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뜨거워야 제맛!' 이 말 들으면 땀 흘려 힘들게 일하시는 분들 더 열 받을 텐데... 그래도 뜨거운 뙤약볕 아래 꽃 피우고 열매 맺는 벼나 콩들 입장에선 참 고마운 뜨거움 일터. 한여름에 피는 꽃들 입장도 마찬가지다. 배롱나무도 이렇게 뜨거운 여름 한낮 무더위 속에서 선연한 아름다움 뽐내며 끊임없이 꽃을 피워 올린다.

배롱나무 꽃 찾아 멀리 안동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예전엔 하루 만에 다녀온다는 건 엄두를 낼 수도 없었는데 지금은 왕복 7시간 정도 시간 들이면 한달음에 병산서원 배롱나무 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도로로 인한 환경파괴와 개발, 발전 환상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쭉쭉 뻗은 도로 땜에 참 좋은 세상이다. 안동 병산서원 까지는 꽤나 멀리 가야하는 만큼 인터넷으로 배롱나무 꽃 피는 시기를 점검해 보는 게 좋다. 대체로 한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는 시기쯤에 활짝 핀 배롱나무 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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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내륙고속도를 빠져나와 병산서원과 하회마을 가는 길로 접어들면 꽤 너른 들판이 보인다. 풍산 들이다. 경북지역 5대 들 중 하나란다. 풍산은 낙동강과 너른 들을 끼고 있어 그만큼 풍요로운 곳이었다. 풍산 류씨 집성촌이 하회 마을이고 서애 류성룡이 선조 8년에 풍산에 있던 풍악 서당을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병산 앞으로 옮겨온 것이 병산서원이다. 병산서원 가는 길은 지금도 비포장이다. 내가 대학 다닐 적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개발, 발전 환상에서 벗어나 있는 곳이라 참 좋다. 정말 좋다. 더 좋은 것은 병산서원에 가면 배롱나무 꽃을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거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만대루 주변 그리고 강당과 동재, 서재, 장판각,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인 존덕사 주변에도 온통 배롱나무 천지다. 사당 앞에 있는 배롱나무는 수령이 400여년에 달한다. 높이가 8미터, 나무 둘레가 0.85미터에 달할 만큼 오래되고 큰 나무다.

병산서원에서 만나는 배롱나무 중 가장 운치 있는 것은 만대루와 낙동강 사이에 있는 배롱나무다. 산으로 둘러쳐진 큰 병풍 사이에 작은 배롱나무 꽃 병풍을 보는 듯하다. 만대루에 올라 적어도 한나절쯤 책을 보거나 낮잠을 청하려던 생각은 안타깝게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안전 문제로 누각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팻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만대루에 오르는 대신 낙동강에 내려가 맨발로 모래 위를 걸으며 주변 풍경 감상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우리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풍광 중에 여유와 운치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이 병산서원 말고 또 있을까 싶다. 만대에 걸쳐 늘 그곳에 그런 풍경으로 남아 있는 곳이었으면 하는 바람만 남겨놓고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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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는 저 멀리 '무릉도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주로 무덤가 또는 사당, 서원, 향교 근처에서 볼 수 있는데 꽃말이 '부귀', '떠나간 님을 그리워함'이라 그런 장소에 많이 심은 모양이다. 후손들의 부귀영화를 바라면서 무덤가에, 사당 앞에 많이 심은 나무다. 배롱나무에 얽힌 전설도 먼저 죽은 님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내용 담고 있다. 아주 예쁘고 아리따운 여인을 두고 두 남자가 목숨 걸고 다투었다. 여인이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가 곁에서 질투하며 그 여인을 빼앗으려 하는 다른 남자를 무찌르고 달려오는데 빨간 깃발이 나부끼면 이겨서 돌아오는 것이고, 흰 깃발이 나부끼면 결투에서 진 것인데, 남의 여자를 빼앗으려 하는 나쁜 남자의 빨간 피가 깃발 가득 묻는 바람에 사랑하는 남자가 죽은 것으로 잘못 생각한 여자가 바위 벼랑 아래 몸을 던져 죽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여인의 무덤 옆에 피어난 빨간 꽃이 배롱나무 꽃이다. 그래서 임을 그리워하며 백일 동안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는 꽃.

배롱나무는 백 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 해서 백일홍(百日紅)이라 부른다. 국화과 초본 식물과 구분해서 '목백일홍', '나무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꽃송이가 번갈아가며 차례차례 피어나 거의 백일 동안이나 붉은 꽃을 피우는걸 알 수 있다. 무궁무진하게 피는 것처럼 보여서 부르는 무궁화 꽃과 비슷하다. 사실 무궁화 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처럼 짧은 사랑' 닮은 꽃이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새로 난 가지 아에서 위로 향하며 차례차례 꽃을 피워내기 때문에 오랫동안 꽃이 피어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꽃 피는 기간이 7월에서 10월까지 백일홍처럼 오랫동안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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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랑 잎이 다 지고 난 후에도 배롱나무는 여전히 아름답다. 매끈매끈한 피부가 알몸 그대로의 모습으로 겨울을 난다. 껍질 표면이 연한 붉은 색인데 흰 얼룩무늬가 들어있다. 만져 보면 보들보들한 감촉으로 매끄러워 사람 겨드랑이를 만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배롱나무를 '간지럼나무'라고도 불렀다. 간지럼을 태우면 나무가 간지러워 흔들리나 싶어 실험까지 해보았는데 별 반응은 없었다. 아마도 간지럼을 태우고 싶을 정도로 매끄럽고 요염한(?) 피부를 가진 나무라서 그렇게 부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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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매끄러운 나무껍질을 타던 원숭이가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은 나무란 의미로 원활(猿滑り)이라 부른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에서 부르는 의미가 거의 비슷하다. 배롱나무는 중국에서 들여온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언제쯤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거의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나무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대체로 선비들이 즐겨 찾던 정자, 향교나 서원 주변에서 꽤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은 앞서 언급한 병산서원을 비롯하여 전남 담양의 소쇄원과 명옥헌·식영정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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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도 꽤 많이 심었는데 전남 강진의 백련사, 전북 고창 선운사, 경남 밀양의 표충사에서도 아름다운 배롱나무 꽃을 만날 수 있다. 절이나 사당, 서원에 특히 많은 이유는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버리듯 세속을 벗어버리길 바라는 마음과 청렴한 선비정신을 상징해서라고 한다. 경상남도에서는 창녕군 계성면 사리의 배롱나무 군락지가 유명하다. 경상남도기념물 제 1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부산에 가면 천연기념물 배롱나무를 만날 수 있다.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공원 배롱나무인데 수령이 무려 8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아주 아름답고 오래된 배롱나무다. 가까운 곳으로는 경남 안의에 있는 안의향교 배롱나무 꽃도 일품이다. 살면서 끝없이 사랑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 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라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목 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도종환 -목백일홍

뜨거운 여름 날 도종환 시인의 '목백일홍'이란 싯귀 떠올리며 우리 사는 주변 배롱나무 꽃부터 살며시 들여다보는 운치와 여유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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