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대가 마음껏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아너소사이아티(Honor Society)는 나눔문화를 실천하려는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입니다.

소년은 오늘도 발동기 앞에 앉았다. 논에 일하러 나가신 아버지가 점심 드시러 오시기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30분가량. 그 안에 발동기를 해체해서 원래대로 조립해 놓아야 한다. 며칠 전에 2시간 30분 만에 성공했으니 오늘은 잘하면 2시간 만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소년이 발동기를 해체하려는 것은 고장이 난 부분을 수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딱히 이유를 찾는다면 그냥 기계를 만지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분해·조립 시간을 단축해 나가는 것이 올림픽에서 기록을 세우는 것처럼 소년에게는 벅찬 기쁨을 주는 일이다.

㈜창일기계 황정규 대표 어린 시절의 한 조각이다. 그 소년은 이제 자동차 부품업계 숨은 강자로 꼽히는 기업체 대표가 됐고,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지난 1월 13일 경남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가 꿈을 위해 걸어온 인생을 들여다보고 경남사회복지모금회에 1억 원을 기부 약정한 속내를 들어본다.

마냥 기계가 좋았던 소년

황정규(67) 대표는 1949년 함안군 군북면 모로리에서 2남 6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비교적 농사를 많이 지으신 덕에 황 대표는 어려움 없이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시골에서는 그나마 여유가 있는 집이었어요. 그래서 형제·자매들도 그럭저럭 다 공부를 했고요. 딱히 어려움 없이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것 같습니다. 좋은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다만 힘든 점이 있었다면 부모님이 원하는 것처럼 시원하게 공부를 하지 못해 수시로 꾸중을 듣는 일이었다.

"다른 집은 그 당시 어려워서 제대로 공부를 못 시켜 주는 시기였죠. 공부를 잘하고 또 하고 싶어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기였죠. 그런데 저는 집에서 공부시켜준다고 하라고 해도 별 취미가 없었어요. 안홍준 의원이 같은 마을 친구입니다. 안 의원은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듣는 모범생이고 수재였죠. 그래서 비교 많이 당했습니다. 허허."

대신 그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려서부터 남달리 기계에 관심이 많았고 기계 다루는 소질이 있었다.

01.jpg
▲ 황정규 창일기계 대표이사./박일호 기자

"작게는 자전거부터 크게는 발동기까지 뜯어서 고치고, 주변에 보이는 기계 분해해서 구조를 파악하고 그런 것이 취미였어요. 그때는 기계만 보이면 저게 어떤 원리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었어요. 꼭 그 해답을 알아야 했어요. 허허. 그러니 고장도 많이 내봤고, 혼이 나기도 했죠. 반대로 고장난 기계도 많이 고쳐서 아버지나 동네 어른들이 대견해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그런 제가 좀 못마땅했을 거예요. 그 당시만 해도 기계 잘 만져봐야 기름밥 먹는 시기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해서 화이트칼라가 되기를 원하셨어요. 허허."

결국 그는 군북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오고서 마산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뭐 기계가 좋아서 마산공고를 선택한 것도 있지만,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한 이유도 조금 있습니다. 허허. 아무튼 기계과에 가서 공부를 하니 적성은 맞았죠. 행복한 시기였죠. 그러다 기계를 더 많이 더 깊이 배우기 위해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실습 나가서 취업하는 게 꿈이었지만 저는 처음부터 대학 진학을 목표로 했습니다. 열심히 놀다 그나마 늦었지만 3학년 때 정신을 차렸죠. 그해에는 떨어지고 재수해서 다음 해에 동아대 기계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꿈을 찾아 한발 한발 전진

어린 시절 성적은 그의 콤플렉스였다. 하지만 대학 입학 이후 전세가 완전히 역전됐다.

"적성에 맞는 공부를 하니 신이 났죠. 다른 친구들은 인문계를 졸업하고 왔으니 기계에 대해서는 초짜였죠. 그런데 저는 공고 출신인데다 어려서부터 기계에 취미가 있었으니 그들과는 출발선이 달랐죠. 게다가 저는 수학을 참 잘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수학 때문이었죠. 수학은 한 번만 듣고 풀어보면 다 풀리더라고요. 대학 4년 내내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삶에 자신감을 찾았죠."

그는 우수한 성적 덕에 대학 졸업 전에 조병창에 들어가게 된다. 조병창은 무기, 탄약을 제조 수선하며 저장, 보급하는 곳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정책에 따라 만들어졌다. 황 대표는 군대 입대하는 대신 이곳에서 병역특례로 5년간 근무하게 된다.

"조병창이 우리가 졸업할 시기에 부산에 딱 생겼어요. 그런데 그게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까지 기계를 만지고 회사를 운영할 기틀이 될 기술을 여기서 배웠다고 해도 될 겁니다. 조병창이 M16 소총을 생산하는 곳과 탄환을 만드는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저는 탄환을 만드는 곳에서 일했습니다. M16 소총은 콜트사에서 그대로 라인을 가져와서 생산을 했는데 탄환은 M1, 카빈총 만드는 기계를 개조해서 사용했습니다. 그 기계를 개조하는 일을 했습니다. 탄환이 정밀해야 하기에 어렵게 수정해 가면서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죠. 그리고 이곳에 다니면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집사람을 중매로 만나서 29살에 결혼도 했습니다. 아무튼 조병창에 있으면서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 많이 생겼어요. 허허."

복무 기간 5년을 마친 그는 곧장 창원에 있던 현대양행에 취직하게 된다.

"조병창에 있는 동안에 창원공단이 막 들어섰습니다. 조병창 나와서는 현대양행에 입사를 했어요. 지금은 두산중공업과 볼보로 나누어졌는데 현대양행은 창원공단의 대표적인 대기업이었죠. 이곳에서 중장비 분야에서 근무하다 동양기계라는 회사로 이직을 했습니다. 통일중공업을 거쳐 지금 S&T중공업 모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여기서 트랜스미션을 생산하는 일을 했습니다."

02.jpg
▲ 황정규 창일기계 대표이사./박일호 기자

기술과 신뢰로 난관을 넘고

대기업에 입사해 일했지만 그의 적성과는 맞지 않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해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1982년 나이 34살 때 일이다.

"대기업을 옮겨 다녔지만 조병창에 다닐 때와 달리 제가 주체라는 생각이 별로 안 들었어요. 오히려 부품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니 보람도 별로 못 느꼈죠. 그러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생각에…. 딱히 큰 욕심은 없었고요. 집사람이 교편을 잡고 있어서 뭐 밥은 굶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일을 저질렀죠. 허허. 회사라고 하지만 사실 가내수공업이라고 보면 됩니다. 처음에는 양덕동 고속버스터미널 뒤편 제지공장 자리에 있던 창고에서 직원 두 명과 시작을 했습니다."

당시 이 회사에서 생산한 것은 트랜스미션 톱니바퀴 가공 전 단계의 부품이었다.

"처음에는 범용 기계인 밀링, 선반 등을 외상으로 들여놓고 부품을 깎아서 동양기계에 납품했습니다. 조금씩 업그레이드 해나갔죠. 본격적으로 사업이 성장한 것은 조병창에서 배운 기술과 노하우를 자동차 부품 생산방법에 접목하면서부터입니다. 그 당시 다른 업체들은 완전 수공으로 깎아서 부품을 만드는 수준이었죠. 우리는 조병창에서 총알 만들던 방식으로 도입해 반자동화하면서 경쟁력을 갖췄죠. 기존 업체가 한 개 만들 때 우리는 두 개 만드니까 그게 경쟁력이죠. 기아자동차와 거래하면서 생산 납품량이 대폭 늘었어요."

이후 사업은 순풍을 만난 듯 성장해 나갔다. 1985년 공장을 봉암공단으로 확장 이전했다가 1988년에는 현재의 공장이 있는 팔용동 차룡단지에 1·2공장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03.jpg
▲ 황정규 창일기계 대표이사./박일호 기자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창일기계 또한 IMF 외환위기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

"저희 주거래업체가 기아자동차였습니다. IMF 외환위기 직전에 부도가 나죠. 기아차와 거래하던 많은 기업이 연쇄부도를 맞았습니다. 그때는 거의 어음으로 거래했죠. 대부분 3개월짜리, 6개월짜리 어음이 통용됐고, 심한 경우에는 날짜 없는 어음이 거래됐습니다. 보통 기업이 거의 1년씩 어음이나 외상으로 미뤄가면서 거래를 했는데 IMF 외환위기 때 그런 기업들은 받을 돈을 못 받는 상황에서 돌아온 어음을 못 막아 부도나고 빚잔치했죠. 기아차가 부도나면서 저희도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습니다. 물량이 끊기니 부도는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참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고, 긴 터널을 지났는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그나마 저희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신용 덕분입니다. 저는 애초부터 어음을 발행하지 않았어요. 협력사에 물건을 납품하고 어음을 받아도 저희가 줘야 할 돈은 항상 미루지 않고 현금으로 지급했지요. 기아차에서 받을 돈은 못 받았지만 줘야 할 돈은 현금으로 다 줬으니 돌아올 어음이 없었죠. 그리고 우리가 힘드니까 오히려 거래하던 업체들이 외상으로도 주더라고요. 근근이 생명을 연장해 나갔고 결국 기아차를 현대가 인수하면서 저희도 회생하게 됐습니다."

창일기계의 주력 생산품은 엔진 동력을 바퀴에 전달하는 등속조인트 어셈블리 구성품인 이너 레이스와 스파이더다. 등속조인트는 엔진 동력을 굴절시켜 바퀴에 전달하는 부품이며 스파이더와 이너 레이스는 운행 노면이 불규칙하더라도 좌우 차축의 등속운동을 원활히 돕도록 등속조인트에 들어가는 제품이다. 정밀도와 내구성이 가장 중요한 부품이다. 창일기계는 이 부품을 생산하는 '스파이더 연삭용 주축센터'와 '스파이더 트리니언 타원 연삭기'를 직접 개발해 특허를 획득했다. 뛰어난 기술력 덕에 창일기계가 생산하는 제품은 ㈜위아에 납품되며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에 공급될 뿐 아니라 외국 자동차 회사에도 수출되고 있다.

창일기계는 팔용동 1·2공장에 직원 60여 명이 근무하며 기술과 신뢰를 바탕으로 지난해 매출액 180억 원이 이르는 알짜기업으로 성장했다.

즐기는 삶, 인생은 아름답다

그는 일흔 나이를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특히 이색적이고 다양한 취미는 듣는 이를 놀라게 한다.

"나도 잘 몰랐는데 해왔던 취미들을 뒤돌아 보면 제가 별난 데가 있는 모양이에요. 대학 들어가자마자 69년에 자동차 운전면허를 땄어요. 그때는 정말 희귀한 자격증이었죠. 마이카 시대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때인데. 뭐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위해 딴 것이 아니라 차를 몰고 싶은 마음에 일단 땄어요. 허허."

그가 하는 취미활동은 골프, 승마, 스키, 보드, 수상스키, 웨이크보드, 윈드서핑, 경비행기 조종, 클레이 사격, 사냥 등이다.

"조병창 다닐 때 실탄 테스트를 하면서 총을 수없이 쏴봤습니다. 그게 계기가 되어서 지금도 클레이 사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수상스키, 웨이크 보드 뭐 이런 것들은 최근에 잘 안 합니다. 취미란 게 사실 많은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힘도 부치지만 장비를 챙기는 것들이 굉장히 귀찮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지금은 그런 부담이 적은 취미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황 대표의 최근 주력 취미는 클레이 사격과 경비행기 조종, 윈드서핑이다.

04.jpg
▲ 황정규 창일기계 대표이사./박일호 기자

"윈드서핑은 진해루에 가면 장비를 다 빌려 줍니다. 그러니 수건만 들고 가면 됩니다. 자주 가서 이용합니다. 클레이 사격은 가까운 창원사격장이 잘 돼 있어 그곳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경비행기는 함안 법수 악양 강둑에 있는 활주로를 이용합니다. 앞 주에도 다녀왔습니다. 지금까지 혼자 100시간 이상을 탔어요. 비행기 타고 하늘로 올라가면 경치도 좋고 가슴이 확 뚫리죠. 다 다르지만 저마다 매력이 있어 그 매력을 즐기는 겁니다."

그는 다양한 취미를 접한 이유에 대해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역설적인 답을 내놓았다.

"저는 좀 별난 데가 있다고 했죠. 뭐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랄까 이런 데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취미들을 접한 게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면서거든요. 예를 들어 경비행기 조종은 다린의 김정수 회장과 친해지면서 배웠습니다. 그렇게 같은 취미를 공유하면서 소통하고 그 사람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죠. 뭐 의도한 것은 아니고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많은 취미를 접하게 됐고, 또 그게 인생의 활력이자 윤활유가 됐다는 생각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취미생활은 계속해야죠. 나이 들면 마누라밖에 없다는데 대신 아내와 함께할 수 있는 취미를 많이 해야죠. 허허."

미래세대가 행복한 세상을 위해

황 대표는 출신학교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지급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남몰래 어려운 이웃을 도와왔다. 그는 자신의 선행을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생각이 바뀌었다.

이에 황 대표는 지난 1월 13일 새해 경남 첫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자 67번째 회원으로 가입했다.

"현대정밀 사장 오춘길 선배와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한철수 회장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입니다. 2011년 오 선배가 가입하는 것을 보고 아너소사이어티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아너소사이어티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주변에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한 사람이 3∼4명 됩니다. 결과적으로 서로 좋은 영향을 줘서 동참하게 된 것이라 생각이 들어요. 한철수 회장도 나눔문화 확산을 위해 실명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를 많이 했고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을 익명이 아니라 실명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데까지는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나이가 들면 복지시설을 설립해서 운영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조금 알아봤더니 그게 쉽지 않은 일이더라고요. 그러면서 기부와 나눔에 대해 생각도 했죠. 그런데 그게 적절한 곳에 제대로 전달돼 실질적인 도움이 돼야 하는데 혼자 하려니 여러 가지로 힘이 들고…. 그러던 중에 아너소사이어티를 알았죠. 그 분야 전문기관이니까 알아서 잘하겠죠. 허허. 그래도 마음먹고 실행하기까지 한 4∼5년 걸린 것 같습니다. 최종 가입 결정을 앞두고도 내가 살아온 삶을 쭉 되돌아봤습니다. 주변에 직원들, 친지들 그분들에게 잘하지도 못하면서 엉뚱한 곳부터 신경 쓴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잘못한 것에 대해 반성도 하고 더 잘해야겠다는 의무감도 생겼습니다. 이것도 부수적인 효과라면 효과죠. 허허."

그는 나눔을 실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자신이 꿈을 이룬 것에 대한 보답 차원과 후손들이 행복한 나라가 되길 바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저는 많은 도움을 받아 제 꿈을 이루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참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때는 산업화 과정에서 물론 힘들었지만 최소한 꿈을 꾸고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지금 세상은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을 못 줍니다. 일자리도 없고 세상은 더 양극화돼 가고, 나라는 경쟁력을 잃어가고…. 그런데 사회복지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를 정부가 다 부담하는 것은 우리 미래 세대에게 그 짐을 떠안기는 것과 같죠. 그런 부담을 줄이려면 민간이 나서서 해야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에 환원하고 나누고 돈이 적은 사람은 재능을 나누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방법.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그런 것들이 문화로 정착되면 더 좋은 세상이 더 빨리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동참을 하고 나니 마음도 뿌듯하고 편해지고 더 행복해지더라고요. 정말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동참을 권유합니다. 저도 또 계기가 된다면 더 나눌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