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제정구 의원의 친형, 동생과 멀리하고 살았던 까닭

사람과 처음 대면할 때 우리는 이름과 소속, 고향 등을 이야기하곤 한다. 자신의 정체성이 다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첫 만남의 낯섦이 해소되는 효과가 있다. 서로가 함께 알고 있는 인물과 공히 인연을 맺어왔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면 친숙감은 더해진다. 공통 화제에 오른 인물이 친분이 없는 유명인이라 해도 정도가 덜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제정호(75) 재경 고성군 향우회장은 이런 연유로 처음 대면하는 사람들과 만날 때면 꼭 두 번씩 인사를 받는다고 한다. '제정호'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인생 이력은 그것대로 강한 첫인상을 남길 만한데, 또 한 번 인사를 받는 이유는 그가 '고 제정구 의원'의 친형이기 때문이다.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가 제정호 회장의 고향이다. 이곳 척정리에서 한국 현대정치(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고 제정구 전 의원 역시 태어났다.

제 회장이 19∼20살 무렵 그의 가족은 진주로 이사를 한다.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 회장이 중학 시절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중학교 졸업 후 1년은 서당에 다녔다. 그리고 동년배 친구들보다는 한해 늦게 고성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또 1년 정도 농사를 지었다. 3살 터울인 '정구'말고도 각각 7살, 10살 터울이 지는 남동생들이 있었다. 이때 제 회장의 모친은 진주로 이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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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호 재경 고성군 향우회장./임채민 기자

"자식들 공부시키려고 그런 결정을 내리신 거죠. 어머니가 여장부 스타일이었어요. 배포도 크시고…. 촌에서 농사 몇 마지기 짓는 게 뭐 필요가 있겠냐시며 진주로 우리를 데리고 이사한 거죠. 다 팔아서 우리 교육을 시키신 겁니다."

제 회장은 또 동년배들보다 2년 늦게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들어간 곳은 경상대학교였다. 때는 1961년이었다. 동생들 역시 차례로 진주에 있는 진주중학교·진주고등학교 등지로 입학한다.

"어머니 덕분에 다시 공부하게 된 거죠. 저는 그냥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공부를 다시 하라고 하시니 좋았던 거죠."

제 회장은 경상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으로 촉발된 '6·3 시위'를 진주에서 이끌기도 했다.

"나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그때는 다 그랬죠. 어디 한두 사람이었나요. 4·19 혁명 후에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제정구 의원과 함께 사회운동이나 정치활동을 같이하신 건 아닙니까?

"아니요. 완전히 분리된 채 살았어요. 문중에서도 그렇고 정구하고는 만나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어요. 만나면 사람들(경찰)이 와서 정구 어딨느냐고 묻고 괴롭잖습니까. 서로 조심했습니다."

당시 고 제정구 의원은 서울대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교련반대 시위를 주도해 수배를 당하고 제적되었는가 하면, 민청학련(전국 민주청년학생 총연맹)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수배, 구속, 투옥, 제적, 복학이 반복되던 시기였다.

제 회장이 졸업 후 동생과 달리 사회(정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 4학년 때 흥국생명에 입사해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동생들 뒷바라지는 본격화됐다.

"고생을 좀 했죠. 남동생 셋이 같은 시기에 모두 서울에서 대학에 다녔죠. 68년인가 입사했는데, 그때 월급쟁이가 뻔하잖아요. 그때 참 힘들었지요. 하하."

-그때 결혼은 하셨습니까?

"스물아홉에 결혼했는데, 캠퍼스 커플이었어요.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죠. 좋은 이야기인지 안 좋은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둘째 동생 등록금이 없을 때 집사람이 결혼 예물로 받은 금반지며 목걸이를 팔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동생이 다시 형수한테 금반지를 사주긴 했지만, 하하. 형제간 우애는 괜찮은 편인데, 학생운동을 하고 그러니까 수십 년간 질곡의 세월을 보낸 거 같습니다."

고 제정구 의원뿐 아니라 막내 동생 '정원' 씨는 서울대 재학 시절 '5·18민주화 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제적당했다. 지금은 신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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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호 재경 고성군 향우회장./임채민 기자

-생활이 힘드셨으니 동생한테 충고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정구하고 같은 생각이었어요. 다만 가정이 어려우니 저는 복지부동하고 있었던 거죠. 동생이 잘못 한다고 보지는 않았어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모시고 노량진에 있는 조그만 판잣집에 살 때 어머니가 정구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 갔습니다. 경찰들이 아들 좀 말리라고 하니까,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하는 말이 맞는 데 뭘 말리느냐고 대들기도 했습니다."

-고성 향우회장을 맡은 이유가 있습니까?

"면 향우회장을 한 2년간 했는데, 지금은 제가 고성군 향우회장을 할 때가 아니죠. 후배들 중에 할 사람이 없으니 억지로 떠밀린 겁니다."

-고성을 '인물의 고장'이라고도 하고, 고위 공직 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많고, 향우회가 활성화될 것 같은데요.

"향우회장을 맡아 보니까 처음에는 뭔가 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어려워요. 농경사회에서는 향우회의 결집력이 높았죠.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흩어졌고 지금은 컴퓨터 하나로 전 세계 정보를 공유하는 세상 아닙니까. 향우회에 옛날 같은 노스텔지어가 없어요. 또 예전처럼 재력가가 돈을 내놓고 향우회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갹출을 하잖아요. 향우회가 싫다는 사람은 없지만 갈수록 찾아오는 사람도 줄어들어요. 고향 뿌리 찾기라는 걸 한 번 해봤어요. 자녀들 데리고 아버지 어머니 고향을 둘러보는 건데, 잘 안되더라고요. 1년에 한 번 정도 모여서 동네잔치 하듯이 만나는 거죠. 다만 제 임기 때 향우들 소식을 담은 책을 발간하고 싶어요.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 회장은 "후배들 중에 하려는 하는 사람이 없어 떠밀려서 했다"고는 말했지만, 그래도 맡은 바 일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고성 특산물 판매를 위해 서울시의 협조를 구해 다양한 자매결연 등을 추진하고 있는가 하면, 향우 기업인들의 고성 투자를 이끌 수 있는 방법 등을 고민하고 있었다.

"고성은 농경사회에서는 핵심 고장이었죠. 충무, 사천, 삼천포, 마산 이런 데서 고성 장날이 되면 싸전에 다 모여들었습니다. 요즘 고성에 한 번씩 가보니, 바닷가가 그렇게 절경인 줄은 옛날에는 몰랐던 것 같아요. 이런 걸 잘 손질하면 좋지 않겠나 그런 생각도 합니다."

제 회장의 고향을 향한 추억은 깊었고, 무엇보다 옛 시절 농사짓던 시절에 대한 아련한 동경심이 존재하는 듯했다.

"제가 고성에 있을 때는 완전 농사꾼이었지요.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그런데 내가 대학 안 가고 서울 안 왔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봐요. 농사꾼이었겠지. 지금 생각하면 그곳에서 농사짓고 동네 이장도 하고 그렇게 살았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괜히 여기 와서 고생만 하고…하하. 지금도 고성에 가면 이런 이야기 하면서 밤을 새워서 술 마시는 친구들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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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호 재경 고성군 향우회장./임채민 기자

제 회장은 30여 년간 보험업계에 몸담았다. 부산에서 근무할 때는 대학원 공부를 했고 동주여자대학에 출강한 적도 있었다. 은퇴 후에는 수필과 시를 소일삼아 쓰고 있다.

제 회장이 쓴 시 한 편을 보니, 그의 고향 풍경과 그가 걸어온 길이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르는 듯했다. <소달구지>라는 시다.


 "이른 봄, 산수유 아래

 소달구지 끄는 노인

 

 늙어빠진 앙상한 암소

 가는 세월에 찌든 노인이

 그렇게도 닮았다.

 쉬어가세나

 이 놈아 귀 먹었냐 힘드냐

 나도 힘드네

 인고의 추억

 너도 나도 늙었네

 

 종달새 노래 소리에

 온갖 시름 다 잊고

 소 울음소리는

 세월의 짐을 토한다.

 

 들녘의 아지랑이는

 그래도 우리를 시샘 하네."

 

제 회장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 맺은 인연으로 정당 활동도 한 적이 있고, 지금은 평당원이라고 한다. 지금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는 않지만 손학규 전 대표의 싱크탱크 격인 삼의정책연구소에 몸담고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젊은 시절 가슴에 품었던 뜻과 보험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쌓은 전문지식은 여전히 사회를 향하고 있었다.

"제가 활동을 잘 못하면 동생한테 누가 되잖아요. 그래서 제 처신이 힘들어요. 동생 이용한다는 말도 듣겠죠. 하지만 저도 저대로 프로페셔널한 경험이 많이 있잖아요. 그래도 사람들은 그렇게 안 봐요. 정구 이야기를 꼭 하게 되는 겁니다. '나'라는 게 없어진 것 같기도 해요. 하하."

인터뷰를 마치고 회장은 "할 사람이 없어서 늙은 사람이 떠밀려서 향우회장이 됐다"며 "뭐 인터뷰할 게 있겠느냐"고 웃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또 이렇게 말했다. "동생들 잘 둔 덕택이지요. 늦게 향우회장도 맡고,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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