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를 소개합니다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뜨거운 햇빛, 푸른 하늘, 낯선 새의 울음소리, 짙게 푸르던 나무들, 눈을 따갑게 하던 모래바람…. 불과 일주일 전 태국 북부의 도시 '치앙마이'에서 실제로 마주했던 풍경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영화 <수영장>(2009년 작)은 치앙마이의 한 게스트하우스가 배경이다. 4년 전 가족들을 훌쩍 떠나 혼자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고 있는 쿄코(고바야시 사토미). 그녀는 게스트하우스 일을 돕는 이치오(카세 료),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게스트하우스 주인 키쿠코(모타이 마사코), 태국 소년 비이(시티차이 콩필라)와 함께 지낸다. 그런 쿄코를 만나기 위해 치앙마이를 방문한 딸 사요코.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가족까지 버리고 타국으로 가버린 엄마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쿄코가 엄마 없는 소년 비이를 돌보는 것도 그녀를 서운하게 만드는 건 마찬가지. 하지만 쿄코는 사요코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지도, 자신을 이해해달라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사요코가 치앙마이를 떠나며 이야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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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는 느리고 온화한 곳이었다. 가게들은 대부분 오후 5시면 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인장 마음대로 툭하면 쉬었다. 관광객에게 '바가지'는 거의 없었다. 길에 있는 개나 고양이는 사람을 보고 도망가지 않았다. 창문에 도마뱀이 붙어있는 경우가 허다했고 길을 걷다 들소나 거위를 보는 일도 많았다.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면 수줍게 미소지었다.

그곳에서 나는 바쁠 이유가 없었다. 그곳의 속도대로 먹고 걷고 빈둥거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디는 꼭 가봐야지' 하는 마음 자체가 생기지 않았다.

여행을 다녀온 후 이 영화를 봤다, 치앙마이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라 그래서. 이 영화는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카모메식당>(2006년 작) 류 영화다. 기승전결 확실한 서사도, 인물 간 첨예한 갈등도 없다. 누군가는 이런 종류의 일본 영화를 두고 '재미없다' '지루하다' 말하고, 누군가는 '힐링 된다' '따뜻하다'고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난 전자에 가까운 편이었는데 오랜만에 본 '이런 종류' 영화에서 후자의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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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치앙마이를 꼭 닮았다. 느리면서 온화하게,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 쿄코와 사요코의 관계만 봐도 그렇다. 둘은 4년 만에 만나지만 싸우고 울고불고하지 않는다. 잠깐 사요코가 쿄코에게 서운함을 털어놓기도 하지만 딱 거기까지. 하지만 며칠을 함께 지낸 둘은 처음보다는 서로가 편해진 모습으로 헤어진다.

무게 잡지 않는 미덕도 있다. 삶과 가족의 의미를 들여다보면서도 "살아가는 데 우연이란 없어. 매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해가는 거야" "사람과 사람이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닐 거야"라고 스쳐가듯 말할 뿐. 또 때론 소박한 일상, 이국적인 풍경, 먹음직스러운 음식에 집중하며 '영화를 본다고 꼭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나요. 여행 온 듯 그냥 즐겨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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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특별하게 다가온 건 촬영지 때문이었다. '반 롬 사이(Ban rom sai)' 태국어로 오디나무 그늘의 집을 뜻하는 이곳은 HIV(인체 면역 결핍 바이러스로 에이즈를 일으키는 원인 바이러스)로 부모를 잃고 자신 또한 HIV에 감염된 태국 아이들의 보금자리로 출발했다. 1999년 설립된 후 유아용 항바이러스 약물이 개발되지 않아 3년 새 10명의 아이가 에이즈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2012년부터는 HIV에 감염되지 않은, 여러 이유로 고아가 된 아이들의 생활·자활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반 롬 사이는 <수영장>의 배경이 된 게스트하우스 '호시하나 빌리지'를 운영하기도 한다. 물론 운영 수익금은 이곳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위해 쓰인다.

치앙마이에서 열심히 쉰 덕분인지 긴 새벽 비행에도 몸은 피곤하지 않았다. 귀국한 다음 날 바로 출근했고 언제 여행을 다녀왔냐는 듯 일을 했다. 그런데 좀처럼 마음이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느리고 온화한 마음을 가진 그 도시에서.

아무래도 조만간 또 떠나지 싶다. 다음번엔 물론 이 영화의 배경이 된 호시하나 빌리지에서 묵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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