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을을 위해, 너는 조국을 위해 총을 들었구나"

지난 8월 23일 오후, 메일 한 통이 왔다. 메일 제목에는 '만남:빨치산과 토벌대'라고 적혀 있었다.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기자에게 "도저히 안 오고는 못 배길 걸"이라고 속삭이는 듯 했다. 이건 함양이 아니라 강원도 어디쯤이라도 가야 하는 것이다.

행사가 열리는 함양 벽송사는 한국전쟁 전후로 빨치산과 좌익들의 야전병원으로 쓰였고, 국군에 의해 불탄 후 재건한 곳이다.

함양 벽송사는 멀었다. 승용차는 간신히 올라올 수 있었으나 버스를 타고 온 사람은 산길을 걸어 올라와야 했다.

행사를 주최한 이이화 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 연구원은 기자 승용차에 짐을 가득 실었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모여들자 반가운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민간인학살창원유족회 노치수 회장이다. 한국전쟁 당시 가족이 학살당한 그 또한 메일을 보고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고 했다.

방명록을 살펴보니 전국 곳곳에서 이 행사에 참가했다. 그들 또한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던 사람들이리라.

본격적인 행사에 앞서 이이화 대표 연구원을 잠시 취재했다. 그는 5년째 지역에서 인문학 강좌를 열고 있었다. '만남:빨치산과 토벌대'는 44번째 인문학 강좌였다. 그는 "2012년 무렵에도 이런 행사를 해 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르신들 감정 대립이 심해서 이번에 어렵게 모셨습니다"고 털어 놓았다.

20150915010092.jpeg
토벌대 빨치산 만남 기념촬영./임종금 기자

좌우 모두 "침략세력에 저항"

드디어 행사가 시작됐다. 빨치산 야전병원이었던 곳에서 토벌대 활동을 한 4명과 빨치산 활동을 한 2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이화 대표는 토벌대와 빨치산 어르신을 나란히 상석에 모시고 싶었지만 빨치산 어르신들은 끝내 사양했다. 그들은 반대편 벽에 기대 앉았다. 빨치산과 토벌대는 65년 전과 마찬가지로 서로 마주보며 있었다.

행사 진행 방식은 각자 마이크를 잡고 30분 정도 그 시대 상황과 지금 젊은 세대에게 강조하고 싶은 말들을 하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마이크를 잡은 임명근(90) 씨는 빨치산 토벌대로 활동했으며, 마천면에서 여러 관변단체를 조직한 사람이었다. 귀가 어두워 목소리를 높여야만 했다. 쩌렁쩌렁한 임 씨의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 임명근 어르신(토벌대)./임종금 기자

"제가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지금 91살인데 한국전쟁 때 28살이었습니다. 당시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알 수가 있습니까? 국군에도 좌·우익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는데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들이 갈 데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리산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또 전쟁 때 인민군 중에 미처 북으로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도 지리산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지리산에 들어올 때 뭐 들고 온 게 없었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결국 먹고 살기 위해서 약탈을 했습니다. 당시 마천면 주민들은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공출로 쌀을 다 뺏어가서 아주 힘들었습니다. 옛날부터 우리 마천면은 들이 없고 산이 대부분이라 자급자족이 어려운데 빨치산들이 식량을 뺏어가니 식량을 지키기 위해서 청년들이 일어난 겁니다.

청년 토벌대가 300명 정도 됐는데, 총도 없잖아요? 일본군이 놔두고 간 구식 단발총으로 무장을 하고 마을마다 지키고 있었습니다. 나는 대한청년단(우익단체)을 해서 청년들을 모아서 지키게 하는 일을 했고, 빨치산 토벌을 그렇게 4~5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민들 삶이 너무 힘드니까 경찰이 주민을 다 소개(주민을 강제 이주 시키는 것)했습니다. 그러니 안 그래도 어려운데 한 집에 2~3가구씩 사는 겁니다. (한숨 쉬며)사는 게 기구하지요. 소개한 다음에는 빨치산이 그 집을 쓸까봐 싹 다 불질러 버린 겁니다. 이렇게 한 다음 마천면 8개 고지를 중심으로 목책을 촘촘히 2중 3중으로 박았습니다. 그러니 빨치산이 마을을 침범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때 젊은 친구들이 많이 죽었는데, 결혼도 안 해서 제사 지내줄 가족도 없습니다. 내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그때 토벌대를 하다 죽은 친구들 위령제라도 지내줬으면 합니다."

20150915010089.jpeg
송송학 어르신(빨치산)./임종금 기자

이어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체포돼 비전향장기수로 32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임방규(84)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분명했다.

"19살때 해방을 맞이 했고, 산에서 활동(빨치산)했고 1952년에 체포돼서 사형 구형을 받고 무기 선고를 받았습니다. 장면 정부가 들어서고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됐습니다. 1970년대에 잠시 풀려났다가 다시 수감됐습니다. 제가 활동을 한 것은 김엽수라고 하는 참 존경스러운 선생님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토벌대)계신 분들도 같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으리라 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야, 우리 민족이 36년 동안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을 받은 것도 괴롭고 원통한 일인데, 왜 해방됐는데 미국 지배를 받아야 하느냐. 그러면 미국은 어떤 나라냐? 지금 미국은 필리핀하고 쿠바를 식민지로 가지고 있는 나라가 아니냐. 그러니까 일본과 미국은 똑같은 제국주의 국가다. 지금 젊은 너희들이 미국을 몰아내야 진정한 조국광복을 이룰 수 있다. 아니면 일제 때 보다 더 긴 세월을 지배받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자라면서 우리나라, 우리 역사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국어 하면 일본어였고, 국사 하면 일본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니까 일제 때 배운 게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있었고, 우리 역사도 있었던 겁니다. 일제 때 초등학교 4학년 이상 되는 학생을 모아 놓고 맥아더, 루즈벨트, 처칠 인형에다 칼로 찌르라고 시켰습니다. 식인종들이다. 여기 계신 젊은 분들은 '설마 그렇게까지 했겠나' 싶겠지만 저기 연세 많으신 분들은 알 겁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수천만 명이 죽고 인류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는 그 책임으로 승전국의 지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은 피해를 입었던 민족이고 남을 침략하지 않았는데 왜 또 미국 지배를 받아야 하느냐? 전쟁 끝났으면 반드시 통일돼야 할 민족이지, 해방돼야 할 민족이지 왜 이민족 지배를 받아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우리 민족이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으니 40년 동안 신탁통치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남들은 저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모질게 탄압받으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고 살았느냐?'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침략세력에 맞선 사람들은 다 애국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백 번 생각해도 내 생각이 옳았다고 저는 봅니다. 우리 백성들은 동학전쟁부터 의병투쟁, 소작쟁의,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늘 항거했습니다. 이곳 지리산은 일제시대부터 징용·징병 거부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미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재상이 됐건 장군이 됐건 설령 역량이 있었더라도 침략자와 결탁한 이는 역사에 반역자로 규정됩니다. 그래서 '어차피 한 번 살고 죽는 건데 사람답게 살다가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20150915010078.jpeg
벽송사 전경./임종금 기자

두 사람 모두 어찌보면 같은 맥락에 서 있었다. 침략에 대한 저항. 우리 마을을 침략하느냐 우리나라를 침략하느냐에서 그들은 다르게 판단했고,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앞선 두 사람의 발언이 끝나자 나머지 사람들은 마이크를 주어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앞서 핵심은 다 말해 버렸고, 몇 마디 하는 것도 어르신이 중얼거리는 수준이어서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빨치산 활동을 했던 송송학 씨는 "내가 지금 지리산 빨치산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 곧 출판될 것이다. 거기에 내 할 말을 대신하겠다"고 밝혔다.

서로 화해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시간

이렇게 대화의 시간이 끝나고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질의 응답 시간이 됐다. '무엇이든 물어보시라'는 이이화 대표의 말이 머쓱할 정도로 주변은 조용했다. 저마다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기자가 나섰다.

20150915010086.jpeg
토벌대 어르신들./임종금 기자

-저는 지금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습니다. 혹시 함양 마천면에서도 김종원에 의한 학살이 있었나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질문이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데 토벌대 중 한 사람인 김기태 씨로부터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여기서 사람을 죽였어요. 저기 (안 들림)에서 좌익이라고 해서 52명을 잡아와서 한 사람은 풀어주고 나머지 51명을 쏴 죽였습니다. 구덩이를 파고 쏴 죽였습니다."

-확실합니까? 김종원이 맞습니까?

"예, 김종원 사령관이 확실합니다."

영덕, 양산, 여수, 거제, 산청 등 여러 곳에서 김종원이 저지른 학살 얘기가 나오지만 함양 마천면에서 학살 증언이 나온 것은 없었다. 이어 아시아평화시민네트워크 이대수 운영위원장이 질문을 이어나갔다.

-여기 빨치산 활동을 하신 분과 토벌대가 계신데, 양쪽 후손들끼리 서로 화해를 하거나 모임을 하거나 그런 건 생각해 보신 적 없으신가요?

이번엔 증언자들이 조용해졌다. 토벌대 어르신끼리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거 아들이 알고 있나?", "모르지", "이걸 왜 얘기해", 임방규 씨도 "이건 어르신들이 돌아가실 때 까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큰 아들은 우익으로 활동했고, 작은 아들은 좌익 활동했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곤란하습니까? 서로 '잘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들도 곤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당사자들이 있는 한 어려울 것 같습니다."

20150915010085.jpeg
이대수 운영위원장./임종금 기자

그러면서 그는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인간이 먹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먹는 것 중에 농민들 피땀이 서려 있지 않는 게 어디 있습니까? 농민들이야말로 우리 생명을 잇게 한 어버이가 아닙니까. 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생활용품이나 건물 중에 노동자의 피땀이 서려 있지 않은 게 어디 있습니까? 적어도 인간이라면 고마워 할 줄 알고, 보답할 수 있어야 그게 인간 아닙니까? 동물 아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인간이라는 게 사회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혼자 어떻게 삽니까? 그래서 사람이라면 자기가 몸 담

20150915010077.jpeg
임방규 어르신./임종금 기자
고 있는 사회 발전을 위해서 정의롭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이지 않나 싶습니다.

비전향장기수 중 한 분이 만석꾼 집안입니다. 교도관이 와서 '편하게 살지 왜 이렇게 감옥에서 사냐'고 답답한 듯이 말합니다. 그러면 그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아 그 재산이 모두 우리 아버지가 친일을 해서 작위를 받아 얻은 땅이다. 나 마저 호의호식하고 살면 우리 집안은 영원히 친일 집안이 되지 않겠냐. 나라도 이래야지 그래도 내 아래부터는 애국자 집안이라는 소리를 들을 거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회발전을 위해서 여기 계신 분들이 노력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조용히 말을 듣던 토벌대 어르신도 공감한다는 듯 수차례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록 어쩔 수 없이 총을 겨눴던 사이였지만 동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무언가 접점을 찾은 듯 했다. 이제야 뭔가 말이 통할 때쯤 마칠 시간이 됐다. 참으로 아쉬웠다. 오늘 지나면 다시 어르신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고, 다시 상대방을 원망하며 지낼 가능성이 크다. 여러 차례 서로를 만나면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할 텐데,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다. 아마 서로를 마주한 자리는 이번이 평생에서 마지막일 것이다. 애꿎은 시간을 책망하며 벽송사를 내려왔다.요.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