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

"<응답하라 1988>에 많은 사람이 열광했는데요. 드라마 속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건축물이 살기는 좀 편해지고, 그만큼 단열이나 기밀 성능은 좋아져 더 따뜻해지고 더 시원해졌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인간적인 정을 느끼던 그 공간들, 골목, 도시가 갖고 있던 특수한 이야기들이 없어져 버린 게 아닌가 합니다. 창원, 부산, 진주, 어디를 가도 똑같은 도시 형태, 똑같은 건축물이죠. 이런 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결과물이라면, 이제 인간의 본성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도시 전문가나 건축 전문가 역할이라고 봅니다."

경남건축사회 조용범(54) 회장의 이야기다. "결국 건축은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삶과 철학을 소개한다.

아버지가 정해준 미래 직업

어느 날 아버지는 네 형제를 앉혀놓고 얘기를 꺼냈다. 사춘기에 접어들었거나 사춘기 문턱에 있던 남자아이 넷은 아버지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때 아들들의 미래 직업을 정해주셨죠. 그중에는 군인, 학자도 있었고, 사업을 하라는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한테는 건축을 하라고 하셨어요."

둘째인 조 회장은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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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범 경남건축사회 회장./박일호 기자

"사주도 보셨겠지만, 돌이켜보면 자식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취향이나 적성을 부모로서 눈여겨보신 것 같아요." 실제로 조 회장은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 만들기 등을 좋아했다.

"제가 건축을 안 했으면, 회화를 전공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림 그리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건축을 하면서 여행을 많이 다닙니다만, 사진 찍기보다는 스케치를 더 즐깁니다."

또 조 회장의 할아버지는 김해에서 대목(도편수, 집을 지을 때 책임을 지고 일을 지휘하는 우두머리 목수)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들까지 대를 이어 건축사 집안이다.

"아무래도 할아버지의 피와 재능도 물려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 2학년인 큰아들은 군에 가 있는데, 역시 건축을 전공하고 있죠."

첫 건축 스터디그룹을 만들다

경남대 건축공학과를 들어갔지만, 대학시절은 어려운 과정이었다. 그는 80학번인데, 건축과는 1979년에 생겼다. 건축 전공 교수는 1명뿐이었다. 2학년 1학기 이후 군 복무를 마치고 1984년 복학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교수님도 선배도 많이 없지만, 이대로 청춘을 보낼 수 없다고 느꼈죠. 우리 스스로 공부하고 새로운 건축 이론과 방법들을 익혀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으로 건축 스터디그룹을 만들었습니다."

부산, 대구, 서울 쪽에 있는 다른 대학 건축과와 교류하면서 함께 공부했다.

스터디그룹 이름은 '스케일 건축연구회'. 84년에 만들어져 2014년 창립 30주년 행사까지 열 정도로, 전통이 있는 모임이 됐다. 학년마다 5명 안팎으로 열정이 있는 학생들이 모여 세미나와 심포지엄 등을 열고,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면서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특히 스터디그룹 출신 선배들은 전국에 있는 이름난 건축사사무소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다. 일종의 건축 전문가 양성소 역할도 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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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범 경남건축사회 회장./박일호 기자

건축,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1987년 대학을 졸업한 직후 그는 마산에 있는 원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를 경험했다. 이때만 해도 건축과 졸업 이후 5년간 실무 경력을 쌓아야만 건축사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줬다. 조 회장 역시 선배가 맡은 프로젝트, 건축사가 진행하는 다양한 작업에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기본 설계부터 실시설계, 인허가 업무, 감리, 준공까지 여러 실무를 익힐 수 있었다.

1993년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고 94년 1월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딴 '범건축' 사무소를 열면서 독립했다. 그해 가을 10월에는 결혼도 했다.

"가장 어려운 게 실무와 함께 공부도 해야 했는데, 그 시기에 가정도 꾸려야 했죠. 국가고시가 어려워 전체 응시자 중 합격률이 9% 정도였어요. 굉장히 어렵게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을 병행하는 어려움이 있었죠."

실무에서 처음 맡은 일이 병원 건축이었다.

"원건축에서 병원 일을 담당하게 됐죠. 마산 석전동에 있는 이동식 정형외과인데, 스태프로 참여해 실시설계를 처음 맡았죠. 작은 로컬병원이었는데, 그걸 계기로 병원 설계를 많이 했습니다. 병원이라는 건축물은 특수성이 있거든요. 알음알음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다 지어진 건물을 둘러보러 오기도 했고, 의료계 원장님들을 통해 몇 개 프로젝트를 더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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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범 경남건축사회 회장./박일호 기자

병원 건축을 주로 하면서 건축사도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축에 관한 소신이다.

"한 건축사가 공장, 주택, 사무실, 학교, 공연시설, 의료시설, 종교시설 등 어떤 건물이든 사실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 중 특화할 것이 있고, 전문성을 갖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서로 과잉 경쟁하지 않고, 함께 먹고살 수 있다고 봅니다. 저도 아파트 등은 잘 모르지만, 아파트 설계 의뢰가 들어오면 그걸 놓치기 싫어서 욕심을 낼 수가 있고, 사실 그러면 전문성이 좀 떨어지게 되죠."

건축사의 사회적 역할

범건축을 개업하고 15년이 지난 2008~2009년이었다. 지역건축사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시기였다.

"제가 15년 가까이 건축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 울타리가 어디인지 생각해봤습니다. 건축사협회가 저의 건축사 활동을 보호해주는 울타리였고, 창원YMCA 활동 등에 참여하면서 건축사들의 사회적 역할이 필요하다고도 느꼈죠. 40대 후반이었는데, 사회적 역량이 가장 활발할 때라고 생각했고요."

창원건축사회 회장으로 4년을 활동하고, 통합 창원시건축사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지난해에는 경남지역 600여 명 회원을 위해 일하고자 경남건축사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고민하고, 더불어 살면서 지속적으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도내 건축사회 요직을 모두 거친 이력이다. 혹시 정치에 뜻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없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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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범 경남건축사회 회장./박일호 기자

"입법 때문에 국회의원을 만나고 국토부를 방문해봤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대한민국에 건축사로서 국회에 들어간 사람이 한 분도 안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정부를 설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는데, '변호사, 의사, 약사 등처럼 건축사 출신 정치인이 나와 우리 입장을 대변해줬으면 합니다."

건축 현안 진단

조 회장은 지난해 4월 취임했다. 그가 건축사회 안팎으로 제기했던 건축 현안들을 짚어봤다.

"우선 설계·감리 용역비 현실화와 관련된 건축법 일부 개정안이 올해 1월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그동안 건축주가 직접 시공해온 소규모 건축물에도 감리자를 건축 허가권자가 지정할 수 있도록 했죠. 건축물 부실이나 안전사고 문제가 설계만이 아니라 감리 부실에서도 발생한다고 인식했기에 이 같은 법 개정 작업이 이뤄졌습니다."

이 입법도 무려 3년 이상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조 회장은 설계비와 감리비가 현실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감리비는 서비스 개념이 강했는데, 이제 건축 허가권자가 감리자를 지정하는 것으로 돼 있어 감리비도 제대로 책정해 지급하고, 감리 업무도 정상적으로 수행할 여건이 마련된 겁니다. 설계비도 IMF 직후 최저로 내려가 아직 현실화하지 않았는데, 감리비와 설계비가 동시에 현실화하지 않을까 내다보고 있습니다."

조 회장은 건축사 업무 범위가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은 근대화와 갑작스러운 개발 시대를 벗어나는 단계입니다. 주택이나 건축물 보급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고, 앞으로는 기존 뼈대에 안전 문제만 없다면, 내부 기능들이 현대 패러다임에 맞게 차츰 변해가야 합니다. 건축물 리모델링, 유지 관리에 건축사들의 미래 먹거리가 있지요."

특히 인테리어나 리모델링은 화재, 피난 등 안전에 관한 문제를 꼼꼼히 검토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내부 장식 요소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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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범 경남건축사회 회장./박일호 기자

"소방설비, 전기 등과 같이 인테리어 안에 숨어 우리가 지나쳤던 부분들이 이제는 자격이 있는 건축사의 고유 업무로 전환돼야 할 것입니다. 대한건축사협회에서도 이 내용을 법제화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죠. 건축사들이 인테리어 부분을 터부시해왔는데,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바꿔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경남건축사회는 지난해 윤리위원회를 열어 9개월 회원 권리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편법으로 사무소를 운영하는 곳이었다. 전국 시·도 건축사회 중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조 회장을 비롯한 경남건축사회 집행부는 불법·탈법·위법 사무소를 근절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경남에서부터 이런 흐름이 확산해 다른 시·도에서도 관련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다.

또한 조 회장이 취임 당시 약속했던 미래전략위원회는 올 3월 총회 승인을 거쳐 발족할 예정이다. 시장 개척단 역할도 할 미래전략위는 건축사회 새로운 역할과 먹거리를 모색한다.

아직 역작이 없는 까닭

조 회장은 건축사로 활동해오면서 자신이 설계해 기억에 남을 만한 건축물을 꼽아놓지는 않았다.

"몇 가지 애착을 두고 진행한 것이 있지만, 말씀드리기 어려운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그러한 과정에 있습니다.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면서 여전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죠."

세월이 흐르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자신만의 건축 철학이다.

"단지 책에서 나와 있는 지식,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들, 유행처럼 만들어지는 외관이나 디자인으로만 건축을 논하기에는 부족한 게 있다고 보거든요. 연륜이 쌓이고, 정말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깊은 성찰 뒤에 건축의 완성도가 생기는 게 아닐까 생각하죠. 그래서 좀 연세가 드신 선배 건축사님들의 활동이 안 되는 것도, 그 많은 경험과 연륜이 사장되는 것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동대문디자인프라자를 설계했던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 프랭크 게리,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같은 세계적인 건축가들도 60이 넘은 나이에 왕성하게 활동했지요. 대한민국에선 너무 트렌드 위주의 건축을 추구하다 보니까 선배 건축사들의 소중한 경험이 사장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살아갈 도시와 지역을 위해 관심과 참여를

회장으로서 남은 임기는 2년이다. 도건축사회의 사회적 역할 강화, 회원 권익 신장에 주력하고 싶다고 했다.

"현재 대한건축사협회 산하에는 연구원이 있는데, 시·도 건축사회에는 아직 한 군데도 없습니다. 경남건축문화연구원을 설립해 건설 동향을 파악하고, 다양한 조사와 연구로 지역 균형발전을 유도하는 정책 개발 자료도 만들었으면 합니다. 이것을 행정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요. 건축사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개발해 사회적 역할 강화에 힘썼으면 합니다."

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물어봤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조심스럽지만, 꼭 필요한 얘기"라며 말을 이어갔다.

"경상남도는 도민이 주인입니다. 시·군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와 건축에 국한해 말씀을 드리자면, 내가 살아갈 이 도시와 지역은 내가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논리로 경남이나 시·군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와 건축에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셨으면 합니다. 경남에 시·군별로 18개 지역건축사회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터전은 우리가 지켜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의견을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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