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휘균 박사 연구 논문 발표 18∼19세기 효자청원서 분석, 100년 만에 효행 인정받기도

조선시대 진주에 살던 하진태는 효행이 처음 보고된 1791년 이후 100년이 흐른 1891년에 비로소 '정려(효자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 결정이 났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효자 인정을 받는 데 무려 100년이 걸린 셈이다.

영남대학교 채휘균 박사는 최근 한국국학진흥원이 발행하는 학술지 <국학연구> 28호에 실린 논문 <조선시대 효자 열망에 내재된 욕구 분석>에서 이같이 밝혔다. 채 박사가 연구에 사용한 사료는 18~19세기 경남지역 효자청원문서다.

연구 결과를 보면, 일반적인 효자와 공식적 효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효자는 개인 효행에 덧붙여 보고·청원·지역 여론 형성·제도적 공인이 필요했다. 공식적 효자가 되려면 효행 사실을 조사하고 상급기관에 추천·보고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행정기관 보고만으로 효행 사실 인증이 어렵다면 개인 또는 가문이 나서 효행 사실을 문서화해 포상을 청원하거나, 지역주민 이름으로 포상을 요구했다고 한다.

진주 하진태 사례처럼 공식적인 인정에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포상 청원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합천 전주 전씨 집안은 87년, 함안 김세한 집안은 79년, 거창 진양 정씨 집안은 71년, 고성 박치상 부부 약 40년, 산청 최광삼 효자 청원은 27년 정도에 걸쳐 이어졌다.

반면 남명 조식 선생의 5세손인 산청 조천필·양필 형제는 1788년 효행 추천과 포상 청원이 있은 1년 뒤인 1789년 효자로 포상을 받았다.

한 번에 여러 명의 효행을 청원한 사례도 있다. 고성 진양 정씨 가문은 정태정과 두 아들 원득·원룡 효행을 함께 포상해달라고 1827년 예조판서에게 직접 청원했다. 이 밖에 고성 박치상 부부 효행 청원, 합천 박민영과 처, 형수 3인 효행 청원도 있다.

전주 전씨 가문은 전명항의 효행에 대한 포상을 청원하면서 전치원과 그의 아들 전우, 그의 손자 전영 삼대에 걸친 학행과 전치원·전우·전제 삼대에 걸친 충절 포상도 청원한 바 있다.

채 박사는 "효자 청원 기간이 길다는 것은 효행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다는 것, 시간 간격이 짧았다는 것은 효행을 증명하고 효자로 인증받기가 쉬웠다는 것을 나타낸다"며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진정한 효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집안이 더 효과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효자임을 증명하였는가에 따라서 효자로 공인되는 시간 간격이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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