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에 휘말린 파란만장 가족사, 글로써 그 한 풀고 싶다

"선거 때가 되어가니 정치인들이 안부 전화를 걸어옵니다. 필요할 때만 아버지를 찾는 자식을 후레자식이라 합니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과 입담으로 1만 9468명의 팔로워를 가지고 있는 인기 트위터 사용자. 그는 현재 고성 구룡사의 주지 스님이자, 수필작가인 효전 스님(52)이다.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순탄한 삶을 살 것만 같았던 그녀는 상처가 많다. 동생의 죽음과 5년 전 알게 된 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가족의 상실은 그녀에게 한을 남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오롯이 글로 승화시켰다.

그녀가 처음 출판한 수필 <춘몽>(들 뫼, 2013)은 발간되자마자 영풍문고와 교보문고에서 베스트 신간으로 뽑히며 한 달 만에 2000권이 팔렸다. 그리고 바로 그해 들 뫼 문학상(2013)을 받았다. 요즘은 각종 시민단체 활동과 인권 강좌(성남시) 등으로 바쁘다. '스님', '수필작가'와 더불어 '사회 운동가'라는 타이틀까지 붙은 그녀를 고성 구룡사에서 직접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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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국 기자

파란만장 가족사, 동생의 죽음, 현모양처를 꿈꾸던 소녀

Q: 여고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출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출가하기 이전의 삶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형제가 있으셨나요?

"저는 밀양 태생입니다. 친가, 외가가 모두 엘리트 집안이었습니다. 재산도 풍족했고요. 아버지 어머니 모두 머리가 좋으셨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 일(보도연맹 학살사건)로 방황을 많이 하셨어요.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직접 겪었는데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전해 들은 저도 충격이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노름도 하시고, 결혼도 3번을 하셨어요. 부인들과 사별을 2번이나 하셨죠. 배다른 동생들도 있답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동생들(배다른 동생들) 말고는 남동생이 있었어요. 정말 잘 지냈답니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고, 저희가 그런 남매였어요. 밥을 먹으면 동생이 저한테 쌈을 싸서 입에 넣어주곤 했답니다. 어른들이 저희보고 어쩜 저렇게 우애가 좋으냐며 늘 칭찬을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16살 때, 아주 추운 날 졸업식을 앞두고… 그 사이좋던 동생이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정말 슬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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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국 기자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Q: 그 일이 스님이 되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인가요?

"그렇죠. 동생이 뇌수막염으로 13살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실 그 병을 판정받고 의사가 그랬어요. 살아도 못 움직일 것이다. 몸을 쓰지 못 할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거라고 의사가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그 애가 몸을 못 써도, 살았다면 내가 옆에서 평생 동생 수발하며 살 생각이었어요. 내가 결혼하게 되면 한집에 데리고 살려고 했죠. 그런데 동생이 살지 못 했어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렇게나 사이좋던 동생이 떠나니 우리가 도대체 왜 (세상에) 나고 죽는지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절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었습니다. 동생이 세상을 뜨고 백일 뒤에 통도사를 갔었고, 처음 법당에 들어가 향을 올리고 절을 했었죠. 그날 출가를 결심했어요."

Q: 유년기 시절에는 어떤 아이였나요?

"총명하고, 똑똑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제가 기억력이 좋거든요. 저는 한 살 때부터 기억이 다 납니다. 단편적인 기억이 아니고요, 모든 것이 다 기억나요. 그래서 암기력도 엄청 좋습니다. 한번 책을 보면 그게 사진 찍는 것처럼 기억되더라고요. 기억한 것을 찾을 때는 찍힌 페이지를 머릿속에서 넘겨보면 바로 나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메모하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일기도 7살 때부터 썼습니다. 이건 꼭 써주세요(웃음). 요즘 그 나이 때부터 일기 쓰는 사람 없잖아요? 하지만 그 일기들은 머리를 깎으면서 모두 다 태워서 지금은 없어요. 그걸 스님이 되면서 한 장 한 장 모두 태웠답니다. 불에…."

Q: 어렸을 적에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저희 할아버지가 단감 개량종, 그러니까 지금 진영단감의 묘목을 처음 한국에 가져오신 분이었습니다. 200개를요. 그게 지금의 진영단감이 된 거죠. 원래 우리나라 토종 감은 조그맣고 그렇거든요. 그래서 저는 우리집이 단감 과수원을 하여 제 성이 감 씨가 된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성을 다른 걸로 하면 안 되냐고 물은 적이 있었어요. 하하. 여섯 살 때. 하지만 막 싫어하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친구들이 저더러 너는 단감이가? 땡감이가? 홍시가? 이렇게 놀리면 저는 나는 다안감~했거든요. 그리고 같이 웃고. 지금도 단감 사 와서 깎아 먹을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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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국 기자

Q: 스님께서도 사춘기라는 걸 겪으셨나요?

"아니요. 워낙 온순한 아이여서 사춘기라는 것은 모르고 살았어요. 하지만 첫사랑은 있었답니다. 여고 시절 편지를 주고받던 남학생이 있었어요. 코스모스가 피면 그 길에서 같이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징검다리에 물이 차면 개울가에서 그 애가 업어 준다고도 하고, 업히고 그랬었어요. 그런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군인이 된 애인이 있는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 준 적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글재주가 있다 보니까. 막 그런 일도 친구들이 부탁하고 그랬었습니다."

오래된 기억 속에 잠기는 얼굴은 여느 어린 소녀와 다름없었다. 19살에 출가하여 속세와 단절하고 살았기 때문일까. 그녀의 표정도 소녀 같았다. 아마 속세에서의 세월이 빗겨나간 모양이었다. 인터뷰에 앞서 사전조사를 하면서 읽어본 글에서도, 구사하는 말들이 모두 소녀같이 맑았다. 하지만 그녀도 어렸을 적에는 꿈이 많았을 터. 어렸을 적 꿈은 무엇이었을까?

Q: 그럼 스님이 되겠다고 결심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셨나요?

"저도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서 그렇게 살고 싶었죠. 아이들 한 5명 낳아서 큰 상 펴고, 내가 맛있게 만든 밥 먹이면서 흐뭇해하고, 남편 일 나갔다 돌아오면 발도 씻겨주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답니다. 여느 여자들처럼. 저희 집 어른들은 제가 스님이 안 되었다면 교수나 의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워낙 기억력이 좋고 총명하다고 했거든요. 저 역시 스님을 안 했다면 그런 일을 하고 있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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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국 기자

18세 소녀, 속세를 떠나다

Q: 출가를 처음 어느 절로 하신 건가요?

"동생이 그렇게 되고 나서 처음 머리를 깎고 19살, 그러니까 만 18살에 양산 내원사로 입산 출가했습니다. 그 후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선방(스님들이 참선 수행하는 것)을 다니다가 12번 안거(방에서 나오지 않고 공부하는 것) 하고 구룡사를 창건했지요."

Q: 1994년에 구룡사를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창건했다 들었습니다.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요.

"예, 처음엔 정말 30만 원을 들고 절 짓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30만 원으로 이 허허벌판에 기둥부터 지붕까지 다 했죠. 재료도 직접 다 공수하고. 저도 예전에는 손이 곱다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하지만 그 고생을 하고 나니 지금은 곱질 않네요. 저도 일을 하고, 사람을 고용해서 일을 하고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 밥을 제가 다 해 먹였어요. 제가 밥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식당에서 먹으라 했더니 (인부들이) 식당 밥은 맛이 없다고 스님 밥이 맛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뒤로 밥을 너무 많이 해서 한동안 밥을 짓기가 싫더라고요. 집 짓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새 몇억 가지고 집 못 짓는다는 사람 보면…. 30만 원으로 지은 내 앞에서 말이죠. 하하하."

Q: 혹시 종교인의 길을 걸은 걸 후회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 나의 삶에 만족을 합니다. 스스로 멋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집에서도 출가한 제가 가장 성공했다고들 합니다. 갈등한 적은 있었죠. 머리를 깎고도 그런 (결혼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때는 갈등을 했어요. 흔들렸었습니다. 한때 현모양처가 꿈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때 스님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쭉 이 길을 걸어온 것이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금 제 모습이 너무 좋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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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국 기자

책 100권 출판과 장학재단 설립이 목표

Q: 현재 트위터를 통해 사회적, 정치적 사태에 대하여 강하게 목소리를 내고 계십니다.(세월호 추모, 현 정권 비판 등) 종교인으로서 견고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상해보세요, 독사가 아기의 목을 물어뜯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비심으로 그 독사를 살려줘야 할까요? 그것이 자비실천일까요? 아닙니다. 이럴 때는 독사를 쳐 죽이고 아기를 구하는 게 정답이지요. 즉, 아무 때나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어설픈 관용과 용서는 살생의 공범일 뿐이죠. 절대약자가 짓밟히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에요. 특히 성직자라면 약한 자의 목을 뜯고 있는 독사를 쳐 죽여야 합니다. 살생을 하면 안 된다 하여 그런 상황에서도 맹꽁이같이 독사를 죽이지 않고 아기가 독사에게 물려죽는 상황을 뻔히 눈으로 보고도 가만히 있다면 그건 종교적 관용도, 중립도 아닙니다. 독사의 사악한 행동을 묵인하는 공범일 뿐이죠. 그리고 스님은 종교인이기 전에 국민의 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투표도 하지요. 그러기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가 잘못하고 있다면 비판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내가 신부니까, 수녀니까, 스님이니까 하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약자를 짓밟고 약자가 신음하는데도 입을 닫으면 비겁한 거죠.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하고 약탈하고 도륙했을 때 사명대사 같은 분들이나 승병이 나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명대사나 승병 보고 정치승이라 하진 않습니다. 그분들은 불의에 가만있지 않은 의인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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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국 기자

Q: 현재 <춘몽>이라는 수필집을 내시고 상도 받으셨습니다. 다른 책도 출판을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고요. 블로그에도 계속해서 글쓰기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지속적인 글쓰기를 하는 특정한 목적이 있으신가요?

"글쓰기에 어떤 뜻을 두고 글을 쓰는 것을 시작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글을 내는 곳마다 상을 받거나 당선하니까, 글재주가 있는 거죠. 어렸을 때도 메모하고 글 쓰는 걸 워낙 좋아했고, 사람들이 또 제 글을 좋아해 주세요. 감사하게도. 그래서 저도 계속 쓰게 되었죠. 사실 지금 <춘몽> 말고 출판 준비 중인 것이 12권 정도 돼요. 너무 많아서 책 제목이 기억이 다 안 날 정도예요. 편집 속도가 글 쓰는 속도를 못 따라오더라고요. 워낙 많이 쓰다 보니까(웃음). 글에서 뜻을 찾자면 저희 할아버지 이야기(보도연맹 사건)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Q: 앞으로 글을 계속 쓰신다면 어떤 글을 쓰실 계획이신가요?

"저희 가족사를 소설로 내고 싶어요. 저희 할아버지 일도 너무 억울하고 아직도 분노합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이승만으로부터 정치보복으로 괭이바다에 수장당하셨습니다. 보도연맹 사건이죠. 그런데 그 사실이 은폐되었어요. 자국민을 130만 명이나 학살하고 덮어버린 그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제 인생도 드라마틱하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파란만장하게 살아왔어요. 아프기도 많이 아프고, 고생도 많이 하고. 출판사에서도 여러 곳에서 연락이 옵니다. 같이 소설 쓰고, 책 내자고. 스님 돈방석에 앉을 수 있다며 하하. 저는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글 쓸 소재가 많아요. 그것은 좋은 점이라 할 수 있죠. 그리고 언제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괭이 바닷가에 가서 빕니다. 필력을 좋게 해달라고요. 웃긴 이야기는 사람들이 배꼽 잡고 웃고, 슬픈 이야기는 펑펑 눈물 흘릴 수 있을 정도로 쓸 수 있는 필력을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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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국 기자

Q: 스님은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싶으신가요? 글 쓰는 것 이외에 하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자신만의 꿈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책을 100권 써 보는 것이 목표입니다. 사실 제가 신장도 안 좋고, 얼마 전에 뇌종양 수술을 해서 지금도 몸이 많이 안 좋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힘도 달리고 예전만큼 글의 소재를 얻는 (괭이)바닷가를 걸어 다니지도 못해요. 하지만 제가 지금 출판 준비 중인 것만 12권이고, 이미 다 써놓은 것만 해도 여러 권 있습니다. 아직 출판 작업을 시작하지 않은 것들이요. 어렸을 때부터 끈기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는 소리 듣고 자랐어요. 그래서 글 쓰는 속도가 빨라서 정말 건강하기만 하다면 100권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한 가지 꿈이고, 또 다른 것은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저희 할아버지처럼 한국전쟁 때 억울하게 희생된 유가족 분들 자녀를 대상으로 장학금을 주는 그런 재단을 설립하고 싶었는데, 생각하다 보니 그냥 돈이 없어서 공부 못하는 불쌍한 학생들을 모두 다 돕고 싶더라고요. 저희 할아버지 이름이나 제 이름으로 장학재단을 세워 학생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이미 기부도 제가 이때까지 한 것을 합치면 1억 정도 했을 겁니다.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답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그래야 글 많이 쓸 테니까요.(웃음)"

장학재단과 기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스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려운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 눈을 통해 전해졌다. 앞으로는 아프지 않고 건강하시기를, 스님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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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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