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인'의 자존심 드높인 <재경 의령향우회 60년사> 발간

재경 의령군 향우회가 펴낸 <재경 의령향우회 60년사> 속에는 서울에서 생활해온 의령 향우들의 모습만이 담겨 있는 게 아니었다. 의령 향우들의 삶의 이력을 다루는 데 집중한 게 당연한 출판의 일차적 목표였겠지만, 그들이 60년 동안 걸어온 길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고 보니 경상남도 속에 자리잡은 의령군의 모습은 물론이고 한국 근현대사의 한 단면까지 꿈틀거리고 있었다.

2014년 7월에 <의령 재경향우회 60년사>를 출간하기로 결정하고,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대형 양장본 책이 출판되기까지 실제 작업 시간은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의령 출신의 각계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편집위원회가 꾸려지고 나서 사료 수집이며 원고청탁 등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책을 출판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강완석(72) 재경 의령군 향우회장은 광고·협찬 영업(?)에 직접 나섰다. 사료수집과 편집위원회 활동에 신경을 쏟으면서도 광고·협찬 수주에 나선 결과 출판 경비를 모두 모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1년 안에 마무리하면서도 결코 허투루 만들어진 것으로 취급받을 수 있는 책을 남기지는 않았다.

01.jpg
<의령향우회 60년사>./임채민 기자

강 회장은 '한국곡물음료재가공 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해당 업계 중견 업체의 현직 CEO이기도 하지만 <60년사> 발간에 열과 성을 다 쏟았다. 강 회장의 부지런함과 뚝심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재경 의령군 향우회는 재경 경상남도 향우회 중에서는 최초로 1955년 결성됐다. 그리고 <60년사>를 발간함으로써 또 최초 재경 향우 역사서를 발간하게 된 셈이다.

의령군 출신 문인, 화가, 학자, 언론인 등 10명으로 구성된 편집위원회는 박강수(편집위원장) 전 배재대학교 총장이 이끌었다.

'의령군 재경 향우회 초대 명예회장은 이병철 회장'

<60년사>에 소개된 의령군 향우회 설립 초기 풍경은 이렇다.

'1950년대에 서울에 온 의령인들은 줄잡아 3000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의령인 이병철(정곡면 출신)의 삼성그룹도 발 빠르게 서울과 경기 지역으로 본사와 공장을 이전시켰다. 의령인들이 서울에 중소기업을 세우고 가족과 친지들이 고향에서 상경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동대문 시장과 남대문 시장 등에 의령인들이 경영하는 상점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지와 장판 도소매업과 도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용산에는 삼영화학(대표 이종환), 을지로에는 왕자지업(대표 왕만수), 동대문 시장 상권 중심으로 조직된 동대문시장번영회(회장 김부록), 국제약품(대표 이중경), 청량리 쪽에는 협신농기(대표 박영출) 등 이미 50년대부터 작으나마 의령인들의 손에 의하여 공장들이 운영되고는 있었다.(p42)'

그리고 1955년 5월 초 어느 일요일 창경원에서 재경 의령군 향우회는 창립된다. 초대 회장은 안호상(부림면, 초대 문교부장관) 회장이 맡았고, 왕만수(부림면, 왕자지업 대표) 회장이 준비한 수건이 기념품으로 나왔다. 향우회는 봄, 가을로 개최되었으며 모임 안내는 오로지 일간지 신문광고에 의존했다고 한다.

02.jpg
<의령향우회 60년사>./임채민 기자

이병철 회장이 1955년부터 1987년까지 향우회 명예회장으로 이름을 올렸고, 그 이후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이름이 뒤를 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향우회 설립 초기 향우회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는 앉은 자리에서 거액의 현금을 선뜻 찬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60년사>에는 의령읍, 가례면, 칠곡면, 대의면, 화정면, 용덕면, 정곡면, 지정면, 낙서면, 부림면, 봉수면, 궁류면, 유곡면 향우회의 소식이 꼼꼼하게 기록돼있으며, 행정·입법·사법·학계·언론계 등에서 활동해온 유명 향우들의 약사가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다.

"뚝심으로 밀어붙인 결과물"

-처음에 책을 출판하기로 결정할 때부터 부담이 컸을 텐데요.

"그렇죠. 향우회장도 수락을 안 했을 건데, 미루다가 미루다가 맡게 되었어요. 그리고 2014년 5월에 '60년사' 발간이 회장단 회의에 상정됐습니다. 내년(2015년)이면 향우회가 창립된 지 60년이 되는데, 사람으로 치면 환갑 아니냐, 사료집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죠. 향인들이 모여서 문화제 등 행사는 해왔지만 역사기록은 없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하자' 했고, 의견을 모은 끝에 7월에 출판하기로 최종 결정한 거죠. 그리고 편집위원 구성하고 임명장 주고 정식 발족한 게 12월입니다. 업무 시작은 다음해 1월 1일부터 한 겁니다. 박강수 총장을 비롯해 각 분야 전문가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03.jpg
▲ 강완석 재경 의령군 향우회장./임채민 기자

-경비를 마련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향우회 자체 재정이 빈약한데, 억 단위가 들어가는 사업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 게 광고 모집이었습니다. '신문광고를 내면 그날로 끝이고, 잡지는 한 달이다. 그런데 이 책에 하는 광고는 영원히 간다. 자손들이 대대로 이 책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제가 아는 곳도 찾아다니고 읍면 회장님들이 추천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광고를 받아왔죠. 하하."

-그래도 실제 책을 출판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고, 사료수집이며 원고 모집 등을 고려하면 작업을 무척 빨리 마무리 지었네요.

"고집스럽게 뚝심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편집 기일 안에 원고 내라고 제가 직접 독촉도 하고, 외부에 나가서는 광고 협찬도 받고 했습니다. 삼성에서도 도와줬고요. 특히 이종환 회장님께서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얼마 전에는 제가 직접 관정 장학재단에 찾아가서 감사패도 전달해드리고 왔습니다."

"백암정 복원에 힘 쏟을 터"

강완석 회장은 가례면 출신으로 1967년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에 곡물 유통업을 하게 됐고 자리를 잡기까지는 밤을 낮처럼 일했다. 사업이 안 돼 망하는 점포를 인수해서는 직원 2명과 함께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닦은 사업 기반이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서울에 가지 말라고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당시 집안에 농지가 많았는데, 농사지을 체력이 안돼서 서울로 올라온 거죠. 하하."

04.jpg
▲ 강완석 재경 의령군 향우회장./임채민 기자

강 회장의 고향에 대한 애착은 강했다. 강 회장은 인터뷰 도중 사무실 한쪽을 뒤져 깨진 기왓장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의령 가례면에 있는 백암정 터에서 직접 가지고 온 기와였다.

태풍으로 무너진 백암정을 복원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역사적 복원도 함께 진행시키기 위함이었다.

"백암정 이야기가 의령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실렸어요. 그 기고에는 조선시대 세워졌다가 소실된 백암정을 청년회에서 복원을 했다고 돼 있는데, 실제는 1958년에 저희 아버님이 참여한 1902년생 갑장 모임에서 복원을 한 게 맞습니다. 당시 제가 아버지 지시로 직접 심부름도 많이 했습니다. 백암정이 다 지어졌을 때 제가 관리도 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강 회장이 내놓은 기왓장에는 단기 '4291년'(서기 1958년)이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복원을 청년회에서 했다고 하는데, 제가 알기로는 당시 청년회는 없었습니다. 아직 조직되기 전이죠. 그래서 현장에 확인을 하러 갔고, 현판도 찾았습니다.

백암정은 조선시대에 세워졌습니다. 퇴계 선생의 첫 부인이 가례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례에 자주 와서 낚시도 하고 주변에 계시던 남명 선생과도 교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가례라는 지명의 유래도 퇴계 선생과 연관돼 있습니다. 당시에 세워진 백암정이 사라지고, 1950년대 지역의 뜻있는 어른들이 복원에 나선 것이죠. 의령읍과 가례면에 거주하는 갑장 모임이 주도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다시 백암정을 복원해서 그 역사를 알리면 좋겠고, 또 의령군에서도 '곽재우 기념탑', '이병철 생가' 등을 연계한 관광상품으로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의령인들은 타고난 부지런꾼들"

-의령 분들의 기질이라고 해야 하나요? 특질이 있습니까?

"천성적으로 부지런해요. 또 매사에 적극적이에요. 그러다 보니 향우회도 마찰이 많이 생겨요. 하하. 너무 적극이니 서로 자기 의견이 옳다고 하죠.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이기도 하죠. 서울에서 정기 총회 하면 지금도 1000명 가깝게 모입니다."

-지금은 인구 수를 따지면 의령이 경남에서 규모가 제일 작죠.

"우리가 의령에 있을 때는 10만 명이 넘었는데 말이죠. 지금도 철도와 고속도로가 지나지 않는 곳이 의령입니다. 산골 아닌 산골이 되었죠. 산수가 유려하고 평야도 넓고 참 좋은 곳이죠. 특히 자굴산 덕으로 인물이 많이 난다고도 하죠. 또 숨은 인재와 재산가들도 많이 난 곳입니다."

강 회장은 인터뷰를 했던 다음날(12월 15일) 의령에 간다고 했다. 의령에 있는 '사랑의 집'과 '혜림학원'에 생필품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봉사활동을 꾸준하게 펼치고 있었다. 거기에다 역사에 남을 <60년사>를 발간했다. 백암정을 복원해 의령인들의 기상이 더욱 퍼져 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있었다.

자주 가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또 내일 고향을 찾는다는 생각 덕분인지,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 앉은 강 회장의 얼굴에는 은근한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