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참 빠르다. 엊그제 가을인가 싶었는데, 어느새 겨울이다. 병신년 새해가 다가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은 시위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흐른다. 흘러가는 세월을 잡을 순 없지만 옛 추억을 떠올려 볼 수는 있겠다. 시골에 갈 기회가 생기거나 혹 그만한 여유가 생기면 오랜만에 논두렁을 따라 걸어볼 일이다.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르면 두부나 파전에 막걸리 한잔을 나누는 것도 좋겠다. 지금부터 그 옛날 논두렁 밭두렁 뛰어다니며 놀던 옛 추억 속으로 살짝 스며들어가 보려한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수확이 마무리되면 논은 아이들 차지였다. 보리를 심지 않는 논은 동네 아이들 놀이터로 변한다. 지푸라기를 둘둘 말아 만들었던 공, 깡통 공, 돼지 오줌보로 만든 공이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다. 너덜너덜하더라도 바람이 들어간 공은 요즘 같으면 월드컵 공인구에 버금갈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논 가운데 짚단이라도 쌓여있으면 그곳은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훌륭한 놀이터가 되었다. 볏짚은 동네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재밌는 놀이 기구였다. 남자아이들은 짚단 들고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서로 쫓고 쫓기며 놀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TV에서 본 사극 흉내를 내기도 하고, 외국 드라마 '전투'를 흉내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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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어 놓은 볏단./윤병렬
사극에서는 짚단이 칼로 변하고, '전투'에서는 기관총으로 변신한다. 놀이가 지겨워질 때쯤이면 불놀이가 시작되기도 한다. 특히 논둑을 태울 때 짚단에 불 지펴 들고 뛰어다니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었던 듯하다. 자칫 불이 옮겨붙어 볏가리를 홀라당 태우는 불상사도 간혹 일어났다. 날이 어둑어둑 해지면 볏가리 속으로 굴을 파서 들어가기도 한다. 겨울바람을 막아주니 스르르 따스함이 밀려와 때론 잠이 들어 어둑어둑한 밤까지 짚단 안에 들어 있기도 했다.

볏짚을 놀이가 아닌 생활에 이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오래전부터 볏짚은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소중한 자원이었다. 소나 돼지, 염소 우리에 넣는 이불도 볏짚이었고, 초가지붕 이을 때, 메주 매달 때, 청국장 띄울 때도 볏짚이 활용되었다. 어릴 때 밤늦도록 새끼 꼬던 기억도 난다. 멍석이나 가마니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옛날에는 생활도구 대부분을 짚으로 만들고, 짚으로 덮고, 묶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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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기리./윤병렬
하지만 지금은 비닐이나 나일론 끈으로 대체되어 짚을 이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게 되었다. 요즘에는 볏짚 삼겹살, 볏짚 장어구이 같은 맛있는 먹거리 만드는 데도 이용되고 있다. 가장 많이 이용되는 곳은 조사료다. 조사료는 볏짚, 콩깍지 또는 사료용 생·건초로 만든 거친 사료를 말한다. 요즘 들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하얀 물체가 바로 소의 조사료로 이용되는 생 볏짚 곤포 사일리지(Silage)다.

어른들은 '공룡 알', 아이들은 '마시멜로'라 부르기도 한다. 흰 비닐로 싼 모습이 커다란 공룡 알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마시멜로처럼 보이기도 해서 그렇게 부른다. 가을 수확이 끝난 들판 논에는 어김없이 하얀 공룡 알이 줄지어 놓여 있다. 자동차로 도로를 달리다 보면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만드는 방법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곤포 사일리지 만드는 기계는 두 개다. 하나는 제법 빠르게 지나가면서 볏짚을 둘둘 말아 뭉쳐 놓는다. 다른 기계는 말아 놓은 볏짚을 통 속에서 곤포로 돌돌돌 동그랗게 말아 공룡이 알을 낳듯이 알 뭉치를 내놓는다. 두 기계는 형제처럼 항상 함께해야 작업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몇 사람 몫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다.

몇 년 전엔 대부분 하얀 공룡 알같이 보였는데 요즘엔 색깔이 여러 가지로 다양해졌다. 초록색, 검은색, 분홍색도 보인다. 생 볏짚을 기계로 말아 발효 첨가제를 넣은 뒤에 곤포라고 불리는 하얀 비닐로 싸서 시간을 두고 숙성시키면 질 좋은 조사료로 탈바꿈한다. 약 두 달 정도 발효 시키면 소들이 좋아하는 사일리지가 된다. 사일리지는 담근 먹이를 말하는데 소가 먹는 맛있는 김치가 되는 셈이다. 발효가 잘 되면 보존성도 높아지고 향미도 좋아 소의 섭취량이 늘어난다고 한다. 또 김치를 먹게 되니 소화력도 좋아지고 육질이 향상되어 축산 농가의 소득이 늘어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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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포 사일리지./윤병렬
곤포 사일리지 하나 무게는 최대 500kg 정도 된다. 옛날식으로 계산하면 논 한 마지기에서 생산되는 곤포 사일리지는 대략 2개, 값은 5만 원에서 6만 원 선이다. 소 한 마리가 일 년에 먹는 양은 여덟 개에서 열 개 정도다. 농촌진흥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우리나라보다 좀 이른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곡물로 만드는 사룟값이 턱 없이 비싸진 것이 등장 원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볏짚만 잘 활용해도 수입되는 조사료의 50% 이상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한다.

최근엔 곤포 사일리지로 팔려나가는 볏짚은 약 80%에 이른다. 국제 곡물 가격이 오르면서 배합사료 가격이 많이 오르고 덩달아 수입 건초 가격까지 오르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볏짚을 이용하면 사룟값을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축산 농가에서는 확보 경쟁까지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볏짚과 벼 이삭이 논에서 거의 사라지고 나면 겨울 철새들을 비롯한 야생동물들이 살아가기가 무척 힘들어진다. 들판에서 먹이를 구하는 새들은 생각보다 많다. 논에서 낟알 곡식을 찾아 먹는 대표적인 새들로는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가창오리, 큰기러기, 쇠기러기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두루미, 재두루미, 흑두루미도 논에서 낟알 곡식을 찾아 먹는다. 서산 천수만이나 해남 고천암호 같은 대규모 간척지에 새들이 많이 찾아오는 이유도 주변 농경지에 벼 이삭이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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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도 새들에게도 들판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먹거리 공급원이다. 지금이라도 새와 사람, 사람과 야생동물이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찾아보아야 한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새 뿐만 아니라 겨울을 나는 대부분의 야생 동물들은 먹이가 부족해진다. 멧돼지가 사람 사는 곳으로 내려와 피해를 주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먹이 부족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자연이 건강해야 사람도 건강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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