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시민을 위한, 시민에 의한 시민운동 33년

1844년 6월 6일 영국 런던. 청년 12명이 모여 기독교청년회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난 1946년 5월 8일 한국YMCA 운동에 있어서 10번째로 마산YMCA가 창립했다. 2016년은 마산YMCA 창립 70주년이 되는 해이자 지난 2000년 2월 마산YMCA와 인연을 맺은 차윤재 사무총장이 16년의 임기를 마치고 은퇴하는 해이다. 영원한 기독청년의 33년 YMCA 외길을 뒤돌아보았다.

마산시민운동 16년의 아쉬움, 정치의 균형

2월 초 마산YMCA 실무자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차윤재(60) 마산YMCA 사무총장 캐리커처를 그리고 싶은데 화백 추천을 해달라는 전화였다. 그리고 그 캐리커처는 3월에 있을 차 사무총장 퇴임식에서 선물로 증정할 계획이란 귀띔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신문 지면을 장식하며 지역사회 문제 해결에 앞장서 온 차 사무총장 근황이 궁금해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마산운동장 옆 마산YMCA 회관으로 향했다.

"박 기자와 단둘이서 차 마시는 것은 처음이네요. 기자회견장 아니면 캠페인 현장에서만 보고 헤어졌는데….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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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윤재 마산YMCA 사무총장./박일호 기자

2002년 11월 경남대선유권자연대가 주최한 '2002 대선경남유권자위원회 활동 선포식'에서 그를 처음 만난 이후 14년 만에 첫 대면 인터뷰. 전기난로를 근무하는 책상에서 인터뷰하는 탁자로 옮기며 다가올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화제로 꺼냈다. 은퇴 후 총선에 출마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과 함께 인터뷰를 시작했다.

"마산에서 시민운동을 하며 제일 아쉬운 부분이 정치 분야죠. 우리 생활에 정치만큼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죠. 건강한 사회구조가 되려면 균형 잡힌 여야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저희 마산YMCA가 야당 같은 역할을 해왔죠. 특히 마산Y(YMCA)는 시민사회단체 중에서도 강성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요. 정부나 지자체 시책 중에 시민의 권익에 벗어난 일을 정치로 해결할 수 없다면 저희가 목소리를 내야죠. 이제는 재야시민운동단체로 자리매김해서 제가 마산YMCA에서 온 지 올해 2월로 딱 16년이지만 아직 한 번도 누구에게 그런 권유를 받아보지 못 한 것 보면 한눈팔지 않고 길을 걸어온 게 맞겠죠. 지역사회에서 정치운동도 중요하지만, 아직 시민운동분야에도 할 일이 많아서 출마는 못 합니다. 후후(웃음)."

기독학생운동에서 시민사회운동으로

차 사무총장은 1957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막내였던 그는 20살 때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청주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1976년 한국신학대학교(현 한신대학교)에 입학한 그를 반갑게 맞이해 준 것은 기독학생운동의 연합체인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소속 선배들이었다.

"저처럼 지방에서 공부하러 온 학생들은 학교 내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어요. 다니던 대학교 특성상 예배 시간이 많았는데 그때를 이용해서 학생운동을 했죠. 예배가 끝날 무렵 연단에 올라가 '유신반대 독재타도' 성명서를 발표하고 유인물을 뿌리는 것이 운동의 전부였죠. 당시에는 대학교 내에 경찰이 상주하고 있어서 예배실 현장에서 바로 끌려가는 선배들도 많았죠. 그때 만난 선배들이 인생의 나침반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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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윤재 마산YMCA 사무총장./박일호 기자

황주석(2007년 작고), 이창식 등 한국신학대학교 선배들은 청년 차윤재를 기독학생운동의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그는 선배들과 함께 문익환 목사가 번역한 성서를 읽으며 민주화를 위한 사회변혁운동에 참가했다.

"민청학련사건 이후 진보적인 기독학생운동이 근본적인 제약을 받으면서 선배들은 교회 청년회를 통해 사회운동을 전개했죠. 당시 선배들이 먼저 YMCA에 들어가서 청년운동을 이어갔습니다. YMCA는 국제적인 기구고 합법적인 단체이기 때문에 운동의 구심점으론 딱 맞았죠."

대학 졸업 후 강원도 춘천 2군단사령부에서 군 생활을 마친 그는 1983년 1월 1일 춘천YMCA에 첫 출근을 했다. 34년 YMCA 실무자 인생의 시작이었다.

"춘천과는 인연이 좀 있어요. 제가 군 복무하며 결혼을 했는데 아내의 고향도 춘천이었죠. 제대하고 집안 친척이 춘천YMCA에 아는 분이 계셔서 상근활동가로 일을 시작했죠. 몇 년 앞서 마산YMCA에서 일하고 있던 황주석 선배의 영향도 컸죠. YMCA에서 대학 시절 배운 학생운동 역량을 시민사회운동에 쏟기로 결심한 거죠. 그렇게 YMCA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듬해 1984년 그는 고향에 있는 청주YMCA로 자리를 옮긴다.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데는 조력자가 필요했고 이왕이면 나고 자란 곳에서 사회 변화의 물꼬를 트고 싶었기 때문이다.

"청주Y(YMCA)로 옮겨서 6년간 일을 했습니다. 당시 상근 실무자는 어린이, 청소년, 대학부, 사회교육, 시민중계실, 시민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맡은 멀티플레이어였어요. 청주YMCA 간사 시절 경험이 Y맨 인생의 바탕이 되었죠. 박정희 독재시대를 거쳐 전두환 군부시대를 마감하면서 제가 청주지역 시민운동의 1세대가 되었죠."

시민운동가에서 막노동 철근공으로

고향 청주의 성숙한 시민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가 펼치던 시민운동에 제동이 걸렸다. 1980년대 중반 그가 일했던 청주YMCA는 보수적인 단체였다. 이사진들은 청주YMCA 시민사업위원회에서 마련한 강연을 문제로 삼았다. 강연의 강사가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라는 이유였다.

"청주YMCA 간사를 맡으며 시민사업위원회 회원을 윤구병(변산교육공동체학교 대표) 교수, 유초하(전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등 진보적인 인사들로 조직했죠. 그런데 이사진들이 너무 세게 시민운동을 한다고 안티를 걸었죠. 결국 이사장이 백기완 선생님 초청 강연 건으로 저를 해직시켰어요. 그 후 나홀로 소송으로 승소해서 복직했지만 계속 근무하기가 그렇더라고요. 1989년 Y(청주YMCA)를 나와서 1990년 청주노동문제상담소를 개소했지요.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90년에 접어들면서 청주공단지역에도 노조 설립등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했죠. 노조에 필요한 교육과 상담에 운동의 포인트를 맞추었죠."

차윤재 사무총장의 시민운동 활동에는 3년의 공백이 있다. 그는 1996년 이혼을 하며 일체의 시민사회운동에서 손을 뗀다. 그는 자신에게 그런 일이 생길 줄 꿈에도 몰랐기에 충격은 컸다. 남 앞에 나서서 일한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스스로 대화하며 3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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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윤재 마산YMCA 사무총장./박일호 기자

"노동문제상담소도 접고 막노동을 했어요. 청주 근처 건설현장에서 철근을 날랐죠. 새벽에 모자를 눌러 쓰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면 또다시 새벽이었죠. 몸은 피곤하고 힘에 겨워도 이상하게 힘이 났어요.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의 가치, 나에 대한 반성. 암튼 그때 홀로 지내며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죠. 평생 일하며 그때가 제일 수입이 많았던 시기인 것 같습니다. 세상 이치가 단순해요. 나 자신을 내려놓아야 더 큰 세상이 보이는 격이죠."

1년여의 철근공 생활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깨우친 후 그가 찾은 곳은 경남 거창이었다. 대학 기독학생운동 동료가 거창에서 장애인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두말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1년의 세월을 보내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방법과 그 의미를 배웠다. 그리고 1999년 차 사무총장은 서울에서 장애우의 발이 되어주는 휠체어이동봉사대에서 사무국을 운영하며 1년의 시간을 보냈다. 2000년 그는 인생의 조력자 황주석 선배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윤재야, YMCA 일을 다시 시작해보지 않을래. 마산YMCA에서 사무총장을 구하고 있다. 그 일에 네가 딱 맞다고 생각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

마산, 생애 최고의 만남 그 후 16년

그는 경남 마산에 지인 결혼식 참석차 딱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00년 2월 두 번째 방문한 마산역 광장에서 앞으로 함께 일하는 이들과 다투거나 화내지 않고 일하겠노라 다짐을 하며 마산YMCA로 향했다.

"마산은 저에게 신천지였죠. 청주노동문제상담소 문을 닫고 3년 동안 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또 기다림 속에 다시 시민사회운동을 펼칠 수 있는 마산YMCA를 만난 것은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느낌이었죠. 그래서 다시 일을 시작하며 이 일이 끝날 때까지 2000년 마산역 광장에서 다짐한 약속을 늘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행복하고 건강한 조직만이 바른 사회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마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죠."

경남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시민운동단체 마산YMCA의 실무자가 된 그는 지역 의제 설정에서부터 시민 교육, 소비자 운동까지 시민사회단체 주류의 역할을 꾸준히 제시하며 단체를 이끌었다. 2001년 마산야구장 옆 현재 위치에 준공한 새로운 회관도 그에겐 잊지 못 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는 지역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경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창원물생명시민연대 공동대표', '경남지방분권협의회 간사', 모두 차윤재 사무총장 명함과 함께 쓰는 직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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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윤재 마산YMCA 사무총장./박일호 기자

"마산YMCA가 지역사회 특정 사안에 대해 한목소리로 연대하는 것은 다른 지역 YMCA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케이스입니다. 진보와 보수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연대의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제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70년 전통의 역사와 1800여 명 회원들의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에서 나오는 것이죠. 아기스포츠단 어린이 회원부터 시민중계실에 노인 회원까지 다양한 구성원의 힘이 마산YMCA의 원동력이죠. 또한 하나되는 팀워크를 겸비한 실무자들과 그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마산YMCA 이사님들이 계시기에 가능한 일이죠."

그는 마산YMCA에서 최장기 사무총장을 역임할 수 있었던 공을 이사진과 회원 그리고 실무자들에게 돌렸다. 그는 올해 3월에 16년간 수행한 사무총장직을 내려놓고 평회원으로 돌아간다. 차 사무총장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후배가 있어 마음 편하다고 했다. 그리고 마산YMCA에서 16년간 일한 보람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음식점에서 혼자 밥을 먹는데 누군가 고생하신다며 백반 값을 내주고 가시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또 길거리에서 만난 누군가는 자신의 하소연과 민원을 허물없이 이야기합니다. 16년 전 생면부지의 마산에 와서 이웃도 얻고, 친구도 얻고, 누군가가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죠. 이런 소소한 행복들이 있으니 성공한 삶 아닐까요?"

마산YMCA 평회원으로 인생 3막을 준비하다

마산YMCA는 그에게 제2의 인생을 선물했다. 그도 마산YMCA에서 사무총장을 맡으며 보낸 지난 16년을 생애 최고의 나날이라고 했다. 그리고 차 사무총장은 인생 3막을 위해 마산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충북 청주에서 혼자 와서 처음 생활한 곳이 마산 양덕초등학교 옆 동네인데, 딱 한 번 바로 옆으로 옮기고 16년째 그 동네에서 살고 있죠. 이젠 대략 양덕동 토박이가 되어가죠.(웃음)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데 마산을 떠날 수가 없죠. 다시 3막 인생을 이곳에서 완성해야죠. 마산YMCA에서 함께 한 회원 중에 시니어 그룹들이 있어요. 저도 은퇴하지만 그분들도 하나둘씩 현직에서 물러나는데 그냥 놀 수만 있습니까? 같이 모여서 뭐라도 하나 남기면서 보내야죠."

차 사무총장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체계적으로 지역사회 문제에 심층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꿈꾸고 있다. 사회적 이슈에서 멀어진 지역 문제들도 다시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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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윤재 마산YMCA 사무총장./박일호 기자

"은퇴 후에 남아도는 것은 시간이겠지만 제가 푹 놀고 쉬는 스타일이 못 돼서 곧 일거리를 준비할 거예요. 현업에서는 당면 현안 때문에 늘 바빴지요. 기자회견하고 나면 또 성명서 발표하고, 연대하고, 긴 호흡으로 지역사회 문제를 제대로 연구할 시간이 많이 부족했지만 이제는 그런 일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박 기자님 쪽 업무로 예를 들자면 스트레이트 기사가 아닌 탐사보도 기사나 기획취재 기사를 쓰는 거죠. 요즘은 빅데이터 시대라고 하잖아요. 1983년 시작해서 그동안 제가 YMCA 밥을 꽤 먹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받은 과분한 사랑을 돌려드려야죠."

마지막으로 차윤재 사무총장에게 언제까지 YMCA 관련 일을 할 거냐고 물었다.

"YMCA에서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합니다. YM은 영맨즈(Young Men's)잖아요. 한번 YMCA맨은 영원히 젊은 오빠로 남는 이유가 바로 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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