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상과 몽고식품 살리기 나선 전 재경마산향우회장

재경 마산향우회가 창립된 건 2002년이라고 한다. 재경 경남향우회에 소속된 도내 시·군 향우회 중에는 벌써 창립 50년이 넘은 곳이 있을 정도인데, 규모 면에서 마산이 도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는 걸 감안하면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경마산향우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던 남재우 한국기업윤리경영연구원 이사장은 마산 동성동 출신이다. 남 이사장은 성호초등학교, 마산중, 마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경기도지사였던 때 (1995년) 초대 경기도 정무부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남 이사장은 서울에 머물고 있지만 고향 마산과 관련된 일에 정열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지역 공론장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남 이사장은 <경남도민일보> 등 지역 언론에 이름을 오르내리고 있다. 이은상 시인과 김동진 작곡가를 기리는 동상을 건립하기 위한 '만원의 가고파 사랑' 캠페인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으며, 몽고식품 살리기 운동도 향우회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다.

'만원의 가고파 사랑'은 고향이 마산이라는 이유로 독재부역·친일 인사를 기리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몽고식품 살리기 운동은 '회장님 갑질'에 대한 용서가 지역사회 공감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이른 움직임이라는 의견 역시 비등한 상황이다.

남 이사장의 고향 이야기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에 대한 소신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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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재우 한국기업윤리경영연구원 이사장./임채민 기자

Q: 재경향우회 창립이 생각했던 것보다 늦었네요.

"그 전에 마산학우회라는 게 65년부터 있었어요. 마산향우회가 창립되기 전에는 마창진향우회가 먼저 창립됐어요. 근데 마창진 향우회가 제대로 이어가지는 못하다가, 2000년 이후에 마산, 창원, 진해 향우회가 따로따로 구성이 되었어요."

Q: 태어난 곳은 어디입니까?

"동성동이에요. 당시 5대가 한집에 살았어요. 저의 증조부부터 조카들이 함께 살았으니까요. 제가 사업할 때는 마산에 사업체를 두기도 했습니다. 옛날 고려모직 있던 자리에 공장이 있었죠. 나중에는 힘들어서 그만뒀지만요."

남 이사장은 작고한 강주성 전 3·15 기념사업회 회장과 죽마고우라고 했다.

"국민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친구로 지냈죠. 마산에 자주 가는데, 갈 때마다 강 회장 만나서 술 한잔씩 나누었죠. 자주 싸우기도 하고 그랬어요."

Q: 그럼 1960년 3·15 항쟁 당시 강 회장님과 함께 참여했나요.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데모대에 동참했었죠. 그때가 봄방학 때여서 마산에 있을 때였는데, 데모하다가 나중에 경찰 조사도 받고 그랬어요. 하마터면 빨갱이로 몰려 계속 잡혀 있을 뻔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해서 학기가 시작돼 서울에 왔는데 4·19가 일어난 거예요. 그때 학우들이 제가 마산 출신이라고 하니까 마산 사람이 앞장서야 된다고 해서 데모대 선두에 섰습니다. 광화문 결사대라는 걸 조직했었죠. 제가 있던 대열은 3진 정도였는데, 경무대를 향해 1진이 올라가니까 총소리가 나고 뒤에 있는 대열은 엎드리고 그랬죠.

아무튼, 강주성 회장하고는 술도 많이 먹고 다투기도 많이 했죠. 강 회장이 참 마산에 큰일을 많이 해놓았죠."

Q: 3·15 의거탑 앞에서 재경마산향우회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한 적도 있었죠.

"마산을 3·15 성지라고 하는데, 이름을 빼앗겼지 않습니까. 이주영 의원이 마산 분리 법안을 제출했을 때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재경 마산향우회 원로 80여 분과 논의를 한 후에, 버스 한 대 대절해서 마산으로 간 거죠. 이름이라도 되찾자고 주장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남 이사장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저를 포함해 그곳에 갔던 분들이 정치를 할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도움을 받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역사와 문화를 자랑할 게 많은 우리 고향인데 어째서 마산이 이렇게 돼 버렸느냐는 안타까움이었죠. 아마 마산에 거주하시는 분들보다 향우들의 상실감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Q: 최근에 재경마산향우회에서 몽고식품 살리기 운동에 적극 나섰는데요.

"김만식 회장이 저보다는 한 살 많은데, 몸이 안 좋아서 졸업은 저하고 같이했어요. 김 회장이 30대에 회사를 맡아서 뛰어다니면서 영업도 하고 그랬어요. 제가 알기로는, 영화배우 김동원 씨가 한국전쟁 때 시민극장 밑에서 동원다방을 하면서 마산에 살았어요. 그때 마산에서 간장을 먹어보고는 서울에 가서도 간장 배달을 시켜 먹은 거예요. 그때 김만식 회장이 간장통 울러메고 서울에 배달을 가기도 했어요.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영업을 하기 위해 직접 식당에 찾아다니면서 간장하고 밥하고 바꿔 먹기도 하고 그랬어요. 회사를 키우기 위해 고생을 많이 하긴 했지만, 잘못한 건 잘못한 거죠.

제가 졸업을 같이 해서 무조건 김만식 회장을 도우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김만식 회장은 망해도 되는데, 110년 된 기업이 죽으면 안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김만식 개인을 위해서 하는 건 아닙니다."

Q: '회장님 갑질 논란'에 대한 회사의 대응이 나오긴 했지만 그 진정성을 받아들이는 데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분분합니다.

"빨리 대책을 세워서 지역에 공헌하는 명품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지역 공헌 사업을 꼭 발표하라고, 그건 꼭 해야 한다고 전달했습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기업윤리경영연구원 업무와도 맥을 같이 하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하는 일은 절대 아닙니다. 김만식 회장과는 졸업은 같이했지만 그렇게 친분이 깊은 사이는 아닙니다. 마산 일이라면 그냥 마음이 쓰이고 그래요."

Q: 한국기업윤리경영연구원에 대해서 소개하신다면.

"요즘 하는 일 중에는, 내부자 신고시스템 특허를 받은 게 있어요. 곪아 있는 조직 상태를 최고 결정권자가 알 수 있게 하는 거죠. 이게 제대로 안 되면 폭로가 되고 투서로 가는 거죠. 폭로와 투서를 장려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조직이 고여서 썩는 걸 막아주자는 겁니다. 많은 정부부처와 지자체에 이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Q: 지난해 말 마산가고파국화축제 때 재경마산향우회에서 개최한 시민대동제도 그렇고, '만원의 가고파 사랑' 캠페인을 펼치면서 다시 고향 마산에서 '이은상 논란'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일제 치하에서 독립투사로 뛰지 않았으면 대부분 사람들이 체제 안에서 살았을 것 아닙니까. 일제에 부역하면서 시민들을 강제로 징용을 보내거나, 이런 친일 한 사람 아니라면, 생계형 친일은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그럼 면에서 보면 이은상은 친일은 안 했습니다.

저희들이 하려고 하는 건, 이은상과 김동진 동상을 세우려는 겁니다. 노산이 1932년에 가고파 시를 썼어요. 그때 김동진이 19살이었고 숭실전문학교 5학년인가 6학년인가 그랬을 거예요. 숭실에 강의하러 간 양주동 선생이 노산 시를 보고 '이 시가 참 좋다'며 김동진에게 작곡을 해보라고 하죠. 그때 김동진이 4절까지만 작곡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73년인가 김동진이 6절까지 작곡을 하고 마산에서 직접 공연을 했습니다.

이은상은 남쪽 청년, 김동진은 북쪽 청년 아닙니까. 남북 청년이 만든 노래를 세계 각국에서 다 부르지 않습니까. 가고파만큼 유명한 게 있습니까. 김동진을 일컬어 친일이라고 하지만, 친일같이 보일 수 있는 일을 했음에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걸 봐야 합니다."

Q: 지금 마산역에는 이은상 시비가 있고, 또 그 옆에 이은상의 '3·15 모독' 발언을 새긴 또 다른 조형물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이은상의 말이 3·15를 매도한 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 당시에 그 정도 이야기 안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젊은 친구들이나 양순한 시민들이 다칠까 싶어 자중하라는 의미에서 한 거죠."

Q: 결과적으로 지역사회의 갈등을 조장할 수 있고, 또다시 극한 대립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다수와 소수의 대립입니다. 어쨌든 누가 다수냐 소수냐를 떠나서 마산이 지닌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잘 살도록 만들어 보겠다는 겁니다.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과거를 가지고 그렇게 왜 못하게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남 이사장은 이은상 논란과 재경마산향우회가 추진하는 '만원 가고파 사랑 캠페인'과 관련해 그 어떤 논쟁에도 적극 참여할 의지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Q: 앞으로 계획이 있으시다면요.

"제가 알고 있는 마산 이야기를 정리해볼까 합니다. 제가 살 때 마산 인구가 8만 명에서 15만 명 정도일 때니, 여러 집안 이야기를 거의 다 알죠. 목발 김형윤 선생께서 <마산야화>를 남기셨는데, 30∼40년대까지 쓰시고 그 이후는 안 나와요. 그래서 4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정리해보고 싶어요.

아, 무학산이라는 산 이름도 일본 사람들이 붙인 거여서 목발 선생이 욕을 많이 했어요.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공동묘지 허가받으면서 무학산이라 이름 붙였는데, 산 정상에 또 쇠말뚝도 박았죠. 무학산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두척산이라고 해야죠."

남 이사장은 마산 왕래를 자주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강주성 회장 죽고… 이제 막상 가면 (만나는 친구가) 한 사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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