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리 갯길따라 걷는 거제 섬이야기

거제도에 들어서 처음 번화한 시가지가 펼쳐졌다. 도농 복합 형태의 도시들을 보면 대부분 중심이 되는 도시 주변 군 지역이 통합되어 이루어지는데 거제는 독특하게 세 개의 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어우러진다. 삼성, 대우 양대 조선소가 있는 신현읍과 옥포 일대 그리고 장승포시에 거제도내 면 지역들을 통합하여 거제시가 되고 시청을 지역적으로 치우친 장승포시가 아닌 이곳에 두었다. 거제 사람들이 보통 고현으로 부르는 구 신현읍이다. 숲 속으로 들어가면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한다 했으니 이내 시가지로 들어서지 않으련다. 사곡에서 누운티 고개를 넘어서, 오른쪽 옛날 도자기를 굽던 가마터 사기장골로 들어서, 갯길을 잠시 버리고 산길을 잡는다. 고현 숲을 보고자 함이다. 거제의 주산 계룡산 정상에 오르면 한눈에 섬을 조망할 수 있으나 다음 거제면을 들를 때 오르기로 하고 산 중허리를 감싸고 도는 둘레길을 걷는다. 바닷길과 산길, 하늘길을 한꺼번에 달릴 수 있는 거제 계룡산 둘레길은 산악 마라톤과 라이딩 코스로 이름나 있다. 대섬 왼쪽 삼성중공업이 망치 소리가 들리는 듯 가깝다.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맞은편 독봉산 끝자락까지 바닷물이 들고 났다는데 바다가 멀어져 간다. 지금도 연신 고현만을 매립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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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자산치에서 본 계룡산./박보근

거제 고현하면 한국전쟁 포로수용소가 떠오를 것이다. 저 독봉산 둘레 수월, 양정, 고현, 장평 일대 360만 평에 최대 17만 3천 명까지 수용했단다. 그 시절 아린 상처는 숲에 들어가 들어보자.

두어 시간 바닷바람이 띄운 구름을 탄 듯 오솔길을 걷다 보니 억새밭이 펼쳐진 고갯길이 나온다. 고자산치다. 고자산을 넘는 고개라서 고자산치가 아니다. 고자산이라는 산이름은 아예 없다. 계룡산과 선자산 사이로 거제면 명진과 고현 용산을 넘나드는 옛 고갯길이다. 폐쇄적인 환경의 섬이어서 그런지 거제에는 근친 간의 남녀 관계를 경계하는 전설이 많다.

옛날도 아주 오랜 옛날 아주라는 곳에 법률사라는 절이 있어 번창하다가 왜구의 노략질로 불타버리고 탑만 덩그러니 남아 탑골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서남쪽 골짜기를 이른다. 이 마을에 의좋은 오누이가 살았더란다. 조실부모하여 의지가지없이 남의 집 처마 밑이나 헛간에서 지내는 신세였지만 심성이 곱고 부지런하여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꾸짖을 때 오누이 반만 해도 사람 구실 한다며 나무랐다. 누이는 당동산 아래 아양 바닷가까지 나가 개발을 하고 동생은 옥녀봉에서 나무를 해다 팔고 밤이면 삯바느질에 대통발을 만들며 억척을 떨었다. 세월이 지나자 작은 집칸까지 장만하여 날마다 오누이 웃음소리가 울바자를 타고 넘었다. 그러나 이들이 장성하여 시집 장가들 나이가 되었는데 도통 중매가 들어오지 않는다. 워낙 곤궁한 살림살이에 조실부모로 근본이 없다하여 입에 발린 칭찬을 하면서도 선뜻 며느리로 들이거나 딸을 내줄 생각이 없었던가 보더라. 사정이 이러니 오누이도 매양 마주앉은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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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식당 내장국밥./박보근

"누우야, 고현장에 나무 팔러 가서 알게 된 사람인데 참 진국이더라. 내 다리를 놓을 테니 올 가실하고 나면 천하 없어도 시집가소."

"동상아, 내는 괘안타. 자네가 각시 얻어 조상님 대를 잇는것 보고 가도 안 늦다네. 저 아래 아양마을에 물질하는 과수댁 맏딸이 참 참하더라. 연통을 넣어 두었으니 올 가실에 성례를 올리세."

서로 이리 애써 다리를 놓고 연통을 넣었지만 정작 고현장의 나무꾼도 물질하는 과수댁도 아무런 비답없이 가을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봄이 되었겄다.

"올해는 외할머니 제사에 꼭 다녀오자꾸나. 외가에 가서 조상님 음덕으로 동생이 대를 잇게 장가 보내달라고 빌어야 겠구나."

"하하. 누우 시집 보내 달라고 떼쓰는게 아니고?"

오누이의 외가는 아주 탑골에서 재를 두 개나 넘어 거제현(지금의 거제면) 명진에 있었다. 누이는 쑥떡을 해서 광주리에 이고 동생은 향초와 제물을 준비하여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때는 만화방창 춘삼월 연두 바람이 거뭇 수염이 나기 시작한 동생의 가슴을 헤집고 도타운 햇살이 막 피어오르는 누이의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종다리마냥 재잘거리다 계곡 물 구르듯 까르르 웃으며 소풍 나선 듯 문동 폭포와 수월 양정 사이 고개를 넘어 고현 용산에서 계룡산과 선자산 자락이 겹쳐지는 고갯길을 반쯤 올랐을 때였다. 화창했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자드락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땅히 비를 그을 곳도 없는지라 내쳐 산길을 오르는데 한참을 뒤따르던 동생이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어보니 여지껏 앞서가던 누이가 간 곳 없다. 대신 갓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여인의 뒤태가 눈에 들어온다. 비에 젖어 착 달라붙은 엉덩이가 터질 듯하고 낭창낭창 흔들리는 허리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에 야릇한 체취가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애써 이성을 찾으려했으나 눈에 뵈는 게 없는 그놈은 이미 발광을 하고 있었던가 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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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 겨울 보양식 대구와 물메기./박보근

"누우, 내 소피보고 갈 테니 먼저 올라가소."

겨우 정신을 차린 동생이 누이를 먼저 보내놓고 그놈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네 이런 천하에 몹쓸 속물 같으니라고. 금수, 미물조차도 혈연에는 음양을 헤아리지 않거늘 하물며 인간에 생겨 나서 인륜을 거스르고 천륜을 해하려 했단 말이더냐. 내 너의 죄를 다스려 능지처참하리라."

동생은 제 손으로 그놈을 바위에다 돌로 짓이겨 피를 흘리고 죽었다.

한편 고개 먼당에서 동생을 기다리던 누이는 한참이 지나도 기척이 없자 산짐승에게 해를 입었는가 아니면 실족 낙상을 하였는가 걱정이 되어 동생을 부르며 왔던 길을 톺아 내려오다 그곳에 선혈이 낭자한 채 죽어있는 동생을 보고 널브러진다.

와 죽었노 와 죽었노

세상 천지 만물중에

사람 목숨 젤 중한데

와 죽었노 와 죽었노

하늘 땅이 입 다물고

니만 알고 내만 알면

귀한 목숨 사는긴데

와 죽었노 와 죽었노

말이나마 해보든가

말도 한 번 못해보고

와 죽었노 와 죽었노

나만 혼자 살아 남아

무신 영화 누리겠노

동상 동상 내 동상아

오래전 수월마을에서 밭 매는 할머니의 가락이 하도 구슬퍼 적바림해두었던 노래다.

아주로 다시 넘어가는 고갯길을 누이는 동생을 업고 슬피 울며 넘어가고 있었다. 둘이 살던 탑골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동생을 묻고 울며 지새다 따라 죽고 말았더란다.

그 후 사람들이 누이가 울며 넘은 고개를 울음이재라 하고 동생이 자신의 남성을 돌로 쳐 징벌하여 죽은 고개를 고자산치라 부르게 되었더란다.

"국구~국구~구국 국국…."

내려오는 산모롱이 어디선가 산비둘기 우짖는 소리가 누이의 통곡인양 애달프다.

산을 내려와 고현 시가지로 들어선다. 도심의 풍경이야 다 거기서 거긴데 이곳에는 색다른 모습이 하나 눈길을 잡는다. 시내 한가운데 유럽의 공동묘지처럼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런 건물의 잔해들이 철책으로 둘러싸여 보존되어 있다. 거제 역사에서 가장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전쟁 포로수용소의 실존 건물 잔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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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같은 60년전 포로 수용소 한가운데 선 신영민(95세)옹./박보근

수월마을에서 만난 신영민(95세) 어르신은 한국전쟁 당시의 기억을 묻자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다고 말한다. 그때만해도 섬치고는 너른 들에 바다가 지척이라 사람 살기 참 좋았더란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포로수용소를 지으면서 독봉산 주위 모든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냈다. 그것도 이주할 곳을 마련해준 것이 아니라서 친척 집에 잠시 의탁하거나 인근의 연사, 오비 등 양지바른 마을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 360만 평에 17만이 넘는 포로를 수용하고 이송하느라 해안을 매립하여 큰 배가 드나들 항만을 만들고 강제로 수용한 땅에는 수많은 시설들이 들어찼다. 인구 10만도 안되는 섬에 포로 17만, 피난민 15만이 살게 되었으니 산과 들에 풀뿌리 하나 남지 않고 갯가에 조개와 해초가 씨가 말랐다.

"저 아파트 잔뜩 서 있는 데까지 바다였을 때는 이 들판이 일등 상답이었는데 그 난리통부터 메우기 시작해서 저래 놓으니 메기가 침만 흘려도 홍수가 지고 갱물이 범람해서 곡식을 발갛게 태우니 이제 자구도 못 쓰는 땅이 되았제…."

이 어르신과 동갑내기 친척 한 분은 일본의 강제 징용을 피해 만주로 돈벌이를 나섰다가 마오쩌둥의 팔로군에 붙잡혔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서도 남과 북이 갈라서는 통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한국전쟁이 터지고 중국군이 개입하자 고향으로 갈 일념으로 자원하여 전쟁통의 고국으로 돌아와 수원 어디쯤에서 투항하여 포로로 10년만에 고향 땅을 밟았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지만 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 납치사건 때 미군의 총에 맞아 평생 불구로 지내다 돌아가셨다 한다. 마을 가운데 두껍고 높은 담장을 두른 농가가 있다. 폭동이나 살인에 연루된 포로를 악질포로로 분류하여 가둬두었던 감옥의 벽이란다.

"그 양반이 쳐다만 봐도 섬뚝다고 새 담장 쌓아줄 테니 헐어삐라 캐서 헐어볼라 했는데 얼메나 야무지게 쌓았는지 깨다가 고마 막살 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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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거제군청. 신현읍 사무소로 쓰이다 지금은 고현동 사무소로 쓰이고 있다. 60년이 넘은 청사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박보근

남겨두어야 하지 않겠나. 밝혀두어야 하지 않겠나.

시청 앞 포로수용소 헌병대 막사다. 철책으로 둘러 보존된 유럽의 공동 묘지처럼 을씨년스러운 건물의 잔해를 시내 가운데 두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부끄럽지만 바르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쓰라리고 아프지만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바닷속 슬픈 이야기를 이제 그만 좀 잊으라는 사람들아 거제 올 일 있거든 여기 와서 단디 좀 봐라.

고현 시장을 둘러보며 자작시 한 수 읊어본다.

(중략)

농소에서 새벽 첫 차로 홍합 이고 나온 감포댁

스물일곱 뱃일 갔다 북으로 잡혀 간 생이별 서방님은 여즉도 스물일곱인데

오십이 다 된 큰아들이 시아버지 같다 그러고

말린 포고버섯 복스럽게 담긴 소쿠리 소쿠리 구천동 곱새 할매

터울지기 떠맡긴 딸년은 삼 년째 무소식인데

김가인지 이가인지

아니면 핸리인지 심슨인지도 모를

외손주들 과자값이나 쥘랑가 모르겠다


조선소에서 일 잘하던 아들놈

고생하는 사람들이 복 받는 세상이 돼야 한담서

휘발유 덮어쓰고 끔찍하게 죽은 그놈따라

연초 천곡 고개 먼당에 사는 진주댁

아들 누운 등성이 쑥이며 냉이 달래가 토실하고

아! 저기 또 있네

개차반 신랑 덕에 맨날 눈화장 필요 없어도

애들 보고 산다는 길 까페 아지메


신현읍내 구도로 사거리

오일 십일 서는 고현장에는 성냥팔이 소녀가 있다

추운 겨울밤 한 개비 개비마다

추억과 사랑, 감사와 용서를 비추며

행복했던 소녀가 고현장에 있다

곱은 손으로 담아준

그녀들의 비릿하고 알싸한 세월이

참 푸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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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현 시가지. 오른쪽 쌍봉의 독봉산 둘레 360만 평이 포로 수용소로 수용되어 주민들이 모두 강제 이주 당했다 한다./박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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