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함께 우울이 찾아왔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런 때는 나만의 은둔생활을 하며 최소한의 일상만 유지한다. 휴일엔 집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다.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천장 벽지 무늬를 보기도 한다. 훌쩍 혼자 여행을 가기도 한다. 술은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는다. 취하면 공허함만 괜히 커지니까. 그리고 이 영화를 본다.

영화〈멜랑콜리아(Melancholia)〉는 인간의 내·외부를 망가뜨리는 '멜랑콜리(Melancholy)'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자매인 저스틴과 클레어다. 1부는 동생 저스틴의 결혼식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인간 내부의 '멜랑콜리(인간의 감정 중 우울, 비애를 뜻하는 말)'를 비춘다. 고질적인 우울증을 겪는 저스틴은 결혼을 앞둔 신부지만 결혼식 내내 마음이 편치 않다. 바람둥이인 아버지와 시니컬한 어머니, 너무 착하기만 한 예비 신랑 마이클…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결국 저스틴을 결혼식을 망치고 마이클과도 파혼한다. 2부는 지구에 다가오는 행성 '멜랑콜리'에 대한 이야기다. 행성 멜랑콜리 때문에 클레어는 불안하다. 남편 존은 멜랑콜리가 지구를 비켜 지나갈 것이라며 안심시키지만 클레어의 불안은 쉬 가시지 않는다. 클레어와 반대로 저스틴은 점차 회복된다. 이제 곧 모든 것 즉 자신을 괴롭히던 우울도, 이 세계도 끝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저스틴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행성이 지구에 가장 근접할 것이라 과학자들이 예측한 밤, 행성 멜랑콜리는 지구에 부딪히지 않고 멀어진다. 다음 날 클레어가 안심하며 낮잠을 자는 사이 남편 존은 자살한다. 천체망원경을 들여다 본 직후의 일이다. 멜랑콜리는 지구를 향해 다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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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사라지고 암흑만 남는, 이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묵시록에 마음을 뺏기는 건 우리 내면에서 출렁이는 멜랑콜리 때문일 것이다. 우린 옅은 혹은 짙은 각자의 멜랑콜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 사회는 행복만 가르치는 태양의 세계다. 웃음, 성공…. 모든 기준은 거기에 있다. 그래서 억지로 작은 방과 침대를 벗어나 깔끔한 옷과 미소를 장착하고 태양의 세계로 나선다. 공부를 하고 열심히 돈을 벌고 착한 자식 노릇을 하고 좋은 집과 차를 사기 위해 노력을 한다. 영화 속 멜랑콜리가 태양 뒤에 숨어있던 행성이었듯 이 세계 뒤엔 멜랑콜리가 있다. 태양의 세계에서 멜랑콜리는 어떻게든 지워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의욕도 들지 않는데 우울과 슬픔을 감추고 가짜 미소를 지어야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세상 혹은 타인과 나 사이 거리만 절감하게 되고 알게 모르게 상처도 받게 된다. 때론 스스로가 지긋지긋해진다. 그래서 기꺼이 우울증 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 그렇게 감추고 숨기고 지우려던 멜랑콜리는 불현듯 태양의 세계를 향해 돌진한다.

물론 치료받아야 할 병적인 우울증까지 내버려두자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가 지나치게 행복을 강조한 나머지 어둠, 우울함, 슬픔을 깡그리 지우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자는 거다.

이 영화의 감독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이하 라스)는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다. 바그너의 서곡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흐르는 가운데 존 밀레이의 회화 '오필리아' 이미지가 겹치는 이 영화의 시작은 죽음과 우울을 표현한 영화의 미장센 중 가장 회화적으로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건 분명 우울증을 오래 앓은 라스만이 만들 수 있는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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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외에도 멜랑콜리한 기질을 가진 예술가는 수도 없이 많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베토벤, 고야, 반 고흐, 미켈란젤로, F. 피츠제럴드, 헨델, 폴 고갱, 슈만, 차이코프스키, 톨스토이, 버지니아 울프, 프란츠 카프카, 윌리엄 포크너, 존 레넌…. 예술가가 아닌 이들도 있다. 링컨, 윈스터 처칠, 마틴 루터 킹, 나이팅게일, 뉴턴, 나폴레옹, 프로이트….

자신이 가진 우울한 기질을 너무 외면하지 말자. 응시하고 때론 한껏 취해도 보자.

영국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의 말이다. "멜랑콜리는 실로 두려운 선물이다. 그것이야말로 멀리서 바라본 삶의 진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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