고부터 '섬진시조문학회'를 꾸렸다. 하동에서 태어난 시조시인을 모아 단체를 만들었다. 그는 타지역에서 근무를 하면서도 섬진시조문학회를 이끌어 나갔다. 사무국장을 하며 한 해도 빠짐없이 섬진시조문학지를 만들었다. 몇 해 전부터는 회장직을 맡고 있다.

"섬진시조문학지를 1년에 한 번씩 냈어요. 총 27호까지 나왔답니다. 원래 하동에 있으면서 운영해야 하는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잖아요. 회원들도 뿔뿔이 흩어져있다 보니 결속이 잘 안 돼요. 창간 회원들도 빠져나가고요. 그래서 최근 문학지를 2년 정도 발간하지 못 했어요. 오는 여름 다시 복간할 계획입니다. 퇴직하면 하동으로 가야죠."

또 합천에 근무할 때는 합천문학회에서 시조를 썼다. 이영성 시조시인, 김해석 시조시인과 의기투합해 <합천호 맑은 물에 얼굴 씻는 달을 보게>라는 책을 펴냈다. 이들은 한국 시조계에서 이름난 인물들이다.

그는 어디서든지 문협에 가입해 적극적이었다. 경남현대불교문인협회, 한국펜클럽에도 그는 소속되어 있다. 여러 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다 보니 연간 창작물 50여 편을 발표해야 했다. 다작의 비결이다.

아이들과 만남은 동시로 이어져

"동시는 아이들을 지도하면서부터 썼죠."

시조시인인 그가 동시에 관심을 둔 것은 초등학교에서 문예부를 만들면서부터다. 요즘 초등학교는 동아리 개념이 없다. 모두 방과 후 수업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특히 방과 후는 영어 등 학부모들에게 인기 있는 수업으로 이뤄져 문예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씨는 직접 방과 후 수업에 문예부를 넣었다. 김해 삼성초등학교에 문예부가 있는 것도 그가 만들어서다. 학부모 호응을 얻으려고 무료로 수업을 했다. 김용웅 시인을 초청해 문예부를 맡겼고 학교 예산을 쪼개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삼성초등학교 전 근무했던 김해 영운초등학교에서도 문예부를 운영했다.

이 씨도 아이들을 지도했다. 직접 글을 써야 했다. 그렇게 본보기로 지었던 동시가 <돌멩이야 고마워>로 묶였다.

그는 지도교사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삼성초등학교, 영운초등학교 학생들이 백일장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또 그가 지은 '가을걷이'는 아이들이 동요로 불러 김해시합창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김해 대동, 영운, 삼성초등학교에서 모두 불렀다.

"아이들을 가까이하다 보면 우리 선생들도 아이들과 같아진다는 말이 있어요. 어쩌면 '유치한' 어른들이지요. 시조 공부를 했기에 아동문학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어요. 동시를 가르치다 보니 동시조도 썼죠. 동시를 쓰는 과정에서 하나의 정형만 갖추면 시조가 되거든요. 아이들에게 시를 보여주려고 쓴 게 엄청나더군요. 그래서 큰 마음을 먹고 책으로 폈습니다."

<돌멩이야 고마워>는 산이나 바다와 같은 대자연은 물론 우리가 흔히 지나쳐 버리는 돌멩이와 같은 아주 작은 것에도 귀를 기울였다. 1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꽃', 2부 '웃음꽃', 3부 '고향, 들판의 꽃', 4부 '혼자 핀 꽃'으로 나눠 64편의 동시를 담았다.

그는 요즘 동시가 어렵다고 했다.

"옛날 동시와 현재 동시가 달라요. 지금 동시는 어렵죠. 아이들 마음으로 아이들이 읽게끔 써야 하는데 관념적으로 파고드는 게 많은 것 같아요. 또 백일장 대회를 심사하다 보면 아이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어른스러운 작품이 많고요. 얼마 전에 잔혹 동시가 논란이 있었죠. 저는 아이가 제 엄마를 보고 썼다는 시에 큰 충격을 받았답니다. 부모는 반성을 해야 해요. 또 아이 작품으로 보기도 어려워요. 동시는 그 마음을 투영해야 하죠. <돌멩이야 고마워> 중 '돌멩이야 고마워'가 가장 애착이 가요. 요즘 아이들이 고마움을 잘 몰라요. 그래서 우리에게 늘 아낌없이 주는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가져보자는 뜻에서 썼죠."

"훗날 오랫동안 읽히는 글 남기고 싶다"

진주에서 함께 근무했던 이문형 시조시인과 합천 출신 이주홍(1906~1987) 시인을 닮고 싶다는 이동배 시인.

그는 '어머니라는 이름은/누가 지어냈는지/모르겠어요./"어…머…니…"하고/불러보면/금시로 따스해 오는/내 마음'으로 시작하는 이주홍의 '해같이 달같이만'을 소개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쓴 글이 오랫동안 읽히길 바란다. 독자들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이런 마음에서 <돌멩이야 고마워>도 800권을 찍어 교육청에 기부했다. 여러 동시 가운데 '꼬마 이슬 벌섰다' 평이 좋단다.

'꼬마 이슬/벌섰다.//울상 지으며/밤새/거꾸로 대롱대롱//아침 햇살 나타나면/내가 언제 벌섰나?//반짝반짝/반짝반짝/화안한 얼굴//'('꼬마 이슬 벌섰다')

"이제 곧 순수 문인으로 돌아갑니다. 김해는 추억으로 남기로 하동에서 창작활동에 매진할 거예요. 시조에 전념할 계획입니다. 하동문협에서 발행한 문예지를 보지 못 했어요. 소식지도 내면서 하동문협을 일으키고 싶어요. 섬진시조문학지도 다시 발간하고요. 그런데 젊은 친구들이 지역에 없어요. 다들 직장에 얽매여있으니 문인이지만 활동을 잘 안 하죠. 젊은 피를 모아야 하는데, 숙제입니다. 올해는 여러모로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겁니다. 벌써 여름이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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