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무용수 아니에요, 오늘도 굳은 몸을 풀어야 하는 평범한 청춘이에요"

'차세대 유망예술인' 10명이 뽑혔다. 지난 3월 경남도가 지역예술계를 이끌어나갈 공연예술·시각예술 분야 젊은 예술인을 발굴했다.

김현주(30) 씨는 차세대 현대무용수로 선정됐다.

지난 8일 만난 그녀는 10월에 개인 공연을 마쳤고 며칠 후 열릴 차세대 유망예술인 성과 발표회를 준비한다고 했다.

"앞으로 뭐 할 거냐, 어떻게 될 거냐고 많이들 물어요. 글쎄요….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채우고 공부하다 보니 지금까지 왔어요. 몇 년 후에도 똑같지 않을까요? 음. 그래도 고민해봐야겠죠."

김 씨는 인터뷰 끝에 이어진 '상투적인' 질문, 앞으로 계획과 목표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쉽게 내뱉을 수도 있는 거창한 포부 대신 현재 나를 다듬는 중이라고 말하는 그녀. 서른 즈음 청춘이었다.

"예술가라고 모두 천재는 아니에요"

창원대 63호관 1층 무용 연습실이 잠겨있다. 오후 2시 50분, 인터뷰 예정 시각 10분 전이다.

어두운 복도 끝에서 "혹시 경남도민일보…. 많이 기다렸나요"라며 김 씨가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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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수 김현주 씨./박일호 기자

그녀는 연습실 문을 열고 불을 켜고서 난방기를 작동시켰다. 휴대전화로 음악을 찾더니 사라졌다. 잠시 후 겨울 코트를 벗고 편안한 복장으로 다시 인사를 건넸다.

며칠 전 그녀는 문자메시지로 옷차림을 물었었다. 무용 동작을 선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답변했더니 연습 복장을 준비해왔다.

사진 촬영부터 시작했다. 팔을 뻗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움직였다. 사방이 거울이라 구도 잡기가 어렵다는 사진 기자 말에 한자리에 서서 다양한 동작을 선보였다. 휴대전화 노래는 끊긴 지 오래, 무반주에도 그녀는 리듬을 타고 있었다.

"자유 동작이에요. 나도 모르게 나오는 움직임이죠. 자연스럽게 나와요."

사진 촬영을 끝내고 마주 앉은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작은 얼굴에 동그란 눈, 정갈한 눈썹, 귀에 꽂힌 피어싱들. 팸플릿에서 보던 모습보다 앳되었다.

김 씨는 '타고난' 예술인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모두 천재라고 말하는 예술가와 거리가 멀었다.

'지독한 노력형'. 험난한 예술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김 씨는 어쩌면 누구보다 평범한 젊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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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수 김현주 씨./박일호 기자

또래보다 큰 키 덕에 시작한 현대무용

현대무용은 발레에서 파생된 장르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새로운 움직임으로 창조해나가는 것. 이런 춤을 추고 연구하는 사람을 현대무용수라고 부른다.

"사실 '댄싱9'이라는 프로그램이 있기 전까진 현대무용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대부분 엠넷에서 방영한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아 저런 게 현대무용이라는 거구나'라고 알았죠. 대중이 쉽게 알 만한 작품도 많지 않아요. 저도 무용의 '무'자도 몰랐습니다. 관심조차 없었어요."

김 씨는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마산 성지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 1학년 수업 시간 때 무용을 처음 접했어요. 무용 수업이 따로 있었거든요. 탈춤이라던지 발디딤처럼 한국무용을 배웠습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CA(특별활동)를 무용부로 들었고 학교 축제 때 공연도 했죠. 그동안 무용은 정말 화려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근접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한 날은 CA 선생님이 무용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답니다. 한국무용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키도 크고 하니 현대무용을 전공으로 해보라고요. 사실 무용전공 권유를 받았을 때 '이거다'라는 확신은 없었어요. 다만 심장이 쿵쾅쿵쾅 했어요. 뭔가 끌림이 있었나 봅니다."

168㎝로 또래들보다 키가 컸던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예술대학을 준비하는 친구들처럼 오후에는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 대신 창동에 있는 무용 학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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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수 김현주 씨./박일호 기자

"엄청나게 울었어요. 17년 동안 무용을 전혀 하지 않은 몸이니 얼마나 굳어 있었겠어요. 스트레칭만 하는 데도 남들보다 10배는 더 힘들고 어려웠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루라도 몸을 풀어주지 않으면 어느새 뼈와 근육이 굳어버려요. 연습이 없는 날도 하루에 1시간씩 스트레칭을 해요."

김 씨는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실력이 괜찮은지 나쁜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고 했다. 키만 컸지 유연성이 있는 것도, 무용수로서 타고난 재능도 없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생활습관과 식습관을 바꿔가며 기본기를 하나둘씩 익혀나갔다.

학원 선생님은 엄했다. 몸을 움직이고 열정을 쏟아내야 하는 고된 수업이라 고성이 오가기 일쑤였다.

"무서운 분이셨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어요. 입시 준비도 잘 지도해주셨죠. 2년 동안 전국 대회와 대학에서 여는 무용 콩쿠르에 나갔어요. 아무래도 수상 경력이 있으면 도움이 되잖아요."

발바닥이 찢어졌던 어느 여름날

김 씨는 2004년 창원대 무용학과에 입학했다.

"창원대를 지원했던 이유는 딱 하나였어요. 사실 무용을 늦게 시작해 서울 대학에 시험 쳐볼 생각도 없었고요. 창원대는 김태훈 교수님 때문에 꼭 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당시 교수님은 대학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고 젊으셔서 활동을 많이 한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교수님을 처음 본 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카리스마가 대단했죠. 지금도 아주 열정적이세요."

김태훈 교수는 10여 년 전 '훈댄스컴퍼니'를 만들어 지역에서 다양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재학생들과 무대에 올라 무용과 연극, 음악, 전통예술 분야를 접목한 창작 작품을 선보였다. 현재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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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수 김현주 씨./박일호 기자

김 씨도 훈댄스컴퍼니 소속이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녀가 출연했던 프로그램 대부분이 훈댄스컴퍼니의 정기공연과 무용제 경연 무대였다.

그녀의 대학생활은 아주 모범적이었다.

"무조건 열심히 했죠. 교수님이 하라는 대로 준비하고 연습하고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예고를 졸업한 친구들을 보고 충격과 자극을 받았죠. 비전공 장르도 잘하더군요. 매년 콩쿠르 2개 정도 준비했어요. 저는 여전히 많이 배워야 했죠."

그녀는 기억에 남는 대학생활을 묻자 한 여름날을 떠올렸다.

"아직도 기억나는 날이 있어요. 몇 년 전만 해도 33호관 연습실이 고무바닥이었거든요. 맨발로 춤추다 보면 발바닥이 찢어지기도 해요. 또 물이 새어서 습기가 가득하죠. 여름날 연습실은 앞도 잘 안 보여요. 습기와 땀으로 가득 차 거울도 뿌옇게 되죠. 그때 선후배들의 열정을 잊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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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수 김현주 씨./박일호 기자

좁은 시야 극복하려고 석사·박사 과정 밟았다

김 씨는 대학생활 4년 동안 여러 무대에서 춤을 췄다. 창원 성산아트홀 소극장에서 정유영 창원대 무용학과 교수 발레 공연에 참여했고 김경숙무용단 '진주별곡'으로 진주 경남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올랐다.

"대학교 4학년 때 전국무용제에서 'Force a Heart'라는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제가 줄에 매달려 하늘에서 내려오며 작품이 시작되는데 오래도록 잊히지 않아요. 그땐 어려서 제 역할만 충실히 한다고 다른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못했어요. 이제 와 생각하면 무대 세트며 의상, 음악이 아주 독특했습니다. 줄거리도 흔한 내용이 아니었어요. 일반적인 남녀 사랑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남자가 여자의 사랑을 강요하는 작품이었거든요. 현대적이면서도 단순하게 잘 풀었던 무대였어요. 이 작품은 대회에서 은상을 받았답니다."

그녀는 대학생 때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프로그램 주연을 맡아도 제 역할에 몰두해 철저하게 준비하느라 전체 무대를 보지 못했다고.

프로 무용수가 된 후 섰던 첫 무대도 아쉬움이 남는다.

졸업 후 2009년 부산에서 열렸던 '제15회 신인 춤제전 젊고 푸른 춤꾼 한마당'에서 '소리질러'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안무를 직접 짰다. 그동안 말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 응어리들을 표현했다.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첫 안무를 맡은 작품이라 재미는 있었지만 공연 질적으로는 부족했죠.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고 내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이해했을까, 이 부분이 제일 걱정됐어요."

그래서 그녀는 시야를 넓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김태훈 교수님 권유로 석사 과정을 밟았습니다. 끝내고 보니 박사 과정에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춤을 이론적으로 배우고 논문을 쓰다 보니 춤추는 사람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욱더 다양한 지식과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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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수 김현주 씨./박일호 기자

김 씨는 현재 세종대학교 무용학과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또 창원대에서 후배를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 서보니 자신의 부족함을 또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이론 공부는 몸짓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지만 그녀의 무용을 풍요하게 만드는 밑거름이라고 했다. 움직임 뿐만 아니라 신체 해부, 심리 등 다양하게 무용에 접근하니 보는 눈이 확실히 달라졌다고 했다.

차세대 유망예술인 사업으로 아버지 이야기 풀어내

여기에다 '차세대 유망예술인' 사업으로 연극처럼 다른 장르에도 관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연극에서 쓰는 무대 연출과 조명, 음향 등을 보며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그녀는 올해 경남도에서 지원받은 사업비로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예술인을 초청해 워크숍을 열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16일 창원 성산아트홀 소극장에서 'Ones Old Man'을 선보였다. 그녀가 차세대 유망예술인 사업으로 만든 작품이다.

"아버지 이야기에요. 저는 지금의 제 모습을 토대로 작품 구상을 합니다. 첫 작품 '소리질러'도 마찬가지예요. 그때 제 마음이 답답했거든요. 'Ones Old Man'은 아버지의 인생을 풀었어요. 자식으로 태어나 성장해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되어 기계처럼 일하는 그. 자식의 짐까지 짊어지는 그의 무거운 어깨. 치열하게 사는 우리 아버지. 마지막 장면에 공을 들였는데 그럼에도 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 눈물을 닦아줘요. 자신보다 가족을 생각하는 거죠. 공연장에 아버지가 오셨는데 많이 우셨어요. 관객들도 훌쩍이고요."

김 씨는 모호하고 난해한 주제보다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현대무용을 좋아한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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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수 김현주 씨./박일호 기자

"아직 순수무용 쪽은 대중들이 크게 재미를 느끼지 못해요. 공연은 자주 열리는데 홍보를 하더라고 그냥 지나쳐버리죠. 무용수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진정 몸으로 움직인다면 관객이 친근하게 생각할 겁니다. 작품에 따라 무용수들의 위치나 역할이 다르겠지만 연구하고 소통한다면 관객이 줄을 잇죠. 또 지역민들도 무용이라면 난해하다는 생각에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냥 편하게 즐긴다는 마음으로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청춘, 서른 살

이를 위해 그녀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인디밴드를 중심으로 자주 열리는 '버스킹'처럼 정형화된 무대에서 내려와 관객을 만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전시장에서 공연을 한다든지 다른 장르와 결합하는 것을 구상하고 있다. 처음에는 시민이 어색해하겠지만 관객과 가까이서 소통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껏 정해진 무대 공간에서 공연을 많이 했다면 이번에는 무용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 관객과 무용수가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계획 중입니다. 현대무용을 좀 더 대중화시키고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이는 현대무용을 전공하는 무용인들도 활발하게 활동할 기회가 될 수 있죠."

그러려면 차세대 유망예술인 지원을 1년 더 받아야 한다고.

"오는 22일 사업 결과 발표회가 있어요. 성과를 인정받으면 1년 더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죠. 꼭 사업을 연장하고 싶어요. 내년에는 박사 과정을 이수하며 안무가로 활동할 것 같습니다. 차세대 유망예술인으로서도 새로운 시도를 계획하고 있답니다."

요즘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박사 과정을 끝내고 뭐 하는지란다. 교수를 할 거냐, 단체를 만들 거냐 등 많이들 묻는단다.

"무엇이 되려고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었는데…. 지금 부족한 게 보여 석사·박사 과정을 이수한 건데 주위 분이 이렇게 물을 때면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고민해야겠죠. 그런데 아마 박사과정이 끝나는 내후년에도 그때 부족한 걸 찾아서 새로운 도전을 할 것 같아요. 몇 년 후 어디 무대에 서겠다, 어떤 작품을 맡겠다, 누구처럼 되겠다 이런 꿈은 없어요. 무용수로서 자신을 잘 돌아보고 내일을 위해 오늘 할 일을 찾는 것뿐이에요. 추상적으로는 '관객과 소통하는 무용수'가 장기적인 목표인데…. 글쎄요…. 제가 무용을 하면서 저를 잘 알게 된 듯 초심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할 거예요. 저는 무용수로 태어난 인재, 예술가로 반드시 살아야 할 천재가 아니라 평범한 30살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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