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YB, 가을 우체국 앞에서

가을이 오면 나도 몰래 흥얼거리며 부르는 노래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노란 은행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가을 끝자락을 장식하는 단풍 중에서 유난히 샛노란 단풍이 바로 은행나무 단풍이다. 은행잎 책갈피. 첫사랑의 추억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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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은행나무.

은행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 시대부터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부터 사용한 것이다. 한자 은행(銀杏)은 은빛 살구를 뜻한다. 열매 모양이 작은 살구랑 닮았고, 속에 있는 알이 하얗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은행 열매는 폐 기능 개선, 천식, 야뇨증 치료, 피로 회복에도 좋은데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다. 은행잎의 징코라이드 성분은 말초 혈관 장애를 개선해서 치매 예방 효과도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압각수란 이름으로도 불린다. 잎이 오리발에 있는 물갈퀴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열매가 손자 대에 열린다는 뜻으로 공손수로도 불린다. 공작 벼슬을 가진 자가 씨앗을 뿌리면 손자 대에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서양 사람들은 끝이 갈라져 있는 은행잎을 처녀 머리 모양에 비유해서 '아가씨의 머리나무'란 이름으로 부른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은행나무 잎 모양을 닮은 머리 모양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원산지는 중국 절강성에 위치한 천목산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삼국 시대쯤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불교, 유교와 관련된 유적지에서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봐서 한반도에 유교와 불교가 전해진 시기에 심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다른 나무다. 어린나무는 암수 구분이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수나무는 암나무보다 진한 색깔이며 가지가 하늘을 향해 쭉 뻗은 모양이고 암그루는 양옆으로 벌린 듯한 모양이라고 알려져 있다. 씨앗으로도 암수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하는데 끝이 세모나고 뾰족한 것은 수컷 종자, 둥그스름한 모양은 암컷 종자라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2011년 6월 산림과학원이 수나무에만 있는 'SCAR-GBM'이란 유전자를 발견한 이후부터 1년 이하의 묘목도 암수 구별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수령이 오래된 큰 나무들은 대부분 암나무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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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은행나무(겨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면서 키도 가장 큰 용문사 은행나무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짚고 가던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싹이 터 자란 것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경북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는 보조국사 지눌의 지팡이란 전설도 있다. 실제로 은행나무는 꺾꽂이로 번식이 가능하고 거꾸로 심어도 살아난다고 한다. 주된 번식 방법은 가을에 열매를 따서 겉껍질을 벗기고 열흘 정도 음지에서 말린 후에 땅에 묻어 놓았다가 다음 해 봄에 심는 것이 좋다. 열매에서 냄새가 나는 것만 빼면 옮겨 심어도 잘 자라고 공해에도 강해서 가로수로 인기가 높다.

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으로도 부른다. 은행나무가 번성한 시기는 중생대였다. 지금부터 약 2억 2500만 년 전부터 약 6500만 년 전까지 1억 6000만 년간 번성했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나무들도 대략 500년에서 1000년 정도 산 나무들이 꽤 많다. 용문사 은행나무가 제일 오래된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무려 1100살이나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해마다 600자루나 되는 은행 열매를 맺고 있다고 하니 신비롭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것 같다.

경남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는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 있다. 높이 27m, 둘레 9.3m에 동서 21.5m, 남북 18.3m에 달한다. 수령은 약 900년 정도다. 고려 시대에 은열공 강민첨 장군이 15세까지 진주향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선조의 사적지가 있는 두양리에 와서 은행나무를 심고, 무술을 연마하며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산 중턱에 우람하게 서 있는 모습이 장군의 기상을 닮았다. 함양군 서하면 운곡리에도 약 800년 정도 된 은행나무가 마을 한복판에 우뚝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406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운곡리 은행마을이 생기면서 심은 나무로 마을 이름도 은행정 또는 은행마을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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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옥종면 청룡리 은행나무.
나무 앞을 지날 때 예를 갖추지 않으면 그 집안과 마을에 재앙이 찾아든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마을 사람들이 은행나무를 베려고 한 이후부터 밤마다 상여소리가 나는 등 마을에 흉사가 그치지 않아 나무에 당제를 지낸 뒤부터는 평화가 찾아왔다고 한다.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도 아주 아름다운 은행나무가 있다. 의령 세간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4.5m, 둘레 9.1m이다. 마을 가운데 있으며, 마을 옆에서 자라는 현고수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로 믿어지고 있다. 특히 남쪽 가지에서 자란 두 개의 짧은 가지(돌기)가 여인의 젖꼭지같이 생겼다고 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들이 찾아와 정성 들여 빌면 효력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은행나무에 전해지고 있다.

조금 멀리 발길을 돌리면 강원도 홍천 은행나무숲이 유명하다.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던 아내를 위해 약수를 받으러 드나들던 서울 사람이 강원도 내린천 자락 풍광에 매료돼 땅을 사서 은행나무를 심었다는데 30여 년 전의 일이다. 은행나무를 심었던 남편은 어느새 칠순의 할아버지가 되었고 지금은 30년이 넘은 은행나무 2,000그루가 장관을 이루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개방 기간은 20일이고 방문객은 1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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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단풍.

예부터 사람들은 은행나무에 사랑의 의미를 크게 부여했다.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어서 더욱 그랬던 모양이다. 멀리서라도 서로 바라보며 사랑을 싹 틔우고 열매까지 맺는 멋진 사랑 나무. 첫사랑에게 책갈피로 전해 주었던 노란 은행잎. 지금도 간직하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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