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이웃, 시를 노래하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름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생략)"

정지용 시인의 시<향수>는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을 만나 시노래의 한 획을 그었다. 시에 담긴 시어 하나하나는 음률을 더해 사람들 귀에서 마음속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13년 동안 시 노래만을 고집하는 '음유 가수'가 있다. 시를 사랑해 시의 이웃이 되고 시의 의미를 노래로 전하는 그를 만나러 양산으로 향했다.

사람 따라 흘러가는 음유가수

"일단 뭐 좀 시켜 먹으면서 이야기하죠. 어제 부산에서 공연 출연하고 새벽까지 뒤풀이에 잠도 못자고 아침도 걸러 배가 고프네요. 박 기자님은 점심 드셨나요?"

서글서글한 그와 인사를 나누며 나나무스꾸리를 떠올렸다. 검은색 뿔테 안경만 착용하면 내가 상상하는 음유시인으로 불러도 손색없는 첫인상이다. 시를 노래하는 가수 박경하(45) 씨와 양산시 명동의 카페 명동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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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하 시노래 가수.

"조금 시끄러워도 분위기는 괜찮죠. 이곳에서 얼마 전 콘서트를 했죠. 타 지역 공연이나 행사를 가지 않고 양산 집에 있으면 여기가 제 아지트에요.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저에게 딱 좋은 곳이죠. 노래도 있고 예술도 있고 문화도 있고 무엇보다도 좋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니까요."

7월호 <피플파워>에 소개했던 가수 이경민 씨가 자신보다 더 이야깃거리가 많은 선배 가수가 있다며 박 씨를 소개했다. 지난 7월 초순 8월호 잡지 게재를 위해 인터뷰 약속을 잡았지만 그의 바쁜 일정 때문에 부득이 무기한 연기됐다. <페이스북>에서 'Pakasoo'로 통하는 그의 담벼락을 들락거리고 손꼽아 쉬는 날을 기다려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아직 전국구 가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박카수' 일정은 두 달 치를 빼곡하게 SNS에 공개했다.

"작년 12월에 첫 앨범 발표하고 나서 제 모든 스케줄을 온라인에 공유해요. 남편이 음반 관련 판매와 제작 등 회계를 전담하고 저는 남편 신용카드 하나만 들고 다니죠. 나머지는 SNS가 제 매니저 역할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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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선생과 박경하 시노래 가수.

그가 공개한 일정에는 공연뿐만 아니라 행사 참석, 공연관람 등 박 씨 삶의 궤적이 그대로 올라와 있다.

"가수라고 공연만 하나요. 시작 특강도 듣고 차 시음전도 가고 사진전도 보고 국악 공연도 감상하고 모든 것이 삶과 시노래 공부죠. 그 속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일정을 미리미리 공개하면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죠. 결국 시노래를 부르며 얻는 것은 사람입니다."

보리 문둥이를 만난 감자소녀

박 씨는 충남 논산에서 7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지만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서 성장했다. 그가 3살 되던 해 아버지는 연탄 관련 사업을 위해 사북으로 이사를 했다. 두 언니를 따라 할아버지가 계신 논산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했지만 1년 후 사북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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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하 시노래 가수의 아버지가 젊으날 전국 신인가수 선발 대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젊은 날 전국 신인가수 선발 대회에서 입상해 가수가 꿈이었던 아버지 곁엔 늘 기타가 있었다. 집안 내력이었을까 그는 자연스럽게 초·중·고 학창시절 내내 합창반 활동을 했다.

"항상 집안에 노랫소리가 흘렀어요. 아버지가 탄광일 마치고 오시면 기타로 반주하고 우리 남매들은 동요를 따라 불렀죠. 생활 속에서 음악가족이 된 거죠."

그는 자연스럽게 노래를 몸으로 받아들였다. 더욱이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셨던 임길택(1997년 작고) 시인은 훗날 그가 시노래 가수로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아버지는 가까운 이에게 사기를 당해 탄광 경비원으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고된 아버지의 일상을 알게 된 것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직장에 취업한 후였다. 그는 지역에서 주는 혜택을 입고 대학 졸업한 사람들도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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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Y그룹에 입사했죠. 회사 생활하며 같은 직장에서 남편을 만났어요. 성실함이 맘에 들어 프러포즈를 받아들였죠. 1996년 결혼하면서 남편 고향인 부산 시부모님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어요. 애 낳고 기르고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죠. 아들녀석 4살 때 제 자신을 뒤돌아보는 기회가 생겼어요."

전화기 너머 시노래 가수까지

그의 잠재된 소녀 시절 재능을 꺼내준 것은 라디오였다. 1999년 부산MBC 라디오 프로그램 중 청취자를 대상으로 전화로 노래 경연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이 키우면 라디오가 친구잖아요. 어느 날 노래 경연 프로그램을 청취하다 바로 신청해서 노래를 불렀어요. 토너먼트로 승부를 이어가며 자신감이 생겼죠. 그리고 간직하고 있던 꿈을 알게 된 거죠. 피는 못 속이죠. 가수가 꿈이셨던 아버지의 피가 제 몸속에 흐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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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통해 박 씨의 목소리는 퍼져 나갔다. 지역 방송과 특집 행사 등에서 활약하게 된 그는 더 큰 꿈을 키웠다. KBS <도전 주부가요스타>에 도전한 것이다. 그는 주 장원, 월장원을 거쳐 연말 대회에도 참가했다. 그즈음 자신의 노래가 아닌 남의 곡을 불러야하는 그에게 회의감이 밀려왔다. 진정한 가수가 되기 위한 고뇌가 시작된 것이다.

"도전 주부가요스타 연말 대회 때 울산에서 온 참가자가 있었는데 부르는 노래가 참 특이했어요. 기성곡이 아니고 창작곡인데 귀에 익지 않은 곡이 너무 인상 깊었죠. 대회가 끝나고 몇 주 뒤 그분에게서 울산에서 시노래패를 함께 하자고 연락이 온 거예요. 그래 이거다, 내가 좋아하는 시에 곡을 붙여 창작곡으로 세상과 소통하자. 그때가 2002년 1월 30일이에요. 아직도 그 날은 기억하죠."

울산을 대표하는 시노래패 '울림'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미 다른 가수에게서 발표된 가사만 반복하며 느꼈던 공허함은 시 창작곡을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의 노래로 채워졌다. 양산과 울산을 오가며 아내로, 엄마로, 가수로, 그는 1인 3역을 기꺼이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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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만에 만난 시의 이웃

순수한 창작 시노래 위주로 활동한 시노래패 '울림'의 발자취가 쌓여가며 그의 음악적 내공도 깊어졌다. 해를 더해가며 문학인, 지역 예술인, 지역 시민단체들과 공연기획을 주도했다. 거리 공연도 마다하지 않았고 학교나 소외시설을 찾아가는 공연도 일상이 되어갔다. 그가 원년 창작 멤버로 활동한 시노래패 '울림'은 어느새 중견문화예술창작단체가 돼 있었다.

"12년 차에 접어 들때 자신을 한번 뒤돌아보았어요. 1년 공연과 행사를 하고 손에 쥔 돈은 200만 원. 단체 외형은 커졌지만 저와 제 남편은 꿈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었어요. 함께 단체를 꾸려온 대표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있었죠. 가수에겐 앨범이 전부인데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어요. 시노래패라는 허우대만 멀쩡한 틀에서 꼭두각시가 된 것 같았죠. 제가 인정할 수 있는 퀄리티의 음반은 헛된 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호수에 앉은 백조였어요. 물 밖에 보이는 모습은 근사했지만 물속에서 아등바등 발을 젓고 있었죠."

2014년 2월 그는 새로운 모험을 택한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변해가는 창작 집단을 탈퇴한 것이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했고 누군가는 '왜?'라며 말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의 떳떳한 길을 걷는 것이 훗날 더 당당하리라 믿었다.

"솔로를 선언하고 이를 악물었어요. 지나온 모든 것을 공부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1집 앨범 준비에 온 힘을 쏟았죠. 삶의 발자취가 아름다운 시인을 만나고 음악 못지않게 아름다운 뮤지션들을 만났죠. 그렇게 10개월 만에 '시와 이웃'이라는 뜻의 첫 음반 '시린'(詩鱗)을 만들었어요. 아들 녀석 적금과 보험도 깨고 남편의 적극적인 도움이 낳은 앨범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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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첫 앨범은 오롯이 그가 선택하고 결정한 시노래 14곡이 담겨 있다. 고인이 되신 초등학교 은사님의 시도 노래가 됐다. 또 광부로 일하며 가족을 책임졌던 아버지가 진폐증을 얻어 병상에 누우며 들려주신 노래도 음반에 수록됐다. 늦게나마 아버지의 꿈은 딸의 목소리와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박카수 시노래 사북과 화순을 향하다

'박경하, 시노래, 박카수, 시린, 들꽃가수, 꺽다리' SNS 상에서 회자되는 그의 이름이다. 그는 다양한 사람과 소통하며 진솔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이 가장 큰 자산이라 여긴다. 곧은 발자취가 묻어있는 시인의 시를 받으며 또 신의가 먼저인 작곡가들의 음률이 더 해 질 때마다 그들을 새로운 삶의 의인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좋은 소리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수 박경하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그런 그의 시노래는 두 곳을 향하고 있다. 바로 강원도 사북과 전남 화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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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하 시노래 가수와 그의 아들

사북은 그가 부르는 시노래가 꼭 풀어야 숙제라고 했다. 유년기를 보낸 곳, 가족과 함께 노래를 불렀던 곳, 마음속에 꿈이 자랐던 곳. 그곳이 사북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사북사태'를 직접 목격했다. 행복과 아픔이 공존하는 고향을 시노래로 부르고 싶은 소녀의 꿈은 아직 진행형이다.

"1집 앨범이 저를 알리는 시노래였다면 2집은 제가 누구인지 제 자신을 찾아보고 소중한 추억을 회상하고 간직하는 시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아마 다음 앨범에는 고향 사북을 기억하는 노래가 담길 것 같아요"

또 하나 가수 박경하의 노랫소리가 향하고 싶은 곳은 화순이다. 지금 그곳 낯선 땅엔 진폐증을 앓고 있는 아버지와 병간호하는 어머니가 계시다. 국가가 지정한 병원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화순행은 빠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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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밖으로 멀리 나오시지 못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멋진 공연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아버지 기타 소리에 동요를 불렀던 셋째 딸이 이제 아버지에게 고향과 가족과 젊은 날의 추억을 불러드리고 싶어요. 매월 광주와 화순을 오가며 공연을 준비 중이에요. 병상에서 노래만 불러 드리는 효도 말고요. 이왕이면 병원을 벗어나 초록이 있는 곳에 공연장을 마련하고 행복한 분들과 함께 부모님 모셔서 딸이 노래하는 좋은 소리와 좋은 세상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엄마와 아빠 덕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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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하 시노래 가수와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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