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예술과 마음을 새기는 서각가

나무에 끌려 오랫동안 나무를 깎으며 살아왔다는 김덕진(55) 작가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예총)가 선정한 제2회 한국문화예술명인 공예 부문에 명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올해 늘 그려왔던 첫 개인전을 열었고 가게를 운영하며 안정적으로 지내고 있는 그는 인터뷰를 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젊은 시절과 마산 수출자유지역 노동현장에서의 기억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직장 다니며 밤무대 공연, 주말에는 여행 가이드

김 작가는 밀양의 사명대사 표충비가 있는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말문을 텄다. 아홉 살 때 부모님 사업 때문에 마산으로 왔고 그 뒤에 대부분의 기억은 마산에서의 기억이다. 김 작가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남부러울 것 없이 평범했던 생활이 갑자기 흔들린다. 아버지가 하던 일에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는데 사업장에 인사사고가 났어요. 지금과 다르게 옛날에는 사업체에 보험 체계가 잘 안 잡혀 있었어요. 보상을 다 해주고 나니 남은 게 없었어요. 쉽게 말하자면 사업이 망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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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서각가./서정인 기자

추스를 틈도 없이 불행은 겹쳐 아버지는 김 작가가 17세 되던 해 돌아가시고 말았다. 장남이었던 그에게는 어린 동생들이 있었고 그는 스스로 가족을 책임져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만 18세에 취업을 했다.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있던 신흥화학이라는 신발 제조 업체였다.

"스프리스라는 브랜드숍에 들어가는 컨버스 신발을 우리가 만들었어요. 미국 컨버스라는 회사 신발을 OEM 방식으로 제조해서 국내에 공급하고 전국 스프리스 매장 개장을 총괄하고 대형 유통업체에 신발을 납품하는 일 같은 걸 했어요."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의 노동 강도는 엄청났다. 조금이라도 남는 시간이 있으면 피로에 눈이 먼저 감겼을 텐데 김 작가는 퇴근 후면 마산 창동에 있던 나이트클럽에 갔다. 밤이 되면 소위 말하는 '딴따라' 일을 했다.

"그때 수출자유지역 회사들이 잔업을 많이 했어요. 상업고등학교를 다니며 일과 공부를 함께 하던 학생들만 야근을 안 하고 마쳤는데 저는 그 친구들하고 같이 퇴근을 했죠. 잔업 안 한다고 회사 상사들한테 꾸중도 많이 들었어요."

김 작가는 드럼을 학원에서 전문적으로 배웠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드럼이 좋아 취미로 시작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드럼을 치며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80년도 즈음에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드럼을 쳤습니다. 마산 불종거리 코아양과, 희다방이 있던 그쪽에 나이트클럽이 있었어요. 그때는 나이트가 아니라 회관 이런 거였죠. 동생들이 전부 어렸거든요. 야간 무대에 안 다닐 수가 없었어요."

김 작가는 1년 반을 그렇게 생활했다. 그리고 어느 날 미련없이 드럼 스틱을 놓았다.

"유흥업소에 다니니까 어린 나이에 나쁜 걸 많이 보게 됐어요. 매일 술에 취한 사람들을 보고 사회의 어두운 면이 보이고…. 그래서 그만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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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서각가./서정인 기자

회사를 다니던 김 작가는 대학에 진학한다.

"회사가 일본인과 한국인이 주식을 반씩 투자해 만든 곳이라서 업무 때문에라도 일어를 배우면 좋겠더라고요. 그래서 일본어관광통역학과에 들어갔어요. 졸업할 때까지 주경야독을 했죠."

졸업 후 갖게 된 관광가이드 자격증을 그냥 둘 김 작가가 아니었다.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는 관광가이드 일을 하기도 했다. 그것 또한 가족을 위한 일이었을 테다.

혈기왕성했던 마산에 대한 기억

1979년 가을이었다. 김 작가는 통근버스를 타고 퇴근을 하던 길이었다. 마산 불종거리가 들끓고 있었다.

"퇴근하던 길이었는데 차창 밖을 보니 학생들을 경찰이 막고 그러더라고요. 당시에는 백골단도 있고 그랬거든요. 젊은 기운에 저도 거리로 나섰죠."

부마민주항쟁이었다. 김 작가는 그 길로 잡혀가 일주일간 구치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정치'라는 것이 맨몸에 와 닿았다. 구류가 끝나 풀려나면서 무력감을 느낀 동시에 언젠가는 나의 뜻도 펼쳐보리라는 마음을 먹는다. 이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노동자로서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80년대, 마산수출자유지역이 가장 번성했던 동시에 3만 5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인권은 생산성보다 아래로 치부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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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서각가 첫 개인전 사진./김덕진 제공

"청춘들이 공돌이, 공순이 소리 들어가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수출을 위해 젊음을 거기서 다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분규가 많이 일어났어요. TC전자, 수미다전기…. 저희 회사도 신발 만드는 공장이니까 먼지도 많이 나고 환경이 열악했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에는 수출노동조합연합회라는 조직에서 교육선전국장을 했고 그 후에는 한국노총 쪽으로 빠져서 활동을 했죠. 그런 일들을 하며 느낀 점이 어쩌면 인생에서 바탕이 된 것 같아요."

26세에 사내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을 했고 회사를 다닌 지 26년이 되던 해 김 작가는 회사를 그만둔다.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전체적으로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고 품고 있던 정치에 대한 뜻을 펼쳐보려는 마음에서였다.

"정치를 하려면 미리 필드를 좀 공부해야 하지 않겠냐는 주변의 말도 있고, 공단 전체가 하락세였기 때문이기도 했죠. 명예퇴직을 했어요. 그리고 나서 기업에서 비서실장으로 있다가 국회의원 인턴 비서도 했어요. 또 그전부터 민주산악회 마산지부 회원으로 있으면서 정당생활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죠. 지금은 새누리당 경남도당 대외 협력 위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도와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시기도 맞아야 되는데… 아쉽게도 그때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못했어요."

죽은 나무가 살아나는 듯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전통각자조형화 분야 한국예술문화명인이다. 그는 나무를 깎아온 지 18년이 넘었다. 본격적으로 작가라는 마음을 가지고 조각칼을 쥔 건 명예퇴직 후. 서각과 관련이 있는 서예 등의 다른 분야를 취미로 했던 것도 아니라 그저 나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나무는 말이 없잖아요. 서각을 접했을 때 죽은 나무가 살아나는 것 같았어요. 글도 새기고 그림도 새기니까 잘린 나무도 아주 훌륭한 작품이 되더라고요."

서각은 나무를 기본으로 기왓장, 뿔 등 새김질을 할 수 있는 재료에 끌, 조각도, 망치 등으로 글이나 그림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흔히 시(詩), 서(書), 화(畵)를 아우르는 입체조형예술이라 불리기도 한다. 김 작가는 서각원에서 정식으로 6개월 과정을 수료해 서각 기초를 닦았고 그 후로는 배움이 필요하다 느낄 때마다 함양, 거창 등 각지로 스승을 찾아다녔다. 김 작가에게 서각은 작품이기 이전에 끌로 끌고 칼로 파내는 행위 자체가 주는 의미도 있는 듯했다.

"개인적인 불교 신앙심에 의한 것 같긴 한데 '각'을 시작하는 나무에다가 소주를 세 번 뿌리고 그다음 소금을 세 번 뿌려요. 그 이유는 내 앞에 있는 이 나무가 수입산이든 국산이든 예전에는 도로 만들거나 개발을 할 때 나무를 함부로 벴잖아요. 그런 응어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금과 소주를 뿌리고 하루를 재웠다가 청결한 마음으로 각을 하려고 해요. 지극히 개인적으로 마음을 담는 거죠. 그렇게 공들인 나무가 가훈이나 사훈, 좋은 글을 담아 가정집, 관공서, 기업체에 가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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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서각가 첫 개인전 사진./김덕진 제공

서각 작업에 대해 설명을 부탁했다.

"직접 서예를 해서 작업하기도 하고 다른 선생님들의 좋은 글을 받아서 새기기도 해요. 좋은 문구, 글귀가 정해졌다면 나무가 필요하죠. 서각에 좋은 나무로 저는 느티나무를 꼽습니다. 느티나무 자체가 건강, 무병장수를 뜻하기도 하거든요. 느티나무에 글을 붙이거나 먹지로 글을 베낀 후에 칼과 망치 등을 이용해서 양각이나 음각, 여러 가지 기법으로 파내는 거죠. 후에 색을 칠하거나 여러 후가공으로 작품을 더 돋보이게 마무리하죠."

수없이 망치질을 하며 찍히고 베었을 손의 흉터들이 눈에 띄었다. 눈에 편하지 않은 노란 나무 속살을 몇 시간씩 들여다보고 있으면서 시력도 많이 안 좋아졌다고 했다.

지난 10월 김 작가는 첫 개인전을 치렀다.

"개인전은 원래 지천명(知天命) 나이인 50세에 하고 싶었었어요. 그런데 개인적인 문제도 있고 정당 활동 등을 하면서 겨를이 없었어요. 온전히 서각에 마음을 쏟지 못하면 서각 하다 나무가 깨집니다. 그래서 5년을 늦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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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서각가 작품 사진./김덕진 제공

서각 작업은 북면에서 한다고 했다.

"원로 선배분이 하우스를 지었는데 그곳에서 몇 명이 같이 작업을 하고 있어요. 매일 가지는 않는데 작업할 게 있거나 전시회 준비를 할 때 거기서 작업을 합니다."

김 작가는 서각 얘기 틈틈이 가훈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자신의 서각이 가훈을 보급하는 역할도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서각 주문을 많이 받는데 의뢰인이 이 문구를 새겨달라고 한다고 해서 그냥 바로 해주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과 글귀가 서로 맞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해요. 되도록 저는 가훈을 권장해요. 저도 가훈이 있어요. '적선지가(積善之家)이면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이웃이 도와준다는 뜻이에요. 요즘 젊은 부부들이 가훈이 없어요. 되도록 가훈을 지으라고 권유하거나 좋은 글을 받아다 주기도 하죠. 저는 가훈을 보급을 하려고 합니다."

선짓국 유명한 도계포차 주인되다

김 작가는 아내, 여동생과 함께 창원시 도계시장에서 도계포차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직장을 퇴직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아내의 벌이, 작품 활동과 병행한 다른 부업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다. 도계포차는 인근에서 꽤 알려진 곳이었다. 그가 이 가게를 맡아 하기 시작한 것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일이다. 김 작가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가게의 20년 단골손님이었다.

"이전 주인이 25년 정도 도계포차를 했었어요. 무허가 장사라고 단속을 하니까 가게를 내서 이곳 도계시장에 오신거죠. 그러다 이 가게를 우연한 기회에 저희가 인수하게 되었어요. 도계포차는 예전부터 선짓국이 유명했었어요. 메뉴나 기본적인 것을 그대로 전수받았고 전 주인분의 선짓국 노하우에 저희 노하우를 더했죠. 손님들이 선짓국을 많이 찾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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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서각가 작품 사진./김덕진 제공

김 작가는 지금의 삶을 이어나가며 잠시 접었었던 마음을 다시 펼쳐 보이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특히 문화예술인으로서 예술인에게 필요한 실질적인 정책을 고심하는 정치인을 꿈꾼다 했다.

"나라가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꼭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단 다가오는 12월에 창원미협 지부장 선거에 출마를 하려고 해요. 지부장이라는 직책은 그 단체에 대표성을 지닌 사람이어야 하잖아요. 상대 후보도 같은 예술인이지만 저는 현장직부터 시작한 노동자 생활, 민주화 시위와 정당정치를 해본 경험. 거기에 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살려 잘할 수 있으리란 자신이 있습니다. 더 나가서 지부장이든 시의원이든 어떤 자리에서든 기회가 생긴다면 열심히 해야죠."

김 작가는 돌이켜보면 내면에서 풀지 못한 것들을 서각으로 많이 풀었다고 했다. 탁탁 하염없이 망치를 두드린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단련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어떨 때는 밤을 새우면서 했어요. 하다가 중단을 해버리면 마음이 훅 내려앉을 때가 있어요. 갑자기 어디서부터 다시 해야 할지 멍해지죠. 그래서 서각 할 때 되도록 한 글자를 시작하면 그 글자는 끝까지 해요. 나무를 팔 때도 잡생각을 안 해야 하는데 좋은 일 나쁜 일, 가족, 대외 일을 생각나면 망치가 급해지거든요. 그럼 망치를 던져보기도 하고 그랬죠."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나무를 파듯 성의를 다해 걸어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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