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나는 인연들

출발하려는데 계기판에 표시된 모터사이클 앞바퀴 공기압이 낮다. 참 좋은 모터이사이클이다. 타이어 공기압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는 기능은 고급 자동차에나 있는 기능인데 말이다.

자동차든 무엇이든 자주 사람의 손을 타야 본래 기능과 모습을 유지한다. 시골집만 봐도 그렇다. 사람이 살고 있을 때는 수십, 수백 년 동안이라도 번듯한 제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으면 불과 10년을 넘기기 어렵다. 얼마 안 가서 기울어지고 허물어진다.

기계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는 매일 타지만 모터사이클은 1주일에 한번 타기가 어렵다. 많이 바쁠 때는 3주에 한 번씩 타기도 한다. 나는 대체로 한겨울에도 아무리 길어도 2주에 한 번씩은 타지만, 지인들 중에는 한겨울 내내 타지 않는 이들도 있다. 탈 것들은 그렇게 멈춰 서 있는 동안 어딘가 낡아가고 약해진다.

 


공기압이 떨어지면 주행 안정성이 떨어지고 고속으로 주행할 때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모터사이클 사이드백에서 전동펌프를 꺼내 앞바퀴에 공기를 넣는데 잘 안된다. 되려 공기가 빠진다. 이번에는 차 트렁크에서 자전거 펌프를 꺼내 시도한다. 마찬가지다. 들어가는 공기보다 새어 나오는 공기가 더 많다. 낭패다. 하지만 그리 걱정할 것은 없다. 주행을 못할 만큼 타이어가 납작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을 천천히 몰아 집 인근에 있는 세차장으로 간다. 그곳에서 기계로 빵빵하게 공기압을 채운다. 적정 공기압은 타이어 옆면에 표시된 최대 공기압 보다 조금 모자라게 채워주면 된다.

 

이번에는 연료를 채울 차례다. 지난 번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연료를 채워놓지 않아서 주황색 주유경고등이 깜박인다. 목적지 방향으로 달리다가 들어선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가득 채운다. 3만 원어치 휘발유를 넣으면 연료탱크가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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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영 기자

 

주유를 하던 허름한 차림의 노인이 자기 아들도 이런 모터사이클을 탄다며 내게 무얼 하는 사람인지 묻는다. 주유가 끝나자 잠시 차 한 잔 하고 가라며 붙잡는다. 어른 말씀을 뿌리칠 수도 없고 해서 헬멧과 장갑을 벗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알고 보니 이 노인이 이 주유소 사장이고, 이것 말고도 경남 도내 여러군데 주유소를 경영하고 있는 분이다. 자신과 아들이 경영하는 주유소가 창원과 인근에 10여 개나 된다고 했다.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조금씩 풀어놓으시더니, "구름이 흘러간 자리에는 또 다른 구름이 흘러와서 그 자리를 채운다. 그러니까 언제나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퇴출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일흔 인생의 연륜이 묻어나는 말씀이었다. "새겨들어야 할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리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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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영 기자

 

여행의 방식

원래 이번 여행 일정은 지리산으로 가서 두세 군데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일이 틀어졌다. 첫 번째 목적지는 함양 지안재, 두 번째는 마천면 창원마을 카페 '안녕'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고, 세 번째는 지리산 품에 있는 절을 둘러보는 것이다.

주유소를 나선 뒤에 지안재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평일이어서인지 구경꾼들이 거의 없다. 주말에는 뱀처럼 여러번 꼬부라진 이 길을 보려고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오늘은 거의 없다. 멋진 길, 특이한 길, 아름다운 길을 뽑으면 항상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길이다. 꼬부랑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서면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바람과 함께 차도 고개를 오르고, 모터사이클도 오르고, 자전거도 오른다.

저 멀리 아까 내가 지나쳐왔던 자전거 한 대가 꼬물꼬물 고갯길을 올라온다. 자동차와 모터사이클처럼 엔진이 달린 기계가 이 길을 오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만큼이나 쉽다. 하지만 오로지 두 다리의 근육으로 페달을 밟아서 올라야 하는 자전거에게는 벅찬 고갯길이다. 나름대로 꾸준하게 천천히 오르는 듯 하던 자전거는 꼬부랑길 초입까지 와서 나무 그늘에서 멈춰선다.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정오의 태양은 만만치 않다. 잠시 숨을 돌린 자전거는 다시 고갯길을 오른다. 그 사이 자동차 여러 대가 자전거를 추월해 지나간다. 천천히 오르던 자전거가 또 멈춘다. 이번에는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고 다시 출발한다. 전망대에서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본다. 자전거가 또 오른다. 몇 구비를 돌아 자전거가 마침내 고갯마루에 도착한다. 자전거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자전거는 에베레스트에 오른 것처럼, 누가 보거나 말거나 허리를 뒤로 꺾으며 "와~"하고 고함을 친다. 나는 마음속으로 자전거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땀흘려 오르고 올라서 정상까지 당도한 데 대해 박수를 쳐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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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영 기자

 

자전거를 남겨두고 나는 다시 출발했다. 그 길로 더 올라가면 더 높은 고개인 오도재에 닿는다. 오도재에서는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오도재는 지안재만큼 전망이 아름답지 않다. 다만 단풍이 절정이 되는 시기에는 볼만하다. 그 외 시기에는 오도재보다 그 너머에 있는 지리산 조망공원에서 보는 전망이 더 좋다. 천왕봉과 그 주변 봉우리 대부분을 볼 수 있다.

금새 조망공원에 도착한다. 팔각정을 새로 짓는 공사 중이다. 그런데 천왕봉과 주변 봉우리들이 모두 구름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거나 아예 보이지 않는다. 지리산 날씨는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구름에 가렸다가도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들을 보기 어려울 듯했다.

사진만 찍고 돌아서는데 110cc 작은 모터사이클 한 대가 들어온다. 아까 지안재에서 봤던 모터사이클이다. 나도 몇 년 전에 할리데이비슨과 함께 동네 마실용으로 갖고 있던 기종이다. 보통은 시골의 할아버지나 중국음식점에서 배달용으로 애용하는 기종이다. 모터이사클을 레저용으로 타는 이들은 이 모터사이클을 '동네 반점'용이라고 무시할지도 모르지만 내 기준으로는 실용성 만큼은 국내·외 최고의 모터사이클이다. 외국 방송에서 선정한 전 세계 10대 모터사이클 기종 중에 1위를 차지한 '커브'가 바로 이 기종이다. 최근에 소설가 김덕길 씨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일본,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37개국을 여행한 기록을 담은 책을 읽었는데, 그가 타고 간 모터사이클도 바로 이런 종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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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영 기자

 

조망공원에 나타난 이 모터사이클에는 텐트와 침낭 등 이동 살림살이가 가득 실려 있었다. 주인장은 거제에서 출발해 한 달하고도 보름째 이곳 저곳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여기 저기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1주일씩 머물기도 한다고 했다. 가족들은 반대하지 않는지, 왜 여행을 다니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그의 여행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그저 무사히 여행을 마치기를, 그리고 부디 여행의 목적을 이루기를 기원해줄 뿐이다.

어긋난 길

조망공원에서 마천면 소재지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창원마을이 나타난다. 창원마을에는 진주에서 환경운동을 하던 분이 살고 있고, 그 아들 내외가 운영하는 마을 카페가 있다. 카페 이름이 '안녕'이다.

올해 봄에 이 마을에 들렀을 때 카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그때는 문이 닫혀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이 카페에서 식사도 하고 차도 한 잔 할 요량으로 목적지 중의 하나로 삼았다. 식사는 냉채국수가 유일한데, 아마도 내 입맛에 딱 맞을 듯해서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런데 카페에 도착해서 모터사이클을 주차하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급한 일이 있어 오늘은 일찍 문을 닫게 됐다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아이고 배도 고프고, 커피도 고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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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영 기자

 

안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연유를 물었더니 급한 회의가 열려서 그렇게 됐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어쩌겠나. 사정이 그런 걸. 주인장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오늘만 날인가, 다음에 또 오면 되지"하고 발길을 돌린다. 그때 카페 안에 있던 바깥 주인장이 헐레벌떡 밖으로 나오더니 어디론가 나선다. 급하기는 급한 모양이다. 가볍게 인사만 한다.

마천면 소재지로 발길을 돌렸다. 식육식당에 들어가서 돼지내장국밥을 주문했다. 점심 때가 지난 시각이라 손님이 나 말고는 없다. 곧 먹음직한 음식이 나왔다. 먹을 만했다. 다만 땡초가 들어있어서 내 입맛에는 좀 매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찌나 매운맛을 그리도 좋아하는지. 그래서 식당에서도 손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매운 고추를 마구 넣어서 음식을 내오는 경우가 많아서 곤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음식업 종사자들께서는 제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다 매운맛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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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영 기자

 

다음 목적지는 남원시 산내면에 있는 실상사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대부분 깊은 산 속이나 산 중턱에 있는데 실상사는 평지에, 들판에 있다. 실상사는 천년 고찰이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 홍척국사가 창건했다. 지리산 천왕봉 서쪽 분지에 있는데 엄천강 용유담과 그리 멀지 않다. 천년고찰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절 안에는 문화재도 많다. 국보 제10호 백장암 삼층석탑, 보물 제35호 석등, 보물 제41호 철제여래좌상, 지방유형문화재 제45호 극락전을 비롯해 16가지 문화재가 있다.

실상사에 가려면 왕복 2차로 지방도변에 차를 세워놓고 입장표를 산 뒤 걸어서 하천 다리를 건너고 200m쯤 들길을 걸어가야 한다. 실상사는 예전에도 두어 번 와봤던 절이다. 천천히 둘러보며 구경을 하는데 한 건물에 스무 명 쯤 되는 사람들이 모여 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살펴보니 아까 봤던 안녕 카페 바깥 주인장도 거기 보인다. 급한 회의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정부가 함양 엄천강에 홍수조절용댐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지역 주민과 단체 등의 의견을 듣기 위한 간담회를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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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영 기자

 

내게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반대다. 진주 남강댐 정도면 우수기 홍수를 막는데 별로 무리가 없다. 홍준표 지사 등 일부는 식수댐으로 해야 한다고 하지만 낙동강, 남강을 깨끗하게 유지한다면 해결될 일이다. 지금도 깨끗한 수돗물을 잘 먹고 있지 않은가?

'소풍'온 듯 사는 사람

실상사를 둘러보고 나온다. 도로 옆에 시골집 모습 그대로인 카페가 보인다. '소풍'이다. 문이 열려 있다. 예전에도 이 집 팥빙수가 먹고 싶어 찾아왔었는데 그때마다 문이 닫혀 있어 주인 얼굴도 보지 못했다. 반가운 마음에 카페로 들어갔다. 옛집 모습 그대로를 카페로 꾸며 놓았다. 커피를 한 잔 하며 주인장 조항우 선생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카페 소풍은 공지영 작가 쓴〈지리산 행복학교〉 에 등장한다. 주인장이 직접 팥을 삶고 벌꿀을 넣어서 만들어내는 팥빙수가 유명한데 지난 주에 끝이 났단다. 대학에서는 조각을 전공하고 광고회사를 다니다 부인과 함께 실상사 생태귀농학교를 다닌 것이 인연이 되어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왔다는 주인장은 실제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인다. 욕심없고, 마음 편하고,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 것이 비결이라고 했다. 지금은 학교에 출강도 하고 농사도 짓고, 카페 문 닫아놓고 산에도 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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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영 기자

 

카페 이름이 왜 소풍인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소풍 온 것처럼 살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서 따왔을까? 다음에 찾아가면 그 이유를 물어봐야겠다.

돌아오는 길에 산청군 산청읍 3번국도에서 시원한 소나기를 만났다. 지리산은 찜통 같은 일상을 식혀주는 소나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 자주 지리산 여행길을 소개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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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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