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풀고 함께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삶"

※아너소사이아티(Honor Society)는 나눔문화를 실천하려는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입니다.

"청소년기만 해도 나는 발음장애로 고통이 심했다. 남달리 긴 혀 탓에 발음이 불분명해 남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어쩌다 국어 시간에 일어서서 책을 읽을 때면 땀을 뻘뻘 흘려야 했고 그때마다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불확실한 발음 탓에 말을 더듬어야 했으며,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포기해야 했고, 남들처럼 당당히 군대에 가고 싶었어도 어릴 적 다친 눈 탓에 군 면제를 받아야 했던 불운했던 한 남자. 신대양㈜ 박종춘(52) 대표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이제 누구보다 당당하게 세상을 살고 있다. 지난 1월 8일에는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 기부를 약정, 48번째 경남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콤플렉스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드러내기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박종춘 대표. 인터뷰를 통해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힘겨웠던 과거와 나눔을 통해 함께 사는 삶, 나아가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그를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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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춘 신대양㈜ 대표./유은상 기자

아픔까지도 그리운 추억

박 대표는 올해 우리 나이로 쉰네 살이다. 산청군 차황면 황매산 아래 마을에서 4형제의 둘째로 태어났지만 박 대표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때 창원시 진해구 웅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가난 때문이었다.

"논 5마지기가 전부였는데 할머니까지 7명이 먹고살기는 어렵죠. 그래서 바닷가에 와서 조개나 고기를 잡으면 먹고살기가 낫지 않을까 해서 아버지께서 이사를 결정한 것 같아요. 이곳에 와서 두부를 만들어 팔았는데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의외로 괜찮았어요. 그런데 두부 생산허가권을 얻고 기업형태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아버지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합니다. 몇 년 만에 다시 원위치가 된 거죠."

이후 박 대표 어머니가 시장에 나가 콩국·어묵 노점을 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게 된다.

"다 쓰러져가는 방 두 칸 초가집에서 할머니를 비롯해 7명이 살았는데…. 아이고 콧구멍만한 방에 고구마, 메주 등을 놓으면 좁아서 몸부림도 못 칠 정도였죠. 외풍은 얼마나 세던지. 어린 나이에 어머니 노점상 하는 게 창피해서 집에 있는 물건을 시장에 가져다주라고 시키면 친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둘러서 다녔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잖아요. 전교생이 212명이었는데 저를 포함해 한 10명이 못 갔어요. 돈이 없어서. 교정을 나서는 수학여행 버스를 먼발치서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기억이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어요."

침묵이 이어졌고 박 대표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리고는 "물이나 한 잔 마시고 하죠"라며 자리를 떴다.

잠시 후 돌아온 그는 "물론 그 어린 나이에 큰 상처였죠. 하지만 이제는 다 치유되고 그를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죠"라며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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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춘 신대양㈜ 대표./유은상 기자

"그 시절 어머니는 항상 '없는 집에서 성공하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 남의 집 살이를 해도 기술이 있어야 천대받지 않는다'는 말을 가훈처럼 틈만 나면 말씀하셨어요. 저 역시 웅동시장 노점에 비바람 맞으며 웅크리고 않아 콩국을 팔던 어머니의 지친 모습, 그 속에서 모정의 강인함과 희생을 보며 어린 나이에 '기술을 배우고 사업을 해서 많은 돈을 벌고 꼭 성공하겠다'는 마음을 다졌어요."

그는 어머니의 말처럼 기술을 배우고자 마산공업고등학교 섬유학과로 진학하게 된다.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를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주저하는 사람에겐 기회는 없다

그가 섬유학과에 진학한 이유는 당시 한일합섬을 비롯해 마산에 많은 섬유 공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망업종이자 취업이 잘되는 분야였다. 하지만 그가 졸업을 할 즈음 석유파동이 발생, 원유 추출물을 생산 주원료로 사용하는 섬유업계 또한 타격을 받게 되고 당연히 취업문 역시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졸업할 때쯤 석유파동 영향으로 주변에 취업하는 친구들이 많지 않았어요. 겨우 취업한 친구들도 회사 사정이 어렵다 보니 근무환경이나 조건이 열악해졌고요. 그런데 고압가스 자격증을 따서 관련업계에 취직한 친구가 대졸자 공채와 맞먹을 정도로 월급을 많이 받는다고 자랑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결정을 하고 학원에 다녔죠."

고등학교 3학년 10월께 그는 학원을 등록해 1년 동안 머리띠를 매고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그 결과 당시 자신이 다닌 학원에서는 처음으로 최단기간 고압가스 기계기능사, 고압가스 화학기능사, 고압가스 냉동기능사 등 3개의 자격증을 따게 된다.

자격증을 딴 그는 가스충전소, 당면공장, 제빙회사 등에서 가스기기와 냉동기기 안전관리자로 일을 하면서 기술과 노하우를 배워나가게 된다. 그리고는 1985년 3월 그의 나이 24살에 창원시 진해구 웅동에 '웅동가스상사'라는 작은 회사를 차리고 사업을 시작한다.

"자격증이 있어서 회사를 그만둘 당시에는 친구들보다 월급을 두 배 정도 많이 받았어요. 월급 1년치 300만 원을 모아서 회사를 차렸죠. 회사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가스 배달하는 조그마한 가게라고 보면 되죠. 그런데 운 때가 맞아떨어지니 돈이 그냥 수북수북 모이더라고요. 당시가 석유곤로나 장작을 때서 밥을 하다가 가스레인지로 바꾸는 시기였고요. 또 진해 용원을 비롯해 웅동 주변이 개발, 확장하던 시기라 엄청 바빴습니다. 허허."

가스배달업이 대체로 그렇지만 특히 그는 밀려드는 주문에 설과 추석 이틀을 제외하고는 쉬는 날이 없었다.

"처음에는 혼자서 배달하고 부모님이 전화 주문 받아주는 정도였는 데 나중에는 직원이 늘어났죠. 새벽 5시에 '아들 밥 먹여 학교 보내야 하는데 가스가 떨어졌다'고 전화 오고 밤 11시에 '제사 준비하는데 가스가 떨어져 제사를 못 지낼 판이다'고 전화 오는데 처음에는 그것도 고마웠죠. 가덕도까지도 배달을 했어요. 그런데 5~6년 쉼 없이 일하다 보니 지치더라고요. 제가 기계가 아니니 건강도 안 좋아지고 그래서 산업용 가스로 사업을 확장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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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춘 신대양㈜ 대표./유은상 기자

위기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1991년 그는 '대양산소공업'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공장에서 용접 등에 사용하는 산소, 질소, 아르곤을 공급하게 된다.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가스배달 가게를 매각하고 기업체에 가스를 공급하는 회사를 차렸습니다. 당시에 마천에 주물단지가 들어오는 시기였거든요. 그래서 큰 마음을 먹고 결정했어요."

시의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한 5억 원 정도면 되겠다는 생각에 시작을 했죠. 그런데 생각보다 사업이 빨리 정착되지 않았어요. 한 10억 원은 있어야 가능한 거더라고요. 직원들 월급날은 꼬박꼬박 돌아오는데 사업 확장세는 더뎠어요. 그러니 차입을 해서 운영을 해야 하는데 주변에 빌릴만한 데는 이미 다 빌려 더 대출할 데는 없고…. 쉽게 말해서 '멘붕'에 빠진 거죠. 당시에는 대부분 가족, 지인들이 보증을 서서 대출을 받았죠. 그러니 제가 무너지면 가족은 물론 제 주변 사람들이 다 망하는 거잖아요. 직원들은 당연히 일자리를 잃는 거고…. 회사가 망하면 열정을 바쳤던 제 20대가 몽땅 휴짓조각이 되는 거고요. 100만 원이라도 어음을 못 막으면 부도가 나잖아요. 그러니 가족과 지인들 보증 세워 대출하고, 어머니에게 사채를 빌려달라고 부탁도 하고…. 내일 두 시까지 돈을 못 구하면 부도가 나는데 밤을 새워도 대책은 없고, 해가 뜨자마자 채권자들 전화가 빗발치고 전화벨은 바로 송곳이 돼서 가슴을 찌르죠. 시계 초침 가는 소리는 심장을 조여오고….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은 기억입니다. 그러니 목숨 걸고 뛰었죠. 낮에는 영업 확장하러 다니고 밤에는 돈 빌리러 다니고…. 허허. 3~4년을 그렇게 미친 듯이 일하니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더라고요."

이후 사업은 마천주물공단 확장과 함께 순풍에 돛을 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IMF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파고가 그를 덮쳤다.

"가스공급사업은 잘됐어요. 그래서 또 다른 사업을 구상했죠. 당시 마산, 창원에는 폐차장이 있었지만 진해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이거다 하고 사업을 추진해서 설립공사를 하는 중에 딱 IMF 외환위기가 찾아온 거죠. 대출을 해서 폐차장을 했는데 자금압박을 받게 됐어요. 대양산소공업도 주거래업체인 조선업이 타격을 받으면서 매출이 절반으로 줄었고요. 다시 부도 위기가 찾아온 거죠. 생각하려니 진절머리가 납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또 다시 죽을 둥 살 둥 뛰고 방법을 모색하다 보니 어느 순간 위기가 지나가더라고요."

오뚝이처럼 일어난 그의 사업은 다시 조선경기 활황과 더불어 번창하게 된다. 2007년에는 회사명을 신대양(주)으로 바꾼다. 혼자서 시작했던 사업은 이제 30명의 직원이 함께 힘을 보태고 있으며 지난해 매출 150억 원 규모로 성장했다. 이제는 공업용 가스뿐 아니라 의료용은 물론 수십 종의 특수가스도 공급하고 있다. 박 대표는 가스공급 사업 외에도 주유소, 골프연습장, 신항만개발주식회사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정일가스텍'이라는 이름으로 신항 내 작업 크레인과 화물 운송차량에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고이 접어 두었던 꿈

사업이 활기를 찾으면서 박 대표는 가슴 속에 고이 접어 두었던 '꿈'을 끄집어 낸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2000년 그는 마흔하나의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진해청년회의소 회장을 지내면서 자극이 됐죠. 사회단체장 활동을 하고 또 사람들을 만나고 사업을 하면서 고졸학력만으로는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창 젊은 시절 못다 이룬 꿈이기도 했고…. 그래서 창원문성대 야간 산업체 특별과정에 들어갔죠. 그런데 밤에만 왔다갔다하니 학교를 다니는지 학원에 다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창원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으로 다시 편입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죠.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젊은 동기들과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허허. 가급적 오전에는 회사일 보고 수업은 일주일에 3일 정도 오후에 몰아서 잡아서 들었어요."

뒤늦은 공부, 하지만 속도만은 늦지 않았다. 박 대표는 창원대를 졸업하고서 경남대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2011년 같은 대학원에서 <공공기관의 내부지배구조가 경영효율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회사일을 챙기면서도 불과 10년 만에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것이다.

착한 기업을 소망하며

그는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사회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가 가입해서 활동했던 단체만 해도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중 팔각회, 계광장학회, 청년회의소, 진해체육장학회, 라이온스클럽, 디딤돌봉사회, 바르게살기협의회 등이 대표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메세나 사업에도 관심을 두고 매년 2000만 원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그동안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는 도지사표창은 물론 여성가족부장관상, 대통령표창까지 받았다.

그는 봉사와 나눔의 정신을 기업 운영에도 그대로 반영하려 노력하고 있다.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기업인이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회장입니다. 이윤추구는 기업 성장의 필수조건임에도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가 될 수 없다며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죠. 저도 평소 유 회장을 닮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때에 직면하면 과연 그럴 용기가 있을까 회의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사업의 진정한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하는 데 있다고 거듭 다짐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유일한 박사는 사업은 어떻게 해야 하고 삶이 종착역은 어떻게 도달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길잡이죠."

박 대표는 유일한 회장처럼 착한 기업을 소망하고 있다고 했다.

"기업이 좋은 상품을 값싸게 공급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하던 시대는 지났어요. 이제는 수익 증대 뿐 아니라 그 수익으로 사회적 기여를 모색하는 것이 기업의 역할이라고 바꿔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영리를 위한 경제활동뿐 아니라 지역과 사회와 유기적인 관계 형성을 통해 사회를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기업, 세상을 바꾸는 가치에 비중을 두는 사회적 기업이야말로 날로 심화하는 양극화의 간극을 좁히는 대안이죠. 시련도 많았지만 이만큼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사회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리라 믿기에 작은 기업이고 비록 작은 기여일망정 돈을 버는 것만큼 착한 기업으로 역할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나"

박 대표는 지난 1월 1억 원 약정을 통해 경남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회사 설립 30년이 기부를 하게 된 계기라고 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회사가 이만큼 성장하고 자신 또한 잘 살 수 있었던 것은 사회의 도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들었다.

"너무 가난해서 대학을 못 가고 뒤늦게 공부를 했죠. 그리고 저는 군대에 가고 싶어도 어릴 때 자치기 하다 눈을 다쳐 못 갔어요. 그동안 저는 그 기간 돈을 벌었으니 제 대신 누군가가 제 역할을 했잖아요. 그러니 빚진 마음이 있죠. 어떻게 보면 그 어려운 환경이 콤플렉스였지만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어요. 스물네 살 홀로서기를 할 때까지 가난밖에 몰랐기 때문에 또 다른 그때의 나를 보면 기꺼이 손잡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죠."

그는 기부를 결정하기까지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으며 계획해왔던 일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이 세상에 내 것은 없다. 다만 사용하다 버리고 갈 뿐'이라고 말했다.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이 세상에 내 것은 없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했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 재물을 쌓아두면 화가 되고 나누니까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됐어요. 그러면서 내 것은 없다는 말의 뜻을 알았고. 사실 재물도 심지어 형제, 부모, 아내, 자식도 그렇죠. 언제 내 곁에서 사라질지 모르고 또 떠날 땐 아무것도 함께하거나 가져갈 수 없잖아요. 대신 마음을 비우고 나누니까 그 빈 만큼 내가 행복해지고 또 그만큼 채워지더라고요. 사랑하는 자식들이지만 아이들에게도 재산을 대물림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나눔의 행복을 느끼고 더 좋은 세상, 함께 사는 세상 만들기에 동참하고 확산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경남사회복지모금회 기부를 결정했어요."

그는 남은 인생 역시 나눔을 실천하는 삶으로 채우고 싶다고 했다.

"인생을 80살까지 산다고 보면 30년 사업을 위해 살았거든요. 기업의 평균수명도 30년 정도라 하더군요. 우리 회사가 30주년을 넘겼으니 그 다음은 보너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2의 인생을 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사업만 해왔는데 인생에서 사업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저만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전부가 아니고요. 물론 먹고살려면 지금 재산으로도 먹고살 수 있죠. 그런데 남들이 저 자식 맨날 빈들빈들 쳐먹고 놀기만 한다고 손가락질하면 그 삶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당연히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재산으로 학교를 설립하거나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 또 노인요양원 같은 사회복지사업 등도 될 수 있고요. 아프리카나 오지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될 수 있고요.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도전하는 일을 제 인생 제2의 목표로 삼아 변화를 모색하고 있어요.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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