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만나게 되는 반가운 사람들, 지친 몸과 마음 위로하네

6월 23일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23㎞

새벽 5시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 보니 안개가 가득 끼었네요. '날씨가 흐린 걸까?' 하고 걱정도 되었어요. 거기다 날씨도 무척 춥네요. 어쩐지 엊저녁 침낭이 전혀 덥게 느껴지지 않더니. 침낭을 개고 발에 바셀린을 바르고 준비를 시작했어요. 몇몇은 이미 출발하고 있었더라고요. 언니는 피곤한지 이렇게 부스럭거려도 일어나지 않네요. 그도 그럴 것이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어제 19㎞를 10㎏ 가까이 되는 배낭을 지고 걸었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조금 기다리니 언니가 일어나서 같이 준비를 했고 추위에 대비해 얇은 오리털 점퍼까지 입고 6시 20분쯤 출발을 하였어요. 이곳은 원래 안개가 많은 곳인지 순례기를 보면 안개 낀 장면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오늘도 안개가 자욱합니다. 그래도 안개 때문에 몽환적인 분위기의 숲길이 아주 멋졌답니다. 이런 걸 한 편의 수묵화라 하는 거겠죠? 처음엔 추웠는데 조금 걷고 나니 날도 밝아지고 추위도 괜찮아지기 시작했어요.

첫 마을 부르케테(Burguete)에 도착해서 처음 나온 바에 들러 크로와상과 커피로 식사를 하는데 걸으면서 자주 마주쳤던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올라~!! 그리고 이 예쁜 마을이 헤밍웨이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한 곳이라고 해서 그 흔적을 찾아봤으나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작은 냇물을 건너며 '여기서 헤밍웨이가 송어를 잡았나?'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작은 내여서 언니랑 둘이 웃고 말았어요.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꼬마가 아빠랑 걷는 모습이 아주 예뻐 '최고!'라고 손짓해 주니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이곳에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도 종종 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가족같이 보이는 스페인인 세 명도 알게 되었어요. 앞으로 이 사람들과의 인연을 기대해 주세요.

그리고 정보에 의하면 중간에 바가 여러 개 있다고 들었는데 아까 거기서 아침을 안 먹었더라면 큰일 날 뻔~!! 에스삐날(Espinal)이란 아주 예쁜 마을 등, 마을을 몇 개 지나긴 했는데 바는 보이지 않았어요. 아니면 못 찾은 걸까요? 메스키리츠 고개(Alto de Mezquiriz·930m)를 지날 때는 순례자들에게 안녕을 빌어 준다는 성모상이 있어 우리도 잠깐 서서 순례자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답니다. 이 길은 사유지도 지나게 되어서 나무문을 열고 가야 하는 곳이 많은데 목장의 동물을 위해 여기선 다시 문을 닫아주는 센스가 필요하죠. 3시간 정도 걸어가니 작은 바가 있어요. 반가움에 들어가 화장실도 가고 간식을 먹고 있는데 한국 가족팀이 지쳐서 들어오는 거예요. 그들은 첫 번째 바에서 아침을 안 먹고 다음 바를 찾았는데 아직 바를 못 찾아 이곳까지 굶고 왔다며 그제야 허겁지겁 아침 식사를 하네요. 밥도 못먹고 여태 왔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부엌을 못 쓰는 숙소에 실망, 하지만 반가운 친구가…

다시 출발해서 산길을 오르는데 날이 점점 더워지니 또 지치기 시작했어요. 트럭 간이 바가 있는 에로 고개를 지나니 돌도 많은 막바지 내리막! 여긴 너무 가팔라서 발이 너무 아팠어요. 2시가 되어서야 겨우 수비리(다리의 마을이란 뜻)에 도착했죠. 8시간 가까이 걸었네요. 휴~ 수비리의 '뿌엔떼 데 라비아 다리(광견병의 다리란 뜻)'까지 오니 어떤 소녀가 오렌지 주스를 탁자에 내놓은 거예요. 얼마인지 물어보니 기부제라는군요. 순진한 모습이 너무 예뻐서 한 잔 마시고 1유로를 주고는 라비아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밑의 물이 너무 깨끗하고 시원해 보여 발을 담그고 싶어졌답니다.

다리 주변이 마을 입구였고 알베르게도 많았는데 여긴가? 저긴가? 하며 우리 딸이 추천해준 사립 알베르게를 찾아가는데 자꾸자꾸 가야 하는 거예요.

물가는 멀어지고, 땡볕은 내리쬐고, 드디어 찾아갔는데 급실망, 깨끗하긴 한데 부엌을 쓸 수 없었어요. ㅜㅜ 울 딸은 3월에 걸었기 때문에 부엌도 쓸 수 있었고 걷는 사람이 많지 않아 오붓하게 보낼 수 있어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는데 지금은 성수기라서 부엌 오픈을 안 한다는 거예요. 한국 가족팀한테 모처럼 저녁엔 한국 요리 해먹자고 했는데 부엌을 쓸 수 없으니 얼마나 실망을 했겠어요. 하지만 오는 길이 너무 힘이 들었고 또 땡볕을 뚫고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주저앉았습니다. 그나마 서비스로 주는 맥주를 마시며 마음을 달래야 했지요.

그런데 저기 시몬(첫날 만난 캐나다인 아줌마)도 여기로 들어오고 있네요. 거기다가 우리랑 같은 방이에요. 우리는 반가움에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우리보다 먼저 짐을 푼 독일 할아버지 두 명이 어디 갔다 들어오더니 우리보고 시끄럽다고 눈치를 주네요. ㅜㅜ 대낮인데 낮잠 잔다고요.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눈만 찡긋거리며 입 다물고 조용조용 움직였지요.

씻고 나서 한국 가족팀과 시몬, 언니와 나 여섯이서 순례자 메뉴를 먹으러 갔습니다. 까미노에서는 가는 곳마다 순례자 메뉴가 있어서 크레덴시알(순례자용 여권)을 보여주면 싼 가격에 식사를 할 수가 있거든요. 식사하러 가는데 바람이 불고 어찌나 춥던지요. 낮에는 아주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더니 지금은 또 카디건을 입어도 춥네요. 스페인에 오기 전에 이곳의 더위가 엄청나게 심하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스페인은 습도가 낮아서인지 바람만 살짝 불어도 시원하고,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하고, 또 밤에도 온도가 뚝 떨어져 견디기가 수월했답니다. 그런데 오늘은 춥기까지 하군요.

한국 가족팀의 딸은 많이 유약해 보이더니 생각보다 제법 잘 걷고 있었어요. 칭찬을 해주었죠. 엄마도 이 길이 매력이 있다고 이번엔 가족과 로그로뇨까지 걷지만 다음에 꼭 다시 와서 완주하고 싶다더군요. 즐겁게 밥을 먹고 사진도 찍으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숙소에 들어오니 독일 할아버지 두 명은 또 나가고 없더라고요. 뭐지? 시몬은 우리보다 더 나이가 많아서인지 다리와 어깨가 아프다고 하며 고통을 호소했어요. 그래서 '다리 마사지 해줄까?' 물어보니 단번에 '오케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서툰 솜씨지만 정성껏 마사지를 해주고 가지고 갔던 파스를 붙여주었더니 아주 고마워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는 마사지 자격증도 있으니 내 발도 마사지해 준다고 내놓으라는군요. 헉~! 이런, 도사 앞에서 요령을ㅎㅎ 하지만 제 마음은 알았겠죠?

그런데 거짓말을 했어요. 간지럼을 타서 안 된다고요. 지금 자기도 엄청나게 피곤할 텐데 싶더라고요. 시몬도 눈치를 챘는지 웃으면서 내일 만나면 꼭 해주겠다며 약속했어요.

일찍 잠자리에 들었건만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ㅜㅜ 일부러 낮잠도 안 잤는데 4일째 이러네요. 카톡질하다, 밴드질하다 겨우겨우 조금 잠이 들었습니다.

6월24일 수리비에서 빰쁠로나까지 21㎞

엊저녁 늦게 겨우 잠이 들었는데 새벽부터 또 눈이 뜨이네요. 침대에서 일어나려니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시몬과 바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는데 알베르게에 아침이 차려져 있었어요. 약속을 했기 때문에 대강 쌀 수 있는 것은 싸서 숙소를 나섰죠. 오늘은 한국 가족팀도 일찍 서두르네요. 이제 좀 익숙해지나 봐요. 어제는 우리가 출발할 때까지 일어나지도 못했었거든요. 시몬과 어제 가기로 했던 바에 들러 커피와 크로와상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출발~!!

늘 하루를 여는 새벽길은 상쾌합니다. 그런데 이곳 주변 환경이 너무 안 좋은 거예요. 이때까지 지나온 길 중 최악이었죠. 공장지대를 지나야 해서인지 주변 환경이 안 좋아서인지 몸은 천근만근~!!! 아마 그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무거운 배낭을 지고 며칠을 걸었더니 피로가 누적되었나 봅니다.

그래도 공장지대를 벗어나니 다시 예쁜 길이 나왔습니다. 어제 프랑스인 장이 묵는다던 라라소아냐(Larrasoana)를 지나가니 큰 개울을 따라 걷는 길이 길게 이어졌어요. 시원해서인지 조금 몸이 풀리는 듯했는데 다시 그늘도 없는 길을 가게 되니 자꾸만 쉴 곳만 찾아지더라고요. 같이 가는 언니도 많이 힘든 모양이에요. 뒤따라오던 시몬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네요.

겨우 그늘을 찾아 쉬는데 많은 사람이 우리를 지나갑니다. 모두 '올라!' 하며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올라(Hola)'는 스페인에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인 것 같아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예요. '부엔 까미노(Buen camino)'라는 말도 참 많이 했지요. 원래 좋은 길이란 뜻이지만 순례자들에게 행운과 축복을 빌어 주는 말이에요. 서로서로 축복을 빌어 주는 거죠. 어제 만났던 아빠랑 걷던 스페인 꼬마도 한 아줌마와 친구 두 명을 더 데리고 우리를 지나갔어요. 어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가르쳐 주었었는데 우리를 보고 서툰 발음으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합니다. 어찌나 귀여운지요. 언니가 호루라기를 선물로 주니 매우 좋아하더라고요. 그 후로도 몇 번을 서로 지나며 인사를 나누었고 알고 보니 서로 사촌 간이며 아줌마는 이모라고 하더군요. 이름을 몇 번이나 물어보고 알려줬는데, 아이고, 생각이 안 나네요. 이름이 너무 어려웠거든요^^!

몸이 조금 풀리는 듯했는데 조금 쉬며 점심을 먹고 다시 시작하려니 정말 못 걷겠는 거예요. 무거운 발을 옮기려니 경치도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아니 까미노를 걷고 온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 길을 다시 걷고 싶다고 하는 거지? 한번이면 족하겠구먼.' 다음에는 다른 곳에 가지 여기를 두 번이나 걷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주변은 온통 밀밭, 가도 가도 마치 제자리인 듯했어요.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나 우리는 여기가 빰쁠로나(Pamplona)인가보다 하며 내심 좋아하며 시내에 들어가 물어보니 아직도 5㎞나 더 가야 한다는 겁니다. 완전 좌절!! 정말 차를 타고 가고 싶은 유혹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절대 안 될 일~!! '힘들면 배낭은 부칠 수 있어도 차 타는 것은 절대 안 한다'고 나와 약속했었거든요~! 하는 수 없이 길가 벤치에서 양말 다 벗고 배낭에 발을 올리고 누웠습니다. 쉬면서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가로수가 참 특이하게 잘려 있더군요. 그 나무 위로 보이는 하늘도 좋았고 스페인의 이름 모를 소도시에 누워 있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어요. 다시 심기일전해서 걷기 시작했죠.

아이고 어깨야 다리야…, 오랜만에 맛본 밥!

친절한 스페인친구 호세와 나란히 걷다 보니 어느새 빰쁠로나 입구 막달레나 다리가 보입니다. 야호~! 그런데 기쁨도 잠시. 우리가 가려는 알베르게를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20~30분을 헤매다 겨우 알베르게를 찾아갔는데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요? 여긴 세탁도 공짜! 거기다 부엌이! 와~! 밥도 해먹을 수 있고 시설도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었어요. 한국 가족팀과는 오늘 계속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는데 이젠 탄력이 붙었는지 우리보다 먼저 와서 있네요. 우리도 씻고 세탁하고 나니 시몬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 오다가 넘어졌다며 무릎에는 피가 흐르고 손가락 두 개는 삐었는지 심하게 퉁퉁 부어있는 거예요. 얼굴도 너무 피곤해 보이고요.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가더라고요. 얼른 내가 가져간 타박상 연고를 발라주고 또 소독을 해주었어요. 이런 와중에도 나에게 '마사지 해주기로 했는데' 하며 미안해하는 거예요. 그런 걱정하지 말고 치료 잘하라고 하며 앞으로 계속 걸을 수 있겠는지 물어보니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도 느낀 거지만 발톱이 빠지고 물집이 심하게 생겨도 대부분 사람은 포기하지 않아요. 그들의 의지력에 자주 감탄을 하였답니다.

어느 알베르게로 간다고 약속도 안 했는데 또 같은 알베르게에 든 게 인연인가 싶기도 하더군요. 일단 시몬은 병원에 가기로 했다고 해서 우리는 장을 보러 나갔어요. 한국 가족팀도 초대해서 같이 먹기로 했죠. 모처럼 한국 음식을 먹는다는 기분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쌀도 사고 감자도 사고 달걀도 사고 샐러드용 채소도 샀어요. 그런데 주방이 3층에 있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완전 고역이었어요. 그동안 다리가 너무 지쳤기 때문이죠. 절뚝거리며 다니다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서로 웃어요.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다들 다리와 발, 어깨가 아프니 말은 안 해도 서로 입장을 다 안다는 뜻이죠.

아픔을 무릅쓰고 언니랑 즐겁게 밥을 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가져간 라면 수프에 가져간 마른 멸치 몇 개 넣어 감자 듬뿍 넣어 국 끓이고 계란말이하고 가져간 참기름과 간장으로 샐러드도 만들고 나니 멋지게 한 상이 차려졌어요. (이때부터 몇 번 밥을 해먹을 때마다 메뉴가 똑같았다는ㅎㅎ) 거기다 밥도 아주 잘 된 거 있죠. 그런데 밥을 너무 많이 해서 시일~컷 먹고도 다음날 주먹밥까지 싸갔다니까요. 한국 가족팀은 샐러드에 넣을 연어 훈제와 과일을 사왔는데 밥상이 그득한 게 완전히 좋았어요.

오랜만에 먹는 밥은 정말 꿀맛이었죠. 유럽 여행 중에도 별로 한식을 먹지 못했었고 까미노에 와서 처음 먹는 밥이니 오죽했겠어요. 주방에서 같이 식사 준비하던, 한국에도 와봤다는 체코 부부와 스페인 삼인방에게도 나눠주니 아주 맛있게 잘 먹는 거예요. 그리고 스페인 삼인방은 가족이 아니고 까미노에 와서 만난 관계라는 걸 알게 되었죠. 시몬이 맘에 걸렸지만 병원에 갔다 오면서 순례자 메뉴를 먹고 온다고 하더라고요.

정리하고 나서 지갑을 보니 돈이 다 떨어져 가네요. 그래서 ATM기에 가서 돈을 찾는데 정말 헷갈렸어요. 스페인에 오기 전에 남편과 많이 실습을 하고 왔는데도 ATM기마다 다 다르니 달달 떨리며 당황이 되더라고요.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현금을 찾았어요. (남편은 집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걸 문자로 보고 '돈을 찾을 줄 아는구나' 싶어 내심 안심을 했다고 하네요. 하하) 시내 구경을 좀 하다가 들어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소몰이 축제인 산 페르민(San Fermin) 축제로 유명한 곳인데 밥해 먹느라고 시간이 오래 걸려 시내 구경을 대강 한 게 참 아쉽네요. 아직 다행히 물집은 안 생겼지만 발도 너무 아프고 짐에 짓눌린 어깨도 아프고, 특히 다리 전체가 아파서 쉽게 잠이 들지 않았어요.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