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순수한 열정이 너무 좋아요

회한이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인생의 긴 여정에서 젊은 날의 생각이 짧아서, 때론 용기가 없어서, 힘이 부쳐서, 우린 숱한 이유들로 눈을 돌리고 실패하고 망설였다. 돌이켜 보면 인상을 찌푸리며 한탄할 일이 왜 없겠는가.

"할 수 있었는데도 내가 못 했던 거, 그냥 안 하고 회피하고 살았던 거, 그거 때문에 가슴이 아팠죠."

손성란 씨(50)는 한국스타 얘기를 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그냥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게 아니라 아프다고 한다. 그 아픔 때문에 오랫동안 인터뷰를 망설였다.

회한이란 자신의 의지를 능동적으로 표출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내면에서 자기를 괴롭히는 행위라고 니체는 말한다. 하지만 손성란 씨는 한탄만 하며 앉아 있으려 하지 앉는다. 그의 회한은 한 일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다. 후회라는 말을 입밖에 내는 순간 새로운 삶의 용기로 변하듯이, 그의 후회는 하면 할수록 그가 회피하며 하지 않았던 일로 그를 인도할 것이다.

"내 스스로 갈 길을 가야 되겠다. 그러고는 친구가 있는 마산으로 가출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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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 삶의 대부분은 계획표 안에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스타는 손성란 씨의 계획표에는 없었다. 그는 대학엘 가고 싶었다. 공부도 곧잘 해서 경상대 법학과를 지원했다. 하지만 다섯 남매 고등학교도 겨우 보내는 형편에서는 아들 둘이 우선이었다. 엄마 혼자 돼지를 키워 딸들까지 대학 공부시킬 형편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부모님 그늘에서 어떤 혜택도 받고 자랄 순 없겠구나. 내 스스로 갈 길을 가야 되겠다. 그러고는 친구가 있는 마산으로 가출을 했어요."

일주일 단식투쟁 끝에 진주를 떠난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도록 진주를 가지 않았다. 대신 걱정되면 어머니가 마산을 찾아오고 명절에는 남편 혼자 처가에 인사를 했다. 그때의 감정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 발로 나온 집을 다시 들어가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50년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친구 집에 마냥 얹혀살 수가 없어 면접을 본 곳이 한국스타였다. 그리고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아욱실리움이라는 기숙사에 들어갔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막연한 동경에 수녀가 되고 싶었다. 무작정 찾아가 기숙하게 해준다면 수녀 되는 공부를 하겠다고 해서 근로청소년을 위한 기숙사 아욱실리움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86년이었다.

수출에 다닌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침에 일찍 출근했다가 야근까지 다 하고 아무도 안 보는 밤늦게야 퇴근했다. 대학에 못 간 것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고 공순이라는 것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기회만 생기면 공부도 하고 다른 곳으로 옮길 거라 생각하였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한국스타는 각종 전자부품을 만들었다. 1공장에서는 벨과 시계부품을 주로 생산하였고 주로 여성노동자들이었다. 2공장에서는 주로 남자들이 프린터를 생산하였다. 입사할 당시 한국스타는 여성노동자 680명 남성노동자 150명으로 총 830명이 근무하였다. 입사하자 1공장 4층에 배치되었다. 푼사라고 하는 음향 보조품을 만들었다. 라인은 쉼 없이 돌아갔다. 라인이 멈추기 전에는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하지만 동료들 중에 요령을 피우는 이들이 많았다.

노동조합을 결성하다

한국스타만의 특징을 꼽는다면 뽑을 때 인물을 많이 고려했다는 것이다. 해마다 사내에서 미스스타 선발대회도 열었다. 패션감각도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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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라인을 총감독하는 관리자가 남자에요. 그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애들이 맛있는 것도 사다드리고 테이블에 꽃도 갖다 놓고, 그러면 쉬는 시간에 늦게 들어와도 봐준다거나 특혜가 있어요. 너무 불공평하다, 이거는 아니지 않냐는 생각을 했죠."

차별을 느끼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노동조합을 만들면 권익을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당시 민주화의 분위기를 타고 주위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결성을 논의하였다.

누군가 만나자는 요청이 들어왔다. 손성란 씨를 중심으로 4층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려 한다는 소문이 2층에까지 퍼졌던 것이다. 2층에서도 이미 치밀하게 노동조합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고, 막 결성을 하려던 참이었다.

"2층에서는 가톨릭노동문제상담소 정동화 소장님 지원도 받고 해서 서류하고 모든 게 되어있었던 거 같아요. 우리는 다른 절차 같은 건 하나도 없어도 전면적인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에 합류가 딱 됐던 거예요."

모임을 합치기로 하였다. 87년 8월 19일 전윤희 씨를 위원장으로, 손성란 씨를 부위원장으로 하여 한국스타 노동조합을 설립하였다.

회사는 공장을 폐쇄하고 구사대를 동원해 집행부 7명을 납치하였다.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간부사임 각서를 요구하였다. 시골집에 데려가 부모님을 협박하기도 하였다. 각서를 쓰고 풀려나와 마산가톨릭여성회관 뒤에 있던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센터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회사에 들어가 임금협상을 타결지을 수 있었다.

기억이란 늘 자기중심적이다. 그렇게 격한 투쟁과 고난 속에서도 생각의 초점은 두 갈래로 분산되었다.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그의 기억은 단편적이었다.

"노동조합 활동에만 집중했으면 기억에 오래 남을 텐데 박희근 지부장을 같이 만나다 보니까 기억이 분산돼요. 아주 특별한 일 아니고서는 기억을 잘 못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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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신한 센터에서 집행부 다섯 명이 자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났는데 남자 두 분이 머리맡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는 거예요. 깜짝 놀래서 일어나니까 산적두목처럼 덩치 큰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더라고예. 그래, '고생이 많으십니다' 해서 그러면 '아닙니다. 해야 될 일을 하는데요' 이렇게 해야 되는데 '어떡해요, 이런 일 하면 시집도 못 간다는데' 그렇게 했어요."

당시 삼미금속 노동조합 박희근 지부장이 지원 오면서 그렇게 둘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마창노련에서 공적인 일로 만날 기회도 많았다. 동지로 애인으로 둘의 관계는 깊어졌다. 그가 기억하는 박 지부장은 여자의 입장에서 여자를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남자였다. 88년 9월 손성란 씨는 제2대 노동조합 위원장에 취임하였고 90년 임투를 맞이하였다.

"90년 임금투쟁 들어가기 전에 박희근 씨가 그랬어요. 이번에는 구속을 생각해야 된다. 4월에 임투 있으니까 3월에 결혼해야 된다. 이렇게 해서 3월 11일 결혼하고 4월에 임투 들어가고 여름에 구속되었죠."

결혼 제도라는 게 집안끼리의 결합이다 보니, 구속될 것을 예상한다면 석방된 뒤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결혼하자마자 어른들께 "아내가 구속됐습니다." 말하는 게 쉽진 않을 테니까.

민주노조는 짧은 기간 동안 불꽃같이 타올랐다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1990년 새해 벽두부터 회사는 단협을 위반하였다. 신정연휴에 출근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더니 출근하지 않은 조합원들을 무단결근 처리하였다. 이후 불법태업을 유도한 집행부와는 교섭할 수 없다며 협상을 질질 끌었다. 적자를 빌미로 임금동결을 주장하더니 임금공제까지 들고 나왔다. 계속되는 회사의 불성실교섭에 노동조합은 7월 10일 '임금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조합원들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쟁의를 결의하였다. 그러자 이번엔 노동조합과 합의는 물론 공문이나 통고도 없이 200명 목표로 희망퇴사자를 모집하면서 미달되면 강제 감원하겠다고 협박하였다.

7월 16일 오전 10시경 총무과에서 기사 주임급 간부회의가 끝나고 폭행이 시작되었다. 구사대 40여 명이 술을 마시고 한꺼번에 1공장 2, 3, 4층을 오르내리며 난동을 부렸다. 조합원 배를 걷어차고 복도로 끌고 다니며 내동댕이쳤다. 의자를 던져 유리창을 깨고 형광등과 제품을 부수었다. 조합원들은 유리에 베이고 폭행당해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임신 중이던 김희숙 조합원은 배를 안고 쓰러져 실신하였고, 모서리에 사정없이 부딪힌 이귀선 조합원은 끝내 유산하였다.

이틀 뒤 사내식당에서 폭력사태에 대한 규탄집회를 열었지만 또다시 구사대가 몰려와 조합원들을 회사 밖으로 몰아냈다. 이 과정에 부상자가 속출하고 박영숙 조합원은 입원하였다. 지역 차원에서도 대책위가 꾸려졌지만 회사는 오히려 352명을 감원하겠다고 협박하더니, 결국 쟁의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직장을 폐쇄하였다. 7월분 임금도 체불한 채 여름휴가를 틈타 기습적으로 공장을 폐쇄하고 철조망까지 둘러쳐 노동조합 출입을 봉쇄한 것이다. 조합원들은 부당한 직장폐쇄에 맞서 출근투쟁을 벌였고 또다시 구사대에 의해 머리가 깨지고 가스총을 맞는 등 폭행을 당하였다. 급기야 조합원들은 철조망을 뚫고 공장에 진입하였고 회사는 단전 단수를 단행하였다. 공장에 진입한 지 8일 만인 8월 28일 새벽,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30여 명이 연행되었고 집행부 다섯 명과 지원 나온 현대정공 조합원 세 명이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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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한

집행부가 구속된 상태에서 조합원들은 1공장 앞에서 천막을 치고 철야농성을 하였다. 하지만 8월 31일 새벽에 구사대가 천막과 옷, 이불, 돗자리를 불태우고 조합비품과 식기를 부숴버렸다. 조합원들은 철수하여 가톨릭여성회관으로 농성장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9월 16일 현 위원장의 임기가 만료되는 것을 이용해 남자대의원 김용환을 소집권자로 내세워 임시총회를 개최하였다. 10월 17일 임시총회에서는 김용환이 위원장이 되었고 마창노련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임금협상을 회사의 요구대로 합의하였고, 가톨릭여성회관에서 농성 중이던 조합원들은 11월18일 농성을 풀고 회사로 복귀하였다. 민주노조는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불꽃같이 타올랐다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손성란 씨는 구속되어 있었지만 그 마무리를 함께하지 못한 것에 지금도 무거운 죄의식을 가슴에 얹고 있다.

"그때 임신 중인 줄 몰랐어요. 임금협상을 하는데 계속 잠도 오고, 제가 바본가 봐요."

1심에서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그 형을 다 살았을 거라고 말한다. 밖에서는 계속 탄원서를 제출하였고 배는 불러왔다. 지역에서 격려의 편지를 수도 없이 보내왔다. 격려편지도 아이도 힘이 되었다. 91년 4월 21일이 출산예정일이었고 3월 29일 항소심 마지막 공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때 낳은 아이 이름이 기승이다. '기필코 승리하리라'

"우리 애는 지금도 이야기해요. '저도 민주화투쟁의 일원입니다. 저도 옥고를 치렀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항상 그렇게 이야기해요"

잘못했다고 반성문을 쓰고 재판에서 앞으로는 노동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쉽게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떳떳하지 못한 부모가 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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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하였지만 노동조합은 이미 구사대가 장악하고 있었다. 입사할 때 8백 명이 넘던 사원들은 90년 임투를 거치면서 386명으로 줄어들었다. 구속과 출산이 아니었더라도 헤쳐나가기엔 너무 험난한 역경이었다.

"설사 투쟁이 실패로 끝났더라도 좀 더 발전된 다른 역량을 보여줄 수 있었는데 그걸 못 했던 거, 그냥 안 하고 회피하고 살았던 거, 그거 때문에 가슴이 아팠죠. 목표를 잃고 표류하는 배처럼 어디를 가야 될지 모르는 거예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못 해낸 사람이 가지는 회한이라고 해야 될까."

그는 위원장으로서 능력이 부족했던 것에 대한 자책과 빚을 안고 살고 있었다. 그 빚 때문에 지금껏 동료들에게 연락조차 하지 못하고 지내왔다. 그렇다고 그가 지난 일들을 후회하거나 묻어버리려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크고 멋진 일로 주저 없이 노동조합 활동을 꼽는다. 그때 부족했던 자신과 함께 한다고 고생한 조합원들을 가슴에 담고 살고 있었다.

"제가 결혼해서부터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위원장 집이란 걸 다 알아요. 다 알기 때문에 언젠가 지나가다 생각나면 함 오겠지, 이 생각 때문에 그 자리를 고수하고 계속 있었던 건데."

로마제과

남편도 노동조합 활동으로 구속과 해고와 복직을 반복하였다. 생활비 한번 받아본 적이 없던 그는 출산하고 무작정 빵집을 시작하였다. 제빵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빵집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시아버지가 물려준 집을 헐고 2층 건물을 올렸다.

"아기를 낳고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남편이 복직은 됐지만 월급은 활동하는 데 다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어떡해요."

자산동 '로마제과'가 성공은 아니지만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 박희근 위원장은 구속과 해고, 복직을 반복하였다. 복직하여 현장에 복귀하였지만 다시 제로 발령을 냈다. 거제까지 출퇴근을 몇 년이고 했다. 부당노동행위로 판정도 받았지만 공부가 하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었다. 대학에서 물리치료를 배운 뒤 병원에서 근무하다 5년 전 사별하였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둘이서 굉장히 대화를 많이 했어요. 남편 가고 나니까 의논할 상대가 없어 결정할 때 힘들어요. 그래서 이런 습관이 들었죠.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이였으면 어떻게 결정했을까?"

그는 둘이 많이 사랑했노라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아프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많은 망설임 끝에 남편 때문에 인터뷰에 응하게 됐다고 한다. 남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노동조합과 지역운동을 열심히 하였지만 끝내 다른 길을 걸은 것에 대한 오해도 풀고 싶었다. 다른 일에 몸을 담았지만 마지막까지 지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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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안고서는 미래를 열 수 없다

"숙제가 있다면 그동안 마무리 못 했던 것들을 할 수가 있고, 또 지역사회를 위해서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항상 고민하고 있어요. 뚜렷한 방법이 뭔지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사람을 주저앉게 만든다.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 하지만 작아도 가치 있는 행동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다. 그는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다고 한다.

"내가 그때 그렇게만 안 했어도…항상 떳떳하지가 못하다 보니까, 이게 짐이 되고 자꾸 길을 가는데 발목을 잡는 거예요. 작은 일이지만, 그때 손잡고 투쟁했던 동지들 만나서 밥 같이 먹고 '니 요즘 어찌 사노?' 이런 이야기도 이제는 하고 싶어요."

상처는 모래에 새기라 하였다. 상처를 안고서는 미래를 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변화에 겁을 내지 않는다. 결정한 것은 뒤도 안 보고 밀고 나간다. 열심히 사는 모습은 좋지만 어머니를 닮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어머니처럼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은 싫다고 한다. 그의 중심에는 오로지 자신만이 있다. 그의 오랜 상처를 딛고 새로운 일에 발을 내딛는다면 20대의 손성란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 50대에 미래를 꿈꿀 수 있다면 또 얼마나 멋진 삶이 되겠는가. 그의 미래가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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