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백이 절망에서 나를 구했다

편백나무 톱밥이 뿌려진 숲길을 맨발로 걷는다. 발바닥에 닿는 느낌이 푹신하면서도 부드럽다. 공해와 스트레스로 지친 심신을 돌보기에 이만한 곳도 없을 듯싶다. 숲길을 걷다가 명상도 하고, 잔디에 매트를 깔고 잠을 청하거나 그냥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어도 참 좋겠다.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 미륵산길 152 '편백나무 숲 속 나폴리 농원'은 그런 곳이었다.

"편백나무 톱밥에 효소를 섞어 숲길에 깔았습니다. 면역력 증강에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아토피, 비염, 피로감 회복에 효과가 뛰어납니다. 워낙 강력한 피톤치드가 뿜어 나오기 때문에 이곳에는 모기 등 해충이 없습니다. 어떤 부모님은 아토피가 심한 어린아이를 데려와 발가벗긴 채 숲길을 걷는데 모기가 없다보니 만족도가 높습니다."

숲 해설가이자 농장 주인장인 길덕한(55) 대표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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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길 대표를 따라 편백나무 숲을 제대로 느껴보기로 했다. 먼저 숲에 들어가기 전 원적외선 족욕을 했다. 원적외선을 이용해 발에 뭉친 근육도 풀고, 발끝 모세혈관까지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란다. 또한 숲속에서 피톤치드와 톱밥에 섞은 효소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푹신한 숲길을 따라 명상의 길과 잔디 침대를 지나 피라미드 속으로 들어갔다. 우주의 기를 받기 위함이다. 이집트 피라미드 공식 그대로 적용해 만들었단다. 약 5분 동안 우주의 기를 받고 커피 열매가 익어가는 하우스를 지나니 이번엔 냉족욕이다. 편백 오일 한두 방울을 물에 떨어뜨렸는데 그 향이 숲속에 있는 느낌이 들 만큼 강하게 코를 자극한다. 숲길이지만 맨발로 걷느라 열 받은 발바닥을 냉족욕으로 식히고서 이번엔 전망대에 올랐다. 눈 아래로 바다가 보이는 전경이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지 못하게 한다.

"체험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입니다. 해먹에 누워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뒤에 도착한 체험객들이 기다리는 줄도 모르게 되지요."

충분히 상상이 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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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강한 피톤치드 내뿜는 17∼18년생 편백나무

그런데 길 대표를 따라 걷는 숲길 편백나무가 크지 않았다.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보통 편백나무 삼림욕장과는 달랐다.

"흔히 키 크고 수령이 오래된 편백나무에서 피톤치드가 왕성하게 나올 것이라 생각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나무도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청년기에 신체활동이 왕성한 것처럼 편백나무는 수령 13~25년 때 피톤치드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지금 농장에 심은 편백나무는 대부분 17∼18년생입니다. 모기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설마 했는데 사실이었다. 15호 태풍 '고니'가 지나간 다음날이라 통영에는 전날 비가 많이 내렸다. 당연히 습도가 높았고, 이런 날 숲속엔 모기가 많기 마련인데 1시간 가까이 숲길을 걷는데도 모기가 달려들지 않는다.

길 대표는 나이 든 나무는 계속 솎아내 제품으로 활용한다고 했다. 수시로 효소를 섞은 톱밥을 숲길에 뿌리려면 편백나무가 있어야 하고, 또 목제품도 판매해야 해 베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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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이곳에서는 버리는 것이 없습니다. 굵은 나무는 통나무로 판매하고, 잎은 쪄 오일을 짜고, 잔가지는 톱밥으로 활용하고 맨 마지막엔 부엽토로도 판매하는 데 시중에서 파는 부엽토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습니다."

스킨스쿠버로 닿은 인연 통영

길 대표는 어떻게 통영에 오게 됐을까? 말씨를 보니 이곳 경상도 사람이 아니다. 고향을 물었다.

"포천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 포천에서 수백 평의 쌈밥음식점을 경영했죠. 아버지 땅에서 음식 사업을 했는데 손님들이 직접 채소를 채취해 먹을 수 있도록 했기에 손님이 많아 재미가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음식 사업이었는데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 힘든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부모님께 의지해 살면서 취미로 스킨스쿠버를 했는데 제주도는 물론 부산과 거제 등 남해안 바닷속을 훑고 다녔습니다. 당연히 통영도 많이 왔었죠. 당시 이곳 산양읍 바닷속엔 산호초가 너무 좋았습니다."

 길 대표는 바다도 좋았지만 새로운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단다. 그러다가 37살 때인 97년, 잘 나가던 식당을 남에게 임대해주고 통영으로 왔다고 했다.

 "2억 몇천만 원을 들여 이 농장과 통영 시내에 집을 샀습니다. 아내는 오기 싫어했는데 나 혼자 살 수 없어 억지로 달래서 왔습니다. 사실 제주도나 동해안에 정착하려고 했는데 통영으로 왔죠. 이 때문에 친구들도 3년 정도 살다가 다시 포천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때가 큰 딸이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은 세 살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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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수표 주렁주렁 달린 키위 농장

길 대표가 나폴리 농장을 구입하게 된 경위도 참 황당했다. 97년 이곳에 와 보니 농장에 키위가 주렁주렁 달려 있더란다. 당시 도시에서 키위를 사 먹으려면 결코 싼 가격이 아니었는데 이 넓은 키위농장이 몇천만 원에 매물로 나와 있더라는 것이다.

"보는 순간 속된 말로 눈이 뒤집혀졌죠. 눈 앞에 10만 원 짜리 수표가 나무에 매달려 있더군요. 앞뒤 잴 것 없이 바로 구입했습니다. 그리곤 열심히 영농교육을 받으러 다녔습니다. 키위농사죠. 수정하는 법에다 가지치기 등 농업기술센터 문턱이 닳도록 다녔습니다. 노력한 보람이 있었죠. 농사가 잘 됐습니다."

그런데 키위를 수확해 막상 팔려고 하니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생겼다. 가격이었다. 당시 도시에선 개당 2000~3000원 줘야했던 키위라 한 상자에 백 개정도 들어가니 아무리 못 받아도 10만 원은 받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경매를 해 보니 1만 몇천 원에 불과했단다.

"그때만 해도 시스템을 몰랐던 거죠. 농민이 수확한 농산물이 소비자에게 오기까지 몇 단계 유통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겁니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가족들 밥 먹여 살릴 일이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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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꾀를 내어 백화점을 뚫기로 했다. 어렵게 약속을 잡고 몇 시간 기다린 끝에 백화점 관계자를 만났다. 그런데 기다린 보람도 없이 담당자는 길 대표가 내민 자료를 쓱 한 번 보고 '알았다, 연락하겠다' 하고는 끝이었다. 통영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던 게 전자상거래였다. 하지만 전자상거래를 하겠다고 나서자 주변에선 이해를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까지 했다.

"그때가 PC통신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에서 지금의 인터넷으로 넘어가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전자상거래를 위한 홈페이지를 개설했더니 전국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농업인이 전자상거래로 농산물을 잘 팔고 있다'고 뉴스에도 나오고 했죠. 생각지도 못한 성과였습니다. 키위 다 팔고 동네 할머니가 농사 지은 호박이니 유자까지 다 팔아줬습니다. 그러다가 낸 욕심이 화를 불렀죠."

"사업화하자" 솔깃한 제안, 신용불량자 신세

"한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사업을 함께 키워보자는 것이었죠. 사업의 '사'자도 모르는데 얘길 들으니 솔깃했습니다. 금방 벼락부자가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주식회사 '농부가'였다. 서울 홍릉 벤처타운에 사무실을 차렸다. 그게 1999년이었다.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000년 1월 사업자등록을 하고 회사를 세웠다. 그 사람들이 이사진을 꾸렸는데 길 대표는 한마디로 허수아비 사장이었다. 근데 농민이 농산물 유통회사를 만들었다고 또 언론이 띄웠단다. 지금은 농민들도 누구나 홈페이지를 만들어 결제시스템까지 갖추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전자상거래 결제를 하면 농민들에게 메일이나 팩스로 결과를 알려주고 심지어 전화로 연결해 주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했다. 대박을 터트렸다. 오프라인 욕심까지 생겼고, 일산에 100평이 넘는 농수축임산물 농부가 매장을 최초로 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이번에는 가맹사업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친환경 매장을 기획했죠. 그때도 처음엔 잘 나갔습니다. 서울, 부산은 물론 창원, 거제 등 전국에 100여 개 매장을 열었습니다. 당시 내가 경영에 대한 기본 지식을 알았더라면 잘 키웠을텐데 사업을 모르는 나는 그저 이사들이 하라는대로 도장만 찍는 상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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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점점 사업에 구멍이 생겼다. 길 대표가 관리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던 것이다. 농민들한테서 '언제부터 결제가 안됐다'라는 항의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 농민에게서 뺨을 맞기도 했단다.

"나중에 보니까 빚만 잔뜩 늘어나 있었습니다. 빚좋은 개살구였죠. 아차 싶었습니다. 이사들에게 '회사를 살리자는 소리는 안하겠다. 내가 다 뒤집어 쓸 수는 없다. 도와달라'고 했더니 모두 모른 체 하더군요. 내가 포기했죠. 모두 정리하고 통영으로 내려왔습니다. 그게 2004년이었습니다."

길 대표는 고향의 부모님 땅 다 팔고, 통영 집과 농장도 저당잡히고 해서 마련한 10억여 원으로 빚을 정리했다. 빚은 대부분 다 갚았지만 부부는 신용불량자 신세가 됐다.

벤처타운서 받은 플로피디스크 머리카락 쭈뼛

길 대표는 홍릉 벤처타운에서 일할 때 옆 사무실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그는 아토피를 십몇 년 동안 연구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엔 아토피가 환경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기 이전이었다. 연구개발비를 대느라 친척들 자금까지 끌어들여 더는 돈이 나올 구멍이 없는 상황이 됐단다.

"하루는 같이 술잔을 기울이는데 '앞으로 몇 년만 더 버티면 분명 대박을 터트릴 제품인데 여력이 없어 사업을 접는다'라며 개발한 자료가 너무 아깝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분이 연구했던 '히노키' 사진을 보여 주는데 우리 농장에 있는 편백나무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일본에만 있는 '히노키' 나무라고 우기더군요. 당시엔 그런가 하고 흘려 들었죠. 그가 떠나면서 플로피 디스크 수십 장을 건넸습니다. 나중에 형편이 풀리면 이 사업을 해보라면서요."

서울 사업을 접고 통영으로 돌아왔으나 키위농장은 농장이 아니었다. 2~3년동안 비워뒀더니 풀밭으로 변해 버렸다. 사이사이 방풍림으로 심어져 있던 편백나무는 그 사이 엄청나게 자라 있었다.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더군요. 하루는 서울에서 가져온 플로피 디스크를 열어봤는데 순간 머리가 쭈뼛거렸습니다. '아 이거다' 싶었습니다. 긴가민가했던 자료의 사진은 바로 편백이 맞았습니다. 그 시절 인터넷으로 정보가 많이 공유되지 않던 시절이라 산림과학원을 찾아갔습니다. '히노키가 통영에 있는 편백나무 아니냐'라고 했더니, 편백이 맞다고 하더군요. 무릎을 탁 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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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연 기자

키위냐 편백이냐 갈림길에서 내린 선택

그나 남긴 자료에는 편백나무 기름 짜는 방법 등 다양한 활용법이 들어 있었다. 당시 길 대표도 스트레스로 아토피 피부염을 앓았다. 그 방법 대로 기름을 짜 피부에 바르니 거짓말처럼 아토피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돈은 없고, 기름을 많이 내고 싶어 압력밥솥을 이용하다 솥이 터지는 일도 있었다. 다행히도 부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솥이 터져 큰 화를 면했지만 가슴을 쓸어내렸다.

"편백이냐 키위냐 갈림길에 섰었습니다. 뭘 선택할지 결정해야 했죠. 과감히 키위나무를 없앴습니다. 그리곤 편백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옮겨 심고 '농부가'를 운영하면서 만들었던 홈페이지를 활용했습니다. 그나마 농부가는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사이트에 편백오일과 나뭇잎, 묘목 등을 올리니 뜻밖에 잘 팔렸습니다. 이때는 편백나무가 아토피와 심신안정에 좋다는 내용이 알려지기 시작했던 시기였습니다. 다시 몰입하게 됐죠."

부부는 매일 묘목도 키워가며 오일을 짜 판매했다. 다행히도 재료가 모두 농장에 있으니 품만 들이면 됐다. 다시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연히 방송국에서 알고 또 한 번 방송을 타게 됐다.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엄청나게 주문이 들어오더군요. 농장에 있는 재료가 다 나갈 정도였습니다. 농장 밖에 나가 편백잎을 사오기도 했죠. 그게 2005∼2006년이었습니다. 인터넷에 편백 하면 우리 농장이 검색될 정도였습니다."

길 대표는 처음엔 오일만 짰다. 그러다가 2008년 비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각종 화장품은 물론이고 침구류까지 제품 영역을 확장했다.

"2009·2010년 대한민국 발명특허대전에 가습액(편백 증류수)과 이불을 출품했었습니다. 이불은 피톤치드가 든 것이었습니다. 이불에서 오랫동안 피톤치드가 나오도록 했죠. 마이크로캡슐에 가습액을 넣고, 향이 오랫동안 날아가지 못하게 묶어두는 기능 두 가지를 접목해 이불을 만들었죠. 항균 작용이 좋아 특허를 냈는데 둘 다 특허대전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또 2010년엔 경남도가 웰빙식품 경연대회를 열었는데 그곳에서 편백차로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쾌거'였다.

연간 9억 매출에 순수익만 2억 넘는 강소농

나폴리 농원 규모는 전체 3500평 정도 된다. 순수 농장만 3000평이고 주차장 500평은 임대해 사용한단다. 우여곡절을 겪은 길 대표의 수익은 어느 정도일까?

"연간 매출은 생각보다 많은 편입니다. 체험객이 하루 100여 명, 주말에는 400명 정도 옵니다. 이들이 체험하고 커피마시는 데서 하루 100만 원,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수익이 평균 100만 원 정도 됩니다. 연간 매출로 따지면 8~9억 원쯤 됩니다. 우리 부부와 직원 2명이 일하는 데 인건비, 관리비 등 부대경비 빼면 순수익은 2억 원쯤 될 것입니다. 아내는 나폴리농원을, 저는 농부가 인터넷 판매를 맡아 합니다."

체험객들을 대상으로 몰래 모니터링을 한다는 길 대표는 아직 부족한데도 체험객들이 후한 평가를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단다. 하지만 체험객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심신을 힐링하도록 쉴 수 있는 공간을 더 만들 계획이다. 이를 위해 조만간 유럽으로 벤치마킹을 떠난다고 했다.

"규모는 작지만 세계 어느 곳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퀄리티 높은 휴식공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아직까지는 다듬어가는 과정입니다. 단 한 명의 체험객이 오더라도 만족하고 마음 편히 쉬어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추천이유-통영시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전선숙

자연의 힘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편백나무 숲속'나폴리농원'길덕한 대표는 편백을 이용한 편백화장품, 편백차 등 제품 개발과 농촌교육농장으로 체험학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소비자 요구에 발 빠르게 대응해 체험 프로그램 개발, 가공제품 개발, 다양한 마케팅 방식 등 끊임없는 배움과 노력이 오늘의 나폴리 농원을 만든 성공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멈추지 않는 도전과 새로운 개발로 지친 마음을 달래는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 우리 농업과 농촌에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 작지만 강한 우수 강소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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