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유명세를 올리며 전도양양하던 성악가를 일순간 무너뜨린 노래가 있었다.

올림픽의 열기가 뜨거웠던 1988년, 가수 이동원은 노랫말을 찾기 위해 서울 신촌의 한 서점을 방문한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사회과학 전문서점인 '오늘의 책'인데, 당시 그 서점은 이념서적 판매로 대학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서점 구석에서 먼지에 쌓인 시집 한 권을 찾아내어 읽다가 그 길로 여의도에 사는 작곡가 김희갑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의 손에는 <정지용 시집>이 굳게 쥐어져 있었고, 한껏 상기된 모습이었다. 그토록 가수 이동원의 가슴을 뒤흔들었던 시는 바로 시인 정지용의 '향수'였다. 오늘날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고향 그리기의 대명사인 '향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인 정지용(1902~1950)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향수'는 1922년 휘문고보 재학시절 교지 <요람>에 처음 실렸고, 1927년 <조선지광>을 통하여 일반에 발표했다. 유년기를 보냈던 고향, 충북 옥천군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들과 모습을 마치 풍경화를 그린 것처럼 섬세하고 선명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 시는, 각 연의 후렴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고향에 대한 예찬과 향수를 생생하게 각인시켜주며 운율감마저 더하고 있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이미지를 중시하면서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한국 서정시의 새 지평을 연 시인으로 평가받았던 정지용은 납북 문인이라는 이념 잣대의 굴레 속에 감금되어 한국문학사에서 외면당하였지만 1988년 해금이 되었고 이후 재조명 받으며 유명해졌다. 정지용의 시 '향수'는 여러 차례 노래로 만들기 위한 시도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보성 벌교 출신의 유명한 작곡가 채동선이 처음으로 이 시에 곡을 붙였고, 이어 작곡가 변훈, 강준일 등이 다투어 곡을 만들었으나 노래 부르기가 너무 어려워 가곡 '향수'는 대중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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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작곡가를 만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시 '향수'에 빠져있던 가수 이동원은 김희갑에게 곡을 만들어 달라고 막무가내 매달렸다. 그러나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등 그 당시 최고의 인기 작곡가였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다. 시의 운율이 곡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억지로 곡을 붙인다 할 지라도 오히려 시의 의미를 다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이동원은 고집스레 설득하였고, 마침내 1년 동안 고심한 끝에 이듬해인 1989년 초 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동원은 저명한 성악가이자 국립오페라단의 가수였던 박인수 서울대 교수에게 노래를 같이 부르자고 제의한다. 아마 팝 가수인 존 덴버와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Perhaps Love'를 불러 히트치자, 우리나라에서도 가요와 클래식을 접목한 크로스오버 음악을 시도하고자 하는 열망이 대단하였으리라 짐작된다.

평상 시 이동원의 '이별노래'를 좋아했던 박인수 교수는 앨범작업을 흔쾌히 수락하였고, 듀엣으로 함께 부르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노래 '향수'가 국민가요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자 성악가 박인수는 뜻하지 않은 곤혹스러운 상황에 내몰린다. 그 시절까지만 해도 성악가가 공식적으로 대중가요를 부른다는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었다. 정통음악 소위 클래식음악을 하는 이들은 대중음악을 상당히 저급하게 생각하는 우월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인지라, 처음으로 시도된 크로스오버 음악은 그야말로 획기적이었으며 세간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요즘 같았으면 대중적으로 호응받는 장르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때는 혹독한 시련으로 다가왔다.

결국 국립오페라단에서 그에게 암암리에 부담을 주자, 박인수 교수는 "클래식음악이 대중음악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떤 선입관이나 장르의 구분 없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며 순순히 제명을 받아들였다. 국립오페라단에서 해임되는 자리에서도 "다른 대중가요라면 몰라도 그것이 정지용의 '향수'라면 그 어떤 반대급부도 오히려 영광"이라고 당당히 선언하자, 한동안 순수음악계는 '타도 박인수'를 외치며 호도하기도 했다.

그날 이후 이동원과 박인수가 부른 '향수'는 대중들의 더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최고의 명곡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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