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교과서 블랙홀' 탓에 정국의 중심 의제로는 떠오르지 않고 있지만, 최근 야당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사회보장사업 정비 지침'에 대한 반발 기류가 확대되고 있다.
지자체의 자체 복지사업에 대해 정부가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논란거리로 부상한 이재명 성남시장을 둘러싼 논쟁도 어떻게 보면 정부의 '사회보장사업 정비 지침'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전국 지자체에 자체적으로 진행해온 사회보장사업이 국가 지원사업과 중복되거나 유사한 경우 중단하라는 권고를 '하달'했다. 국가와 지자체의 중복 지원을 끊음으로써 재정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 같은 중앙정부의 지침이 헌법에 명시된 지방자치제도를 유명무실화시킬 뿐 아니라,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가 근근이 지탱해온 버팀목까지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미 인천시는 저소득층에 대한 국민건강보험료 지원을 중단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동안 인천시 산하 구·군은 국민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체납자가 늘자 월 1만 원 이하의 건보료를 내는 65세 이상 노인과 장애인 등 저소득층의 보험료를 전액 지원해 왔다. 각 구·군별로 다소 차이는 있지만 1억 원의 예산을 들여 1000여 가구에 혜택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저소득층 건보료를 일부 부담하고 있는데 지자체가 또 지원하는 건 '중복사업'이라는 정부 지침에 따라 그동안 지자체가 운영해온 해당 사회보장 사업은 폐지될 위기에 처했다.
이렇게 축소되는 지자체 자체 복지 사업 규모는 9997억 원으로 추산된다. 전체 국가 예산 규모와 비교하면 그리 큰 예산은 아니지만 약 1조 원에 이르는 이 금액은 전국 기초자치단체가 자체적으로 추진하는 1496개 사업에 실핏줄처럼 흐르고 있고 또 그 수혜자 역시 645만 명에 이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특히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는 "우리 당 국회의원이 확인한 바로는 박근혜 정부는 정비 목록에 포함된 지자체의 사회보장사업을 중앙정부 사업과 유사·중복이라는 이유로 정비하겠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2016년도 중앙정부의 사업 예산까지 대부분 삭감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그 허구성을 지적했다.
전국 기초자치단체가 추진하고 있는 자체 사회보장사업비는 노인, 장애인, 저소득층, 사회복지 종사자, 다문화 가정 등 꼭 필요한 분야에 투입되고 있다.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국가가 부담하는 복지재원이 턱없이 부족하니 지자체 사정에 따라 조례를 제정해 사회적 약자의 고충을 덜어주는 것이다.
지난 12일 국회에서 열린 '지자체 사회보장사업 정비 방안 규탄 국민공청회'에 참석한 이종각 한국민간어린이집연합회 부회장은 "지금 정부가 지원하는 보육료 지원금은 22만 원이다. 수년 전부터 24만 원으로 올려준다, 30만 원으로 올려준다는 공약만 하고 여전히 22만 원이다. 그런데 양질의 보육 서비스를 위해 지자체가 지원해온 보험료, 급·간식비 지원 등을 정부에서 중단하라니, 안 그래도 어려운데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또한, 한경환 지역아동센터 전국단체 연대위원장은 "120만 원 월급을 받고 아동센터에서 일하는 복지사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지자체에서 5만 원을 지원하고 있는데, 그것마저 주지 말라고 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의 지침에 당장 저소득층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문제도 심각하지만, 정부가 헌법에 명시된 지방자치 정신을 무시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정부지침을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이찬진 변호사(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장)는 지방자치법, 사회보장기본법 등에 명시된 법령을 기준으로 봤을 때 주민 복리 증진을 지향하는 것이 지방자치의 본질적 내용이라는 점을 전제하면서 "정부의 사회보장 사업 정비 지침은 지방자치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정비방안이 정비대상으로 명시한 사업은 지자체가 국비보조 없이 자체예산으로 시행하고 있는 자체사업"이라며 "지방의회 심의·의결을 거친 민주적 절차에 따른 자체 예산을 중앙정부가 지역 주민 동의도 구하지 않고 유사·중복성을 판단해 정비를 요구하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기초자치단체의 반발도 가시화되고 있다. 서울·경기·인천·광주시 26개 기초자치단체는 지난 16일 국회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정부의 '지방자치단체 유사·중복 사회보장사업 정비지침'이 지방자치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며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